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에리꾸에게는 했던 말인데, 하루랑 카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고 춘심이가 부탁을 안해도 진화는 반대했을거야...'성공하기 위해선 청월로 와라! 네 재능을 썩히지 마라!' 라는 주장은 청월에서 아프란시아로 넘어간 진화에겐 장절한 디스잖아!!! ㅋㅋㅋㅋ 어떻게 해도 납득할 수 없다구
다사다난한 시간이었다. 거대한 게이트가 열려,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고, 곁에서 사라져갔다. 그녀가 속한 보건부 역시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부장과 부부장 자리가 공석이 된 상태였을니까. 잠시 기억을 되짚으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하루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 미소는 천둥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에릭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을 떄도 머물러 있었다.
" 있잖아요, 에릭. "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 카페에서, 침묵을 깬 것은 하루의 목소리였다. 여전히 카페에 들어올 때와 변함없는 목소리로 침묵을 깨고 천천히 자그마한 입술을 연다. 그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있었지만, 어딘가 따뜻함은 사라진 듯 보였다.
" 왜, 자꾸 그 아이를 건드려는거에요? "
고개를 살짝 기울여 눈웃음을 지은체 묻는 것은 ,자신에게 그 말을 꺼낸 저의가 무엇이냐고 상냥하게 묻는 듯 했다. 아니 어조는 상냥했지만 마냥 따뜻한 것도 아닌 느낌이었다.
손에 든 커피잔의 온기를 느끼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여기서 표정이 흐트러진다면, 나는 쭈욱 밀려나갈 것 이다. 눈 앞의 소녀는 영성이 뛰어나며, 이전에도 설전에선 몇번이나 내가 주장하는 논리의 오점을 발견하고 꺾었다.
" 실망시킬 생각은 없어. 말했잖아? 어디까지나 가정이라고. "
"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실망시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 "
커피잔을 내려둔다, 쏟아지는 빗방울의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 카사의 재능은 영웅에 가까운 재능이야, 지금 갈고 닦으면 충분히 영웅에 닿겠지. 우리 세대에 와서 더이상 영웅들에게 의존해서는 안되는 지경에 와버렸어. 우린 스스로 발전해야하고, 그들을 뛰어넘어야지. 그러기 위해 재능있는 소수가 억압당하고, 핍박당하여 영웅으로서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은 아주아주 당연한거야. "
" 고로, 카사는 청월에 가서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한다..."
.... 카페에 침묵만이 감돌았다. 하루의 표정에 노기가 떠오르기 직전,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이 방황했던 시절을 알고있다. 여러명에게 실망을 안겨주던 시절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조금만 뒷걸음질 치면, 그 날의 기억들이 자신을 붙잡으면서, 다시 나를 끌고갈 것 만 같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살짝 기분 나쁜 피맛이 느껴졌다.
" 카사에게 그런식으로 말하면 그 아이는 반발할거야. " " 그 녀석에게 가장 필요한건 적이야, 여긴 적이 없어. 야생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안일해지고 말거야. " " 그러니 내가 적이 되어서 경각심을 줄거다. 언제라도 청월로 끌고 갈 것 처럼 말이지. "
커피, 이젠 마실 수 없겠지. 입술이 아플 것 같다.
" 간단하게 요약해줄 필요도 없겠지...? "
영웅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시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련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잘 만들어진 악당이다. 비록 잘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삼류악당 흉내는 낼 수 있겠지. 아니...생각보다 잘할지도 모르겠다.
역시 기분 나쁘다. 에릭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는 동안에도, 하루가 공통되게 생각한 결론이었다. 눈 앞의 에릭이 카사와 좀 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 정도는 직감으로도 알 수 있었다.
" 진짜로, 정말로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에릭 하르트만. "
아마도, 당신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이렇게 당신을 부르는 것이겠죠. 하루는 빛이 번뜩이는 금색 눈동자로 에릭을 바라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낸다. 더이상 상냥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 이 말을 도로 집어넣지 않는다면 한동안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 당신 지금 굉장히 음침하고, 징그럽고, ... 혐오스러워요. " " 혹시 당신 주인공 병이라도 걸린거 아니에요? "
주변에 빛무리를 반짝이며 하루는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이지, 자기 손으로 누군가를 쥐었다 폈다 하려는 그 마음가짐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 네가 뭔데, 그 아이를 강제로 원치 않는 무대 위에 올리려 하는건데?
" 당신과 카사에게 무언가 있다는 건 알아. " " 내가 만나지 못한 연결고리가 둘 사이에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는데. " " 이건 선을 넘은거야, 에릭 하르트만. "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있던 다리를 꼬고 앉은 하루는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기며 차갑게 대답했다.
" 난 그 아이가 원하지 않은 무대에 올라서는게 싫어. " " 그 아이는, 그 아이가 바라는대로 살아갈 자유가 있어. 그걸 네가 멋대로 다른 무대 위에 올려두려고 하다니. " " 굉장히 건방지고, 오만하고, 방자한 생각이야, 에릭 하르트만. " " 너... 정말 최악이구나?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하는거야? "
하루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태양같이 화사한 미소가 아닌, 어딘가의 눈폭풍을 불러올 것만 같은 차가운 미소를 지은 체, 에릭을 내려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 선을 넘지마, 에릭 하르트만. 이건 경고야. " " 이건 카사와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서, 같은 가디언 후보생으로서, 그리고... 그 아이의 연인으로서 하는 경고야. "
이 선을 넘으면, 어떻게 해서든 널 끌어내려주마. 조용히 덧붙여진 말과 함께 차갑게 가라앉은 금빛 눈동자가 에릭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열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에릭의 말에 부정은 하지 않겠다는 듯 미소를 머금는다.. 아아, 고작해야 지금 꺼내는 말이 그거였나.
" 정말이지, 우스워. 에릭 하르트만. " " 너는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
하루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나오다 못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한없이 비웃음을 머금은 웃음소리를 토해낸 하루는 차갑게 웃고 있는 눈으로 양팔을 벌려보인다.
" 그럼 여기서 죽여라, 에릭 하르트만. " " 날 죽이고 나가서 카사를 무대 위에 올리려고 해봐. "
비열한 표정을 짓는 에릭을 비웃듯 웃음을 터트리며 말한 하루는 한순간에 모든 미소를 지워버린다.
" 안 그러면 너를 어떻게든 저 나락으로 빠트릴거야, 에릭 하르트만. " " 여기서 지금, 날 죽이지 않으면 넌 절대로 네 마음대로 하지 못해. 알겠어? "
죽여, 에릭 하르트만! 자, 여기 너를 위해 손수 무기를 선사해줄게.
품에서 메스를 꺼내 테이블에 꽂으며 광소를 짓는다.
" 나를 죽이고 나가서 지금 네가 계획하던걸 하던지, 이대로 날 살려보내서 네 계획이 눈 앞에서 하나씩 하나씩 어그러지는 것을 보던지. " " 난 네게 기회를 줬다, 에릭 하르트만. 결정해. " " 지난 날 자신을 믿어주던 친구들에게 실망과 실망과 실망을 또다시 안겨주고, 또다시 도망쳐봐, 에릭 하르트만. "
메스를 꽂아둔 체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벗어나 에릭의 옆으로 가서 양팔을 벌려보인다. 그대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