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가 근처에 앉아있는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짚고 가볍게 자기 혐오에 빠져있었다. 이 사건의 시작은, 내가 평소 즐기는 취미로 가디언넷에서 징징거리는 상담글을 올렸고... 거기서 상담해주던 누군가와 얘기하다보니 '밥사주면 친구해주지' 란 말에 혹해서 그만 약속을 잡아버린 것이다. 왜 그런 호기롭고 어리석은 약속을 해버린걸까. 가디언넷에서 사람 함부로 만나지 말라고 누가 경고했던 것 같은데.
"대체....대체 누구지....."
상상속에서 [Spring]의 이미지를 그려본다....험상궃게 생긴 인상, 거대한 근육, 잔뜩 화가난 걸음거리. 날 보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대로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올리면서
'네가 그 건방진 디지몬초진화냐! 오늘 한번 잘 걸렸다, 앞으로 내 밥노예가 되라!' '히에에에에엑....!!'
잉잉, 나도 모르게 울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키보드를 함부로 놀리는 바람에 나는 오늘 초상을 치루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 장소에 성실하게 나온 것은, 혹여나 정말 순수한 아이라면 상처 입지 않을까 걱정을 버릴 수 없어서... 그렇지만 아마 그럴 가능성은 그리 없다. 좋아, 작전을 세우자. 지금부터 부동일태세를 쓰자. Spring 이 도착할 때 쯤엔 내 몸은 불어난 방어력으로 인해 철벽의 돌덩어리가 될 것이다. 후하하, 그럼 무적인걸! 그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내 몸을 철ㅂ....
"히에에에에에엑....!!!!!"
그 직후 느껴진 어깨의 감촉에 나는 팔짝 뛰었다. 날지 못하는 병아리처럼 팔짝 팔짝 뒤었다. 히에에엑, 히에에에엑. 나는 너무 안일했던 것이다. 하려면 진작에 했어야 했다. 후회 가득한 얼굴로 종말을 기다리던 나는, 30초 가량 뛰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왜 아무말도 없지? 결국 지친 얼굴로 돌아본 나는, 그제서야 한박자 늦게 굳어버린 것이다.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보려고 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라며 일부러 입꼬리를 손으로 올리며 인위적인 미소를 보여주었을까. 갑자기 눈빛이 더 초롱초롱해진 듯한 하프물범 베개를 바라보았다. 이녀석 사실 살아있는거 아냐? 싶어 베개를 꾹꾹 찔러보기도 하고.
" 누가 옆에 있어주는 것 같아서 기분 좋잖아. "
잘 때 누군가 옆에 있는 것 만큼 안심되는 것이 없다. 잠에 들며 안 좋은 기억이 하나씩 되살아날 때 가장 힘든 것은, 꿈 그 자체가 아니라, 일어나서 아무도 없는 방에서 위로조차 받지 못 하고 혼자서 감정을 삭혀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지금 누군가 옆에 있어주기는 힘들다. 그러니 적어도 그런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던가.
...너무 생각만 했네. 눈을 감으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잠깐 보인 환각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 하지만 너무... 잠이 올만한 환경이지 않아? "
마음이 편해지는 향기며, 느릿한 노래... 은은한 조명... 잠이 오기 최적의 환경인데. 자지 말라는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른하게 하품했다. 수면부족인가...
히에엑- ... 주변인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너무 놀라서, 여기서 뭐 하냐는 말도 못 들었나? 진화에게 날개가 있었다면 분명히 깃털이 다 빠졌을 거야.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춘심이는, 그가 호들갑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내 진정한 진화는 무슨 일이냐며 인사를 해온다. 춘심이는 제 이름을 서희라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퍽 만족스럽다.
"누가 밥 사준대서."
앞뒤가 전부 생략됐다. 춘심이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주섬주섬 가디언넷 채팅창 화면을 띄워 진화가 잘 볼 수 있도록 팔을 내밀어 보인다.
"이름 웃기지. 닉네임에 진화가 두 번이나 들어가." "근데, 왜 그렇게 놀라? 뭐 잘못한 거 있어?"
약속은 이미 뒷전이고, 어깨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한참 동안이나 기겁을 하던 진화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안색을 살피는 춘심이었다.
"세상에..." 그나마 다림은 싫다고 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편이죠? 거절을 안한걸까요? 못한걸지도? "바다 양에게 그러다니 너무하세요.." "입술을 깨물고 허리와 허벅지.." 저한테도 입술 깨무시고 그럴 거에요? 목도 깨물고 입술도 깨물고 나중에는 품에 파묻히거나 무릎베개로 숙면을 취하실 거에요...? 라고 말하고는 볼이 붉어져서는 빤히 바라보려 합니다. 아직 선도부가 확정된 건 아니지만. 만일 선도부에 간다면 허리를 껴안고 허벅지에 그것도 맨살에 무릎베개로 누웠다고 하고.. 깨물었다고 진술할지도 몰라요? 라고 말하려 합니다.
"...솔직히 친구 사이에 일반적이진 않..죠..?" "저는 바다 양에게도 저렇게 할 줄은 몰랐어요." "혼자만 당하는 것이었다면...저는 사실 상관없긴 했지만요..." 다림은 바다에게 속삭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라는 그런 게 있습니다. 지훈 군이랑 선을 지킨다면 좋지 않을까? 같은 낙천적임의 흔적인가요?
"...껴안는 건 싫지 않아요." 슬쩍 말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일단 데이트..를 하는데 껴안거나 손깍지 정도는.. 아니 다림아. 다림주는 널 그렇게 키운 적.... 있구나.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