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끌어안았을 때, 그는 당황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차분하게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에게서는 봄볕에 잘 마른 이불 냄새가 났다. 팔 아래로 느껴지는 포근하고 서늘한 감촉은 몸을 씻고 난 뒤 시원한 침대 시트에 드러누울 때의 감각을 닮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내가 그의 박동을 느끼는 것처럼, 그도 내 마음을 느끼고 있겠지. 간혹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두 개의 심장이 동시에 뛸 때에는 서로가 하나로 이어진 듯한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내 말이 그렇게 기뻤다면, 응. 나도 무척이나 기뻐." "......."
나는 기뻤다. 좋아하는(기뻐하는) 마음을 알아준 것이 기쁘고, 내 마음이 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 기뻤다. 표정으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지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또 있을까. 내게 있어서는 그만한 것이 더 없다. 그래서 내 심장이 주인을 만난 강아지의 반가운 발걸음처럼 콩닥콩닥 빠르게 뛰어대는 것이다.
이쯤에서 문득 채팅으로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때, 썸에 관한 주제로도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나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었다. 썸이란 게 되게 애매한 거라고.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른 거라고. 나는 옆에 있으면 자꾸만 건드리고 싶어지는 사람을 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내가 했던 대답은, 분명 진화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옆에 있으면 팔짱을 끼우고 싶고, 손을 잡으면 끌어안고 싶고. 지금 그리하고 있는 것처럼. 비단 그와 연애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곁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싶어진다. 이 또한 애매하고 우매하니 썸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걸까. 그런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필요 이상의 접촉은 삼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더랬다. 그 또한 사회적 통념에 기인한 것이겠지. 지금 내 행동의 당위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지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굽힐 것이 없다. 주변인들이 연인으로 오해를 할지라도, 남들에게 당당히 보일 수 있는 행위에서 그칠 뿐이니까.
나는, 깍지를 놓고서 그의 허리에 팔을 마저 두르며 발꿈치를 들어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나와 그는 신장이 비슷해, 그런 자세가 퍽 편안했다.
"좋아."
스치듯이 작은 목소리, 중의적인 말이었다. 친구로서의 그가 좋다는 말이기도 했고, 이렇게 안겨있는 것이 좋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늘이 맑다, 달이 예쁘다, 강아지가 귀엽다 하는 것처럼 자연히 흐르는 말이었다. 그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해석하기 나름이겠지.
>>396 그치만... 학교 가기 전 아침에 씻으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바빠지는걸요... 샤워는 밤이나 새벽에 주로 하는데.. 홈트레이닝...? 스트레칭...? 으윽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한테 어울리는 단어들이 갑자기 나오다니 정말 이러다 위궤양 오겠어요. 근데.. 팔벌려뛰기를 2분이나 해요...?
그녀와 얼마나 서로 안고 있었는지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오랫동안 안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러고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눈치채게 된다. 맹렬하게 울리는 고동은, 확실히 하나가 아니었다. 내 심장소리 외에도 크게 요동치는 맥박이, 그녀가 숨쉬면서 호흡할 때 부풀어오르는 가슴의 감촉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긴장하고 있는걸까, 설레이고 있는걸까, 혹은 기뻐하고 있는걸까.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디언 넷에서 [친구는 어떻게 사귀는 거야?] 라던가, [사귀지 않는 사이끼리 접촉은 어디까지가 자연스러운거야?] 따위의, 그야말로 친구가 없어보이는 하소연이나 올리고 있었다. 그게 어쩌다가 거리에서 여자애와 서로 밀착해 오랫동안 부둥켜 안는 흐름으로 이어진걸까. 돌이켜봐도 잘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예측할 수 없단걸까. 그러고 보면, 서희는 그 화제에 대해서 뭐라고 했더라. 분명히, 옆에 있으면 자꾸만 건드리고 싶은 사람. 거기서 더 나가면 좋아하는 것, 이랬던가. 여태 건드리고 싶은 사람은 많았다....라고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그녀에겐 친한 사람과의 접촉은 다 이런 느낌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왠지 모를 아쉬움이 피어나는건 어째서일까. 나에겐 이렇게 친밀하게 접해본 사람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특별히 여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척이나 특별하는 것이 상대에게 있어선 흔한 일상이라면, 그건 확실히 어딘가 아쉬울테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어디쯤인걸까. 호감은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지만, 이제는 그 정도와 깊이가 어디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뭉게 뭉게 솟아났다.
솔직하게 인정하자. 여자애라던가 계집애라던가 여러 착각이나 조롱을 듣곤하는 나지만, 마음은 정상적인 남자애라고 생각한다. 귀여운 여자애와 이렇게 사이 좋게 밀착해서 껴안고 있으면, 당연히 얼굴도 붉어지고 심장도 뛰기 마련이란 이야기다. 이런 경험이 많았으면 능숙하게 눈치채거나 답을 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부끄럽게도 가디언넷에 하소연할 만큼 이러한 것에 대해 면역이 없다. 원래 이런 것을 태연하게 할 정도로 당당하거나 친화적인 성격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소심해서 깜짝 깜짝 놀라는 나에겐 지금의 행위는 굉장히 특별한 사태란 것이다. 누군가 내게 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Crei 가 연애에 대해 물어보라고 했던 사람 닉네임이 누구였더라. emiya 였나.....
".........."
속으로 열심히 고민하는 나와 별개로, 서희는 날 계속 껴안고 싶었나보다. 주변에서 이목을 끌고 있는게 느껴지는데도 말이다. 우릴 보고 낯 뜨거운 커플이라고 생각할까. 조금 부끄러움이 느껴졌지만, 그게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를 밀쳐낼 만큼 강하진 않았다. 왠지 내가 먼저 밀어내면 굉장히 아쉬워하는 얼굴을 지을 것만 같았기에, 나 치곤 드물게도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주었다. 나로써도 어쩐지 남들이 뭐라하던 그다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껴안고 있을 뿐이라면 별로 문제가 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스스로의 안에서 합리화를 마친 나는, 발돋움을 하는 그녀가 조금 편해지도록 등을 쓰다듬던 손을 허리에 감아 붙잡아 받쳐 주었다. 턱이 누르고 있는 어깨가 조금 간지럽고, 그녀의 머릿결이 가끔 뺨에 닿는다. 목소리 또한 평소보다 훨씬 가깝다. 어쩐지 간질거린다. 구체적으론 몸이 아니라 마음이.
"나도 좋아해."
갑자기 튀어나오는 '좋아' 라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이건 그런 의미인걸까. 아닌 걸까. 착각을 해선 망신을 당하거나 그녀와 어색해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름 열심히 고민한다. 전해져오는 느낌으론 그다지 연애적인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흔들리는건, 내가 경험이 적고 순진해빠진 성격이라 그런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무엇을?' 이라고 되묻고 싶은 심정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됐어.
나도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그녀가 말한 '좋아해'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나도 비슷할 것이란건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미소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