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하게 말하다가 웅변할 수 없다는 말에 "어째서?" 라고 물었다. 너무 깊게 묻혔기 때문에? 아니면 이것조차 다른 이가 시킨건가? 무수한 추측만이 감돌 뿐이었다. 그는 다림의 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나를 증오해? "
붙어있다면. 동시에 친애하냐는 물음 역시 되었겠지. 가라앉은 느낌의 다림을 바라보고는 지훈 역시 조금 차분해진 표정으로 다림을 바라본다. 더이상 쿵쾅거리는 거대한 감정은 없었다. 다시 가라앉고, 침전해서, 감정을 표출할 수 없는 이 하나만 남았다.
지훈은 조용히 그것들을 들었다. 유치한 과거사, 라고는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중에 유치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던가. 이정도면 흥미로운 편이었다. 그는 다림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뒤에서야 입을 뗐따.
" 유치한 과거사라고 말하는 것 치고는 슬픈 이야긴데. "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낸 이야기였다. 자신만 살아남은 이야기였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무너졌겠지. 내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도, 나를 기억해줄 사람도 모두 떠났을테니. 그걸 생각하면 아까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지훈은 다림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어깨는... 후드집업을 벗어, 상처 부위에 묶어뒀다. 지혈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숨기는 정도는 될 테니.
"버려지는 경험에 하나 더를 추가한다고 해서.." 바닷물에 빗물 하나를 더한다고 해서 넘치진 않지요. 수단으로써도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을 가볍게 말하고는 침묵과 웅변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을 더해 사족을 붙일 바에는 그저 다물어야죠.
"하나만 덧붙이자면. 나를 증오해도 상관없어요. 날 죽이려고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어도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이네요." 그렇다고 해도 상대방은 찝찝하고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럴 수록 굴레는 끊기기 어려워질 것이고. 너는 떠넘기는 게 맞다.
"지금은 얕은 편이죠." 지훈의 질문에 답한 말은 평범하게 친애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깊지는 않다는 완곡한 표현이었을까. 조금 과격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슬픈 이야기라는 말을 하는 지훈을 보면서 슬프다고 해도 과거에 불과하니까요. 가라앉은 지훈을 잠깐 보았습니다. 무표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다른가요?
"기댈 사람은 없는 게 나아요." 사람 마음이 그게 마음대로 안 되어서 문제인 거지. 라고 말하는 건 제법 이성적인 면을 되찾은 느낌일까요? 사실다림주가정신이잠깐나갔던기분이.. 아니 이게 아니라. 어쨌든간에 술 취한 것처럼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라는 인식일지도 모릅니다.
지훈은 다림의 말에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버려도 상관 없다는 말을 하지만... 애초에 수단으로서 버리는 것도 최후의 방법이나 마찬가지었고, 보통은 그럴 생각도 없었던가.
" 널 증오할 생각은 없지만. 그건 내 목표와 어긋나니까. 그렇다고 해서 너와 엮이고 싶지 않은 거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
요컨데 그가 원하는 것은 원수보다는 친구였던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를 쉽게 죽여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훈은 다림을 빤히 바라보다가, "내가 굴레에 엮이길 원하는 거야?" 라고 물었던가.
" 얕은 편이라. 갈 길이 머네. "
농담 반 진담 반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꽤나 무거웠던 분위기 탓인지 이걸로 농담을 처음 한 느낌이었던가. 아무래도 좋았지만. 과거에 불과하다는 말에 "사람은 과거에 묶여사는 동물이니까, 그 슬픔은 지금까지 이어져 올 것 같아서." 라고 다림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다림의 이야기라기보단... 자신의 이야기인가?
" 난 네가 기대주는 쪽이 더 좋지만. "
딱히 어느쪽 모습도 상관 없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지어보였다기보단 원래부터 그 표정이었던가.
"양 극단은 서로 만나는 것이니까요." 애증이란 참 애매하죠. 결국엔 이 양가감정을 어떻게 하지 않는다면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런 양가감정의 결과는 전부 망자였으므로. 비슷하게 여겨져 혼동되었던 걸까? 학원도에 와서 좀 나아질지도. 아니면 더 비슷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굴레에 엮이길 원하는 거야? 라는 말에는
"반반이네요." 한쪽은 엮이게 만들라 하면서도 굴레에 엮이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하는 것도 있으니까요. 라는 말은 차분했지만. 진짜 꼬시기라도 한다면 아마 엮으려 들지도? 라는 말은 분명 농담입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철저한 무관심은 아니네요. 라고 가볍게 말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을 보이곤 하는 것은 무시가 아니었으므로. 어디에서는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 하지 않던가. 기대주는 게 낫다는 말에는 글쎄요. 라고 약간은 무심한 것 같은 답을 합니다. 기대는 것은 회피하는 상태에서는 고려할 게 아니었기에.
"보건실에 가서 치료 잘 받기를... 바라요." 상해를 입힌 것은 미안하기 때문에 지훈의 눈을 살짝 피하며 말하는 걸까. 뭐 갖고 있는 건 없어서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양 극단은 서로 만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극에 달했을 때의 일이다. 자신처럼 최소한의 친분만 쌓아도 문제가 없다면 해당사항이 없었던가. 그러다가 반반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 그럼 조금은 고려해봐야 할지도. "
엮인다면 죽을지도 모르고, 엮이지 않는다면 친구를 사귈 수 없는 건가. 존재 의의와 직결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차라리 굴레에 엮이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했겠지만. 다림이 농담하자, 지훈은 피식 웃고는 "그것도 염두에 둘게." 라며 드물게 조금 더 큰, 즐거움을 내비쳤다.
" 얕기는 하지만 없진 않나보네. "
무관심은 아니라는 말에 이해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글쎄요. 라고 답하자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니 난 참견 못 하지만." 이라고 말할 뿐, 그다지 설득하거나 하려는 눈치는 아니었던가.
" 나중에 꼭 보상 요구할 거야, 이건. "
농담스러운 어조로 -얼굴은 무표정이여서 상당히 이질적이었지만- 말하며 다림을 빤히 바라보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