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gh로 보낼 뻔한 답장을 취소하고 재빨리 본계인 Nigel로 보낸 나이젤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이라 정신이 없는 걸까. 알람만 맞춰 놓으면 일찍 일어날 수 있는데 알람을 맞추는 걸 깜빡한 어제의 자신에게도 죄를 부가하기로 했다. 그래도 빨리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천운이었다.
일어나서, 바닥에 대충 널브러져 있는 것들을 피해 걷다가(평소에도 이렇지는 않다. 정리하는 걸 깜빡해서 오늘만 이렇게 더러운 것이다), 밀어서 여는 옷장 앞에 도착했다. 오늘의 차림은... 셔츠 위에 검은 후드집업에 검은 바지, 이렇게 말해도 그냥 교복 베이스인 옷이었다. 와! 맨날 입고 다니는 거! 옷 좀 사라 이 교복맨!!
"지훈 씨, 안녕하세요."
약속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았을 때, 후드를 쓴 나이젤이 평소처럼 느긋한 미소를 띈 얼굴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근데 어째서 지훈씨가 먼저 도착해 있는 거지. 설마 약속시간을 헷갈렸나,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은 걱정이지만 순간 그런 생각을 할 뻔했다.
지훈은 느긋하게 나이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령 오늘 놀러가서 뭘 할지, 라던가.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젤의 모습이 저 멀리에서 보였을까.
" 오랜만이야. "
짧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못 본지 꽤 된건 맞으니까. 많이 기다렸냐는 물음에는 살짝 고개를 내젓더니
" 별로. 애초에 기다리는 건 좋아하니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
라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건 진심이었으니까. 사색에 잠긴다던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던가, 단순히 자신이 누굴 만나게 될지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던가.
" 그럼 가볼까. 놀이공원에 사람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최근에 생긴 놀이공원 티켓 두 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자신의 친구중에 시간이 나는 나이젤에게 함께 놀이공원에 가자고 제안했던 것이었겠지. 지훈은 살짝 기지개를 피고는 나이젤을 흘끔 바라보았다. "가자." 라고 고갯짓을 하고는 그대로 나이젤과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했던가.
나이젤은 마지막으로 지훈을 언제 만났던가 떠올렸다. 하지만 오너가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다...! (검색중) (완료) 마지막으로 만난 게 술팟인가? 그럭저럭 오랜만... 일지도.
"보통 기다리는 시간이 싫어지는 이유는 원하는 일이 오기 전의 쓸모없는 시간, 이기 때문이라면... 지훈 씨는 그 시간에 무언가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걸까요."
희미하지만 웃음을 받았단 것도 모른 채, 나이젤은 그런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제시간에 나와줄 거라는 믿음도 기다리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으려나? 같은 생각.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던져 본 말이었겠지.
"놀이공원..."
나이젤은 같이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감상을 떠올렸다. 학원섬에 그런 곳도 있었던가, 하고. 관심없는 것은 잘 모르고 알아도 잊어버리곤 했으니 알 리가 없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도 있었을까. 가자며 이끄는 지훈의 뒤를 따르며 손가락으로 후드를 내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지훈이 입장에서 오랜만일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지훈은 나이젤의 물음에 뭐라고 설명할지 고민하는 듯 잠시 그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 누군가를, 특히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쓸모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그런 거 아닐까. "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들이는 시간에 대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큰 즐거움을 위한 투자일 뿐이었다. 또한 그것이 그저 투자를 위한 버려지는 시간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다. 나이젤의 말처럼 자신은 그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학원섬 내의 놀이공원이었다. 이런 곳도 있었구나, 싶은 감상이 들긴 했지만 아무려면 뭐 어떤가.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