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렸다. 두 세계가 이어졌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두 세계의 사람들은 손을 뻗었다. 작은 문을 두고 두 사람의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졌다. 문 밖에서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색의 눈, 그와 비슷한 머리카락. 그러나 동양인의 외형을 하고 있는 사람.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한 사람.
절반쯤 태운 연초-의념계에선 궐련이라 부르는 것-를 손가락을 튕겨 내던져버렸다. 궐련곽 안에는 아직 19개의 궐련이 남아있었음에도 그걸 즐기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작은 종이곽 하나를 구하려고 들인 수고를 생각하면 영 언짢다. 방위학당 시설을 나와 풍경도 낮선 초행길 헤멘 것이 한 세월이요, 거기서 연초를 파는 가게를 찾는 것이 한 세월이요, 소정의 의념계 화폐를 제공받은 사실이 있어 돈이 모자라진 않았다. 하지만 민증, 아마 이 세계의 호패를 가지고 가게 주인장과 실랑이 한 것이 또 한 세월이었다.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연초를 손에 넣었고 또 그 형상이 휴대하기 매우 편리해보였던지라 그녀는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만.... 의념계 연초는 간편성과 품격이 반비례라도 하는 건지, 맛과 무게가 터무니없이 가벼워 영 피는 맛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가련한 잔질인이 여기까지 어렵게 발걸음을 했거늘...에휴우.."
맥이 쭉 빠진다. 그녀는 차마 버리지 못한 궐련곽을 소매에 넣어두고 다시 학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을 헤메지는 않겠지만 참 멀게만 느껴진다. 학당에 돌아가는 것도 또 한 세월이겠구나. 슬프도다.
바다는 사람을 구경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결코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아서인지, 태반이 미어켓일 뿐인 이 학원도 안에서도 사람을 구경하기란 잔잔한 마음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사람, 사람이라는건 그저 무엇인지. 높은 학력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보아도 스스로의 짧은 평생을 고민해 보아도 뿔이 있는 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아니던가. 차라리 자신이 어머니처럼 완벽한 용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종종 들 때도 있었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싫은 일이었지만....
그렇게 가만히 벤치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눈에 띄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은 학원도에서 전혀 눈에 띌만한 것은 아니지만 토끼모자에 의족을 차고, 한푸를 입은 사람이라면 단번에 시선을 뺏을 수 밖에 없었지. 그렇게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바다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나니 그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요며칠세 그렇게나 이슈거리로 떠오른- 친화적 게이트 존재 아닌가!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고,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기회를 놓치는것은 바보같은 일이라 말이라도 붙여보기 위해 "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기도 하였다
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양식의 건물이라던지, 의복이라던지...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들이었다. 당장 길거리에 있는 저 둥근 것이 달려있는 물체는 무엇이며 말 없이 달리는 마차는 무엇인가. 자신이 알던 상식이 파괴되는 광경에 지원은 그만 정신을 놓아버릴 지경이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광경은 두근거리는 것이었지만 그만큼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공격받을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저 무지로 인한 두려움이었다. 소속감이 희미해지는 이 곳에서, 지원은 자신의 존쟂가 퇴색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 공원 이용 안내 - - 이 공원은 모든 시민이 사용하는 여러분의 소중한 휴식 공간으로 이용시 지켜야 할 사항을 안내하오니.... - 화단에 들어가지 마세요 - - 잔디 보호 -
흘끗 주변을 둘러보자 이런저런 팻말이 눈에 밟힌다. 갈 때는 연초 생각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지금 돌아가는 길에 다시 보니 이곳은 아마 공공 정원과 같은 장소이리라. 여기서 조금만 쉬다 갈까. 마침 여기저기에 걸터앉을 수 있는 긴 의자들이 있다.
이미 한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푸른 머리, 실눈, 그리고 사슴뿔. 하하, 사슴뿔이라니 별나구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슴뿔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걸어온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서 다른 의자는 어디있지? 초면에 옆자리에 앉기는 불편한데.
"사슴뿔..?"
하지만 그녀는 몇 초 지나지 않아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사슴뿔..그래, 사슴뿔인데.. 저 뿔이....
그것은 어떤 확신이라기보단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직감과 같은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고, 친근하게 느껴지고, 그녀를 끌어당기는 듯한 이 묘한 기운은...
기묘한 생각에 빠져버린 그녀는 저 푸른 머리의 여성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얼음처럼 굳게 선 채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게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도 하지 못 한채로.
나름 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바다는 당당히 정정해 주었다. 그렇게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강제로 드러내는 뿔이 용이 아닌 사슴이라고 오해받는 것은 꽤 싫은 모양이지. 그리고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상대는 그대로 얼음처럼 얼어붙어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체 자신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뭐지? 무림인 특유의 ' 칼을 뽑아라 너와 나는 이 자리에서 생사결을 낼 것이다 ' 감수성인가? 하는 오해도 잠시. 뿔뿌리 끝에 가벼운 간지럼증처럼, 묘한 감각이 와닿기 시작했다. 이전 일과 비교되지는 않지만 마치 용과 직면했을 때와 같은.
디저트. 달고 비싸지만 딱히 필요하진 않은 요리. 하지만 수요는 차고도 넘쳐흘러, 이 학원도에서도 어딜 가나 먹을 수 있는 것. 그런 디저트...? 라고도 부를 수 있을 법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나이젤이 고민하고 있었다.
첫입부터 맛없었다.
아무거나 손에 잡혀서 산 거였는데 맛없는 것도 모자라서 하나 사면 플라스틱 케이스에 두 개로 나누어져 담겨 있는 형태의 아이스크림. 나이젤이 먹고 있는 것 말고도 한 개 더 있다. 그냥 버리기엔 음식물이라서 음식물쓰레기 통에 넣어야 할 것 같은데, 길거리에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한입 베어 문 찰떡 아이스크림을 꽂은 꼬치를 들고서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돌아다닐 뿐이었다. 이런 게 신상 한정품이라니, 왜 이런 걸 상품으로 내놓을 생각을 한 걸까. 신비한 자본주의의 세계.
그리고 나이젤은 문득 한 사람과 엇갈렸다. 뭔가 헤매는 듯한 느낌의 사람. 그거다, 다른 사람에게 주면 되잖아!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 이거 드실래요?"
그래서 나이젤은 길 잃은 무림인에게 당당하게 찰떡 아이스크림 한 알을 내밀었다.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내걸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