사과하면서 설명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건네주고 싶은 물건도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보고 싶었다는 말만이 기쁘게 다가왔다. 나는, 이대로 앉아있으면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무릎을 끌어당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테이블을 빙 둘러 가는 대신, 과감히 테이블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원래대로 돌아온 남자친구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살포시 톡톡 두드렸다. 잘했어- 하고 칭찬하듯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테이블 위에 앉은 채로 진화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자연히 미끄러지듯 그의 옆자리로 내려앉으며, 그와 몸을 꼭 붙이고 나란히 앉아서, 우리가 사귀었던 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팔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를 비스듬히 올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제가 보기엔 중2병이거든요. 라고, 나는 신랄하게 덧붙였다. 악당은 그렇게 무른게 아니니까. 내가 영웅이 되고 싶다고 결심하게 만든 계기인, 과거의 그 사고는,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고, 비참하고, 끔찍해서, 지금도 나는 가끔 기숙사에서 구역질한다. 영웅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사상에는 공감하는 바지만, 그가 그렇게 상냥한 성격이라면.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무참히 난도질 할 수 있을리가 없고, 그렇게 한다면 끔찍하게 후회하게 되겠지.
누군가가 상처입고 후회해야 만들어지는 영웅 같은건 절대로 납득 할 수 없다. 누군가가 상처입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영웅이 되고자 하는 나에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인정할 수 없다.
"과연, 이해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구나. 사실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면 의견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걸 말하기 위해선 하루의 자해까지 털어놓아야 한다. 나에겐 그럴 생각이 없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에게 충분히 고마웠으니까.
"그래도 아끼는 후배라면, 한번쯤은 대화를 나눠보세요. 요즘....힘들어 보이더라구요."
내가 아르바이트 하러 갔을 때, 사진 얘기를 꺼내자 그는 단박에 하루 팬클럽이냐고 반응했다. 그 말은 사진으로 인해 카페 평판이 떨어지거나 논란이 생기는데 나름대로 적잖이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겠지. 친한 선배가 달래주러 가면 그의 정신적 위안에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서, 나는 간단히 조언했다. 이걸로 본의 아니게 카페에 쳐들어가서 다툰 값은 조금 갚은거야, 에릭 점장. 남은 값은 사태가 다 해결되고 나서 아르바이트비로 갚을게.
나는 별로 그를 비난할 마음이 없었다. 사실 오히려 조금 찔리는 마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루를 돕겠다고 했으나, 거기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를 완벽하게 맹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상을 알기 위해 이것저것 참견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에게 실망할까? 배신감을 느낄까? 슬퍼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조금은 가슴이 아프고, 확고하게 에릭을 믿는 그의 의리가 멋있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를 최근에 만났다며, 후배에 대해서 말해줬다는 모습을 보고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에릭 점장, 당신은 이제와서 악당 연기를 하기엔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네. 내가 모를 뿐이지, 당신이 상냥한 성격이라면 분명 좋아해주는 사람은 더욱 많을거야. 그러니까 그러면 안되지. 영웅을 만들기 위한 발판 악역으로 소모되어 버리면, 주변 사람들은 무슨 기분이겠어.
"아하하. 확실히, 고집이 세보이더라구요."
말로 설득하면 분명 최선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 제일 좋다. 그러나 나는 직전에 그에게 진실을 알려달라고 고집부리다가 서로 의념기를 부딫히는 사태까지 갔다. 요컨데 그도 어지간한 고집쟁이란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주변에서 말렸을 때 설득 되었겠지.
그러니까.
"거기에 동감해요. 자기가 악당이 될 수 있을 줄 아나본데, 그건 악당을 너무 얕보고 있는거죠. 최선을 다해서 박살을 내줄겁니다. 너는 악당 같은거 되지 못해. 그렇게 말해줄거에요. 네 앞가림이나 잘 하라고."
유약하다는 소리를 듣는 나지만, 이래보여도 고집 부릴 땐 포기 안한다. 나는 철저한 열등생이다. 청월에 견디지 못하고 도망나와, 가디언이 어울리는지 의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겁쟁이. 그런 나라도 어설픈 악당 놀이를 깨부술 수 있단걸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