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는 한참 더 날 껴안다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충분히 만족한걸까? 아니, 그런 것 치곤 어쩐지 기색이 조금 묘하다. 팔을 얌전히 떨어트리곤, 뭔가 고민이 있는 고양이 마냥 나를 올려보는 것이다. 더 하고 싶었던건데 새삼스럽게 눈치가 보인걸까?
그럼 더 해도 괜찮다고 말해줘야....
...........
".................."
띠용 소리가 날만큼 놀랐다. 왠지 모르게 달콤한 분위기속에서 스스로가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다. '어....뭐라고?' 라고 확인차 되묻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주변이 이렇게 조용한데 잘못들었을리가 없잖아. 놀랐다고 해서 한심한 소리를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한다. 근데 내가 지금 고백 받은건가? 진짜로? 솔직히 별로 현실성이 없어서 어리벙벙하다. 처음 만났을 땐 여자라고 착각했고, 오늘 같은 경우엔 히에엑! 외치면서 펄쩍 뛰지 않았던가. 뭔가 묘하게 어리광도 응석도 많이 부려와서 좋아해주고 있구나~ 라고는 생각했지만, 사귀자는 소리를 직접 들을 줄은 몰랐다.
나를 덤덤하지만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데굴 데굴 구른다. 아무리 얼간이라지만, 이 상황에서 '농담이지?' 라던가 '내가 생각하는 그 사귀자의 의미가 맞아?' 라던가의 확인 질문을 할 생각은 없었다. 차분하게 생각해서 돌이켜보니 방금까지 서로 부둥켜 안고 있었지 않나.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니, 서로 명확한 대상을 지정하진 않았지만 '좋아한다.' 라고 말한 것도 같다. 이럴 수가. 30초전만 해도 그녀에게 나는 무엇일까 고민했던게 바보 같다.
"음......."
그녀를 위해 사양하는게 좋을까, 나는 변변치않은 사람이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빈 말로도 서로를 엄청나게 잘 알거나, 오랜 시간을 접해왔다곤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내 어딘가에 괜찮은 모습을 봤다고 한들, 가까이서 지내다보면 금방 실망하여 떠나가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그 상처를 견딜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자신은 없었다. 물론 그녀도 그 부분은 감안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열띤 고백도 아니고, 뉘앙스를 보건데, '난 널 무척 사랑하니까 함께하자' 라기 보다는.... '네가 마음에 드는데, 한번 같이 사귀어볼까?'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곤 해도 무서운 것이다. 누군가는 겁쟁이 자식이라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소중한 사람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비례해서, 그 사람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현실이다. 가디언넷에서야 [커플들 부럽다~] 라던가 [여자친구 사귀고 싶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누군가와 교제하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단순히 '와! 날 좋아해주는구나, 기뻐!' 라는 마음으로 사귀는 것은, 그야 말로 예의가 아니란 말이다.
"......"
입을 잠깐 연다. '미안해' 로 시작되는 말을 꺼내려다가 다시 닫았다. 요즘 자주 떠오르는 그림쟁이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남을 실망시키는게 두렵단 이유로, 정말 미안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해' 라고 말했다가 들은 신랄한 쓴소리를 어찌 잊겠는가. 어쩐지, 지금도 같은 상황처럼 여겨진다. 서희가 덤덤히 말했다고 해서 이 말이 가벼운 것일리가 없다. 따라서 그녀에 대한 예의를 운운할거면, 나 또한 진심을 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시덥잖은 자기비하와, 겁에 질려 사양하는 꼴이 아니라. 내 솔직한 감정을 말해야만 한다고. 그러니 나는 그녀를 올곧게 마주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 서희야. 사실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야. 물론 방금은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같이 지내다보면....안맞는 부분이라던가, 실망하는 부분은 얼마든지 있을지도 몰라. 사실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멋있는 사람은 아니거든....겁도 많고. 소심하고. 남자답다고 말하기도, 사실은 힘들지."
사귀자고 했더니 이런 소리나 하는게 웃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난 꼭 해야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진지한 녀석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진지한 이야기엔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평소에 비해 말의 무게가 무겁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은 이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그녀와 나에게 서로 후회가 없기를 바랬다.
"그렇지만."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말했던 앞의 말을 누르듯. 조금 힘을 줘서 단호하게 말한다. 주변의 시선이라던가,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안이라던가, 알게 뭐냐. 그런 것에 미안하고 신경쓰지 않겠다. 나는 나다. 내가 그녀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은, 미안한 일이 아니다. 그저 사실일 뿐이지. 그러니까, 그렇게 대답하면 된다.
"나도 널 좀 더 알아가고 싶어. 그러니까 만약 저런 부분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면."
어쩌면 별로 나 다운 행동은 아닐지도 모른다. 옛날이었다면 '만난지 얼마 안되는 여자애랑 사귀자니, 무리야, 무리.'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바뀌고 싶었다. 청월고교에서 도망치듯 떠나는 순간에도, 너무 분하고, 스스로가 한심해서, 그렇지만 포기하긴 싫어서. 나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친한 친구는 날 걱정했고, 어떤 후배는 날 응원했고, 어떤 후배는 날 나무랐다. 그 모든 경험이 날 아주 조금이지만, 바뀌게 한걸지도 모른다.
내 의념 '영웅'에 대해서, 스스로 잘 말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해야 할때면 꼭 붙이는 한마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