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에는 막강한 파괴력의 재앙이 항상 빈번하게 발생하는 까닭에 인류는 정기적으로 거처를 옮기며 안위를 유지해왔다. 훗날 오리지늄 엔진의 발명과 함께 인류는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거대한 탑승물을 만들어냈다. 그 결정체가 바로 움직이는 도시, 이동도시인 것이다. 말 그대로 이동하는 플랫폼 위에 건설된 도시로, 갖가지 재앙을 예측하는 시스템이 탑재되어있으며 이동시에는 여러개의 플랫폼으로 모듈처럼 나뉘고, 하나로 합쳐져 한 도시를 이룬다. 하지만 모든 도시가 이동도시인건 아니며, 작은 마을이나 위치가 중요한 몇몇 도시는 정착한채로 살고있다.」
비스카리아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그녀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맹인이기는 했으나 일상생활에 큰 지장 없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아츠를 상시 발동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커다란 결점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종종, 이런 상황을 제외하고는.
비스카리아는 여러모로 생각이 많은 편이었다. 혹은 생각에 빠져있지 않더라도, 과거의 편린이 그녀를 무의식 속으로 끌고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럴 때면 자신이 눈치채지도 못하는 새 아츠가 꺼질 때도 있었다.
지금도 보라.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는지, 바로 앞의 유리 조각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걸어가고 있지 않나?
오니가 거리를 걷다가 무언가에 집중하게 된 것은 엄청난 일은 아니었다. 비스카리아, 오니의 입사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입사 동기가 길을 걸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는 이유 하나 뿐이었으니까. 다만 그 이유가 오니에게는 꽤나 익숙하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그리고 때마침 오니가 스카에게 집중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 .... 스카....! "
스위치가 반쯤 들어간 오니가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스쳐지나가 유리 조각 위에 발을 뻗으려던 스카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어 멈춰세우려 한다. 그새 아츠도 사용했는지 붉은 기운을 띈 오니 뿔이 이마 한가운데에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오니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스카를 내려다본다.
" ... 스카는 언제나 위태위태 하구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
오니의 흩날리던 포니테일이 천천히 가라앉고, 오니는 숨을 고르게 바꾸며 중얼거렸다. 이래저래 자신의 동기에게선 눈을 땔 수 없다고. 왜냐하면 눈이 보이지 않는 동기에게는 이 거리가 그리 안전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아츠가 있어서 대부분은 피하겠지만, 이따금 이렇게 엉성하게 구는 경우가 생기곤 했기 때문이었다.
스카는 갑작스레 일어난 일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안대가 없어 얼굴이 보였다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한참 후에야 겨우 생각에서 빠져나온 듯,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리아?"
그러나 완벽히 깨어난 것은 아닌지, 목소리는 아직도 꿈을 헤메는 것 같았다.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드레스 자락을 잡은 손이 마침내 힘을 풀자 그제서야 굳은 몸도 힘을 풀었다. 시선이 더듬거리며 허공을 떠돌다 자신을 안은 이의 얼굴에 안착했다. 얼굴에 새하얀 미소가 퍼졌다. 곤혹스럽다는 모양으로 눈썹이 쳐졌다.
"미안해요, 리아. 또다시 폐를 끼쳐버렸네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보이는 모양이 이런 모양이라 죄송하네요, 눈송이가 내려앉는 것 같은 모양새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전의 상황은 그녀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포근한 말들은 전부 리아, 당신을 향해 있었다.
"무겁지는 않아요? 이제는 내려줘도 괜찮아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퍽 장난스러웠다. 진심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뼈마디가 드러나는 몸이라 하여도 키가 어느정도 있으니 미안하기도 하다고, 스카는 생각했다.
늦지 않았다, 그 사실 만으로도 오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역시 아는 사람이 피를 흘리는 것은 오니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오랜 친분이 있는 동기라면 뭐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겠지. 안도한 오니가 가볍게 숨을 뱉어내자 형태를 이루고 있던 오니 뿔이 천천히 연기처럼 사라지고, 눈에서 뿜어져나오던 붉은 안광도 서서히 흝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져간다. 한껏 긴장됐던 근육들이 서서히 긴장을 풀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제야 상황을 인지한 듯한 스카의 목소리에 천천히 입술을 연다.
" 안녕, 스카. "
뭔가 뒤늦은 인사였지만 짧게 인사를 건낸 오니는 안도감을 가득 담은 눈으로 스카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두사람의 모습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는 듯 했다. 뭐, 부끄러워 하는 건 아마도 밤늦게 잠들기 직전에서야 하게 되겠지만. 아무튼 자신의 팔 위에서 굳어있던 스카의 몸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스카의 미소를 바라본다.
" 폐는 무슨... 내가 돕고 싶어서 도운거야. 스카니까.. "
눈송이가 내려앉는 듯한 스카의 조심스런 말에, 오니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오히려 다치게 내버려뒀으면 그것이 더 고통스러웠을테니.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신경을 쓰면 좋으련만 오니는 아직 거기까진 닿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튼 오니는 자신의 일은 이미 잊은지 오래인 듯 포근하게 자신에게 말해오는 스카를 보며 하숨을 내쉰다.
" 별로 안 무거워. 이래뵈도 나, 오니잖아. "
스카를 안아드는 것으로 힘겨워할 오니라면 아마도 두자루의 창을 들고 전장을 뛰어다니지도 못 했을 것이다. 뭐, 이래저래 공주님 안기라는 자세가 부끄러울 수 있는 자세였지만 스카가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나지막이 한숨을 뱉어낸 오니는 천천히 붉은 입술을 연다.
" 스카는 어디 가던 길이야? 여기 발 밑에 위험한 거 많아서... 데려다줄게. 불안해. "
오니가 이런 말을 하니 퍽 우습긴 했지만 무덤덤한 표정에서 정말로 불안하다는 듯한 감정이 스믈스믈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봐온 동기였기에 더욱 더 그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도나가 소원을 빌긴 했지만 도나는 스승님이 누나라고 부르는 게 너무 오글거려서 얼굴이 구겨진 찐빵이 됐어. 부끄럽다기보단 민망해서 얼굴을 가린 거야. 스승님은 도나를 괴롭히고 싶어서 일부러 더 징그럽게 구는 것 같아. 게다가 도나는 이리 오라고 했는데 스승님이 도나를 끌고 갔어. 스승님 얄미워.
"으우..."
그치만 스승님의 안마가 생각보다 기분 좋아서 도나도 모르게 옹알이 같은 소리가 나왔어. 어깨를 주물주물 당하니까 몸이 가래떡처럼 늘어져. 도나는 오글거리던 것도 금세 잊어버리고 느리게 눈을 떴어. 근데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스승님이랑 눈이 마주쳤어.
"까아!"
도나는 스승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보지 못했지만 스승님의 눈이 너무 능글맞아 보였어. 그리고 거리가 너무 가까웠어. 그래서 짧은 비명이 도나도 모르게 나왔어. 도나는 고개를 돌리면서 스승님의 얼굴을 밀어내려고 손을 뻗으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