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중 : 💌 수상한 우체통 💌 : 상황극판

0 ??? (FrIxHzc4XU)

2020-09-18 (불탄다..!) 21:19:59

야옹.

여기는 내 집이다옹.
우체부씨는 자꾸 우체통이라고 부른다옹.
편지를 넣어두면 우체부씨가 와서 꺼내간다옹.
이상한 편지는 내가 숨겨버리기도 한다옹.
자주 찾아오라옹.

멍멍.
🐾

423 이름 없음 (l3Ihu3g7zQ)

2020-11-28 (파란날) 22:16:57

>>421

담배는 피지 마.
(CD 커버 아래 익숙한 서명 위로, 금연 껌이 들어 있다.)

424 이름 없음 (ccH30znSF2)

2020-11-28 (파란날) 23:19:58

>>422
어릴때도 그랬지만 정말 자의식이 강하기도 하구나. 난 네 생각하고 이 학교에 온게 아니야. 요즘은 내신을 잘받는게 유리하니까 좀더 유리한 선택을 한것 뿐인데 내 행동 하나하나를 그렇게 악의적으로 해석하는것도 이젠 포기할때가 되지 않았니.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난 너를 크게 신경쓰지 않아. 그저 옛 친구로서 네가 잘되길 바랄 뿐이야.

말이 심하네 그런말은 어디서 배운거야. 내가 진짜 싫으면 이런 편지도 보내지 않을텐데
(사물함 안 비닐봉다리에 그대로 포장된 상자와 정갈한 필체로 맛있게 먹어^^라고 쓰인 쪽지 하나가 들어있다. 상자안엔 블루베리 봉지가 있다)

425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02:54:24

죽지 말고 살아있어, 영감. 내가 당신의 목숨을 가지러 가는 그 날까지.

(급하게 휘갈겨 쓴 필체에는 힘이 실려 있다.)

426 이름 없음 (fnQcBp8yoE)

2020-11-29 (내일 월요일) 09:58:06

>>425

안 죽는다, 이놈아. 멀쩡한 사람을 곧 죽을 병자 취급하고 있어.

(만년필로 적힌 깔끔한 필체는 글자 끄트머리가 독특하게 휘어 있다.)

427 이름 없음 (i/Um/IIKpg)

2020-11-29 (내일 월요일) 10:13:42

저런. 그랬던 거구나. 내가 오해했어.
뭐.. 이런 반응이라도 해줄 줄 알았니? 그 많고 많은 학교 중에서 굳이 여기. 통학 왕복 한 시간.
무슨 헛소리를 하든 간에 집이랑 가깝다는 되도 않는 말은 하지 말자?
이 꼴을 보고도 잘도 농담이 나오지. 난 너랑 친구 놀이 할 생각 없어.

죽든가 죽이든가.
내가 얼마나 추해져야 만족하니?

(당신의 신발장 안, 솜을 빼내어 모래로 가득 채운 인형과 함께 놓인 편지.)

428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0:16:01

situplay>1596241962>426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나 보네. 무슨 병에 걸렸다고 해서 걱정했잖아. 영감 죽으면 뭔 재미로 사냐고. 일은 어때?

(저번보다 정돈됨 필체. 글씨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

429 이름 없음 (fnQcBp8yoE)

2020-11-29 (내일 월요일) 10:25:15

>>428

얼씨구, 네놈도 걱정이란 걸 할 수 있었나 보지? 제발 죽어달라고 빌 때까지 살 거니까 네 한 몸이나 잘 간수해라, 꼬맹아.
일이야 뭐 늘상 똑같지. 너같은 시건방진 꼬맹이들이 속깨나 썩이는 것만 빼면. 너 있는 데는 요새 좀 어떻든?

430 이름 없음 (Hxx4taHeRM)

2020-11-29 (내일 월요일) 10:32:39

솔직히 너 싫지 않아. 용감하고 배짱있지. 내 추종자 애들한테 선전포고만 안 했더라면 좋을 뻔했어. 그러는 바람에 걔네한테 뭐라도 보여줘야 겠잖아. 리더라는 자리는 너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

내일부터 내가 시비 걸어도 그러려니 해.

(편지와 함께 바나나가 덩그러니.)

431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0:35:51

>>429

그야 당연히 걱정하지. 승부를 내기로 했는데 무슨 시답잖은 병으로 죽어버리면 아깝잖아. 영감이야말로 내 걱정 해주는거야? 나이를 먹어서 좀 말랑말랑해 졌나 봐. 대륙 최고검이라는 호칭이 운다, 울어.
요새는 나만한 제자가 없나 보네. 그랬으면 영감이 나한테 먼저 얘기를 했을 텐데 말이야. 나쁘진 않아. 미인들이 많더군. 영감만큼은 아니지만.

432 이름 없음 (fnQcBp8yoE)

2020-11-29 (내일 월요일) 10:50:21

>>431

스승더러 말랑말랑하다니 그놈의 말본새는 통 고쳐지질 않는구만. 그리고 어디서 또 이상한 걸 주워듣고 왔어? 그런 호칭 나는 모른다 인석아.
너같은 제자는 앞으로도 평생 없을 거다. 다섯 걸음마다 말썽을 피우는 놈이 또 있을 리가 있나. 네놈은 기껏 거기까지 가서 한다는 게 여자 구경이냐? 사고 치지 말고, 실없는 소리 하고 다니다 뭇매 맞지도 마라, 이 녀석아.

433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0:57:42

>>432

하하! 그래도 영감이 받아주니 내가 이러는 거 아니겠어? 말은 이렇게 해도 내가 스승님이 어디가서 무시당하는 꼴은 못 보거든. 영감은 늘 겸손하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 세상은 약육강식이야. 그러니 내 실력을 있는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돼.
영감은 어떻게 보면 꼭 부모님같단 말이야. 나야 고아라서 부모님이 살아계신지도 모르지만. 부모 대신 키워줘서 고마워. 사고는 안 칠 자신이 없다. 우리 용병단은 위험한 의뢰만 받아. 알잖아.

434 이름 없음 (fnQcBp8yoE)

2020-11-29 (내일 월요일) 11:09:51

>>433

사람이 가끔은 감출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너무 다 내놓고 다니면 좋을 게 없어요, 이 녀석아. 그리고 한참 모자란 놈이 실력을 보여 주기는 무슨. 네놈은 훈련이나 더 해라.
부모는 또 뭔 놈의 부모야. 대문짝만한 놈이 낯간지럽게. 징그럽다, 인석아.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다.
거 돈 된다고 아무 의뢰나 덥석 받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도망갈 줄도 알아야 돼. 제 한 몸도 건사할 줄 모르면서 남을 무슨 수로 구한다는 건지 원.

435 이름 없음 (YEKIjFX8YU)

2020-11-29 (내일 월요일) 11:26:21

>>434

난 이래서 스승님이 좋아. 내가 정신 못 차리는 것 같을 때 꼭 바른 말을 해주거든. 그런 의미에서 나, 다시 영감님 집으로 들어갈까? 이번에는 물통 옮기는 훈련 횟수 안 빼먹고 할테니까.
농담이야.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 그래도 영감이 가르쳐 준 걸 떠올리면서 그냥저냥 꾸려나가고 있어.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긴 한데, 나이가 있으니까 조심해. 뭣하면 내가 수발 들 사람이라도 한 명 보내줄테니까. 다시 말하지만 내가 가기 전까지 죽지 마. 이 거친 세상에 스승이라는 닻이 있는 것만으로도 약간 살만해지니까. 다시 만날 때까지 몸조심해, 영감.

#여기서 마무리할게. 고생했어!

436 이름 없음 (fnQcBp8yoE)

2020-11-29 (내일 월요일) 11:28:14

>>435 #너참치도 고생했어:D

437 이름 없음 (dzNSqYpgpM)

2020-11-29 (내일 월요일) 12:29:33

>>430

아이고 그랬구나 우리 리더가 뭔가 보여줘야겠구나. 근데 어쩌라고, 일찐짱 놀이는 니네들끼리나 해. 그딴 시시한 놀이에 어울려줄 시간 없어. 리더 좋아하시네 그냥 할짓없는 잉여 불량배주제에

(보냈던 것을 다시 돌려보낸 것인지 조금 갈변된 바나나와 함께 동봉된 쪽지)

438 이름 없음 (hW9tzB7GDE)

2020-11-29 (내일 월요일) 12:40:16

>>427
그래 네 말이 맞아. 사실 너 걱정되서 왔어. 너희 어머니께서 요새 네가 이상하다고 우리 부모님이랑 통화중에 자주 말씀하시는데 옛날 친구로서 걱정이 될수밖에 없지 않겠니.
아직도 그때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거야? 네가 오해하는것 같은데 나는 전혀 그 일과 관련없어. 내가 그날 본건 그저 그애가 뛰어내리고 온 구급차 뿐이야.

이제 너도 고등학생이니까 공부해야하지 않을까. 몸조심 해
힘든일 있으면 얘기하고

(인형옆에 사진이 놓여있다 어린시절의 당신과 이 편지의 필자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친구 세명이 웃고 있다. 뒤에 정갈한 필체로 오랜만에 사진첩을 뒤져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보내. 라 적혀있다.)

439 이름 없음 (nyNVMu7lVY)

2020-11-29 (내일 월요일) 12:46:04

>>437 너는 아직 이 학교 생태계가 어떤지 모르고 있어. 놀이로 생각하겠다면 너 마음대로.. 그래도 여기서 지내는 이상 계속 우리를 무시하긴 힘들겠지.

좀 어울려주면 편하게 되지 않겠어? 눈 딱 감고 싹싹 빌면 끝나. 너도 편해지고 나도 편해지겠지.

(바나나 싫어하냐? 매직으로 쓰여진 사과 한 알)

440 이름 없음 (dzNSqYpgpM)

2020-11-29 (내일 월요일) 13:29:06

>>439
(>>437로부터의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439의 집에 인근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439에게 협박죄로 고소가 들어왔으니 피고소인으로서 경찰서에 출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441 이름 없음 (cN0zgkIHxo)

2020-11-29 (내일 월요일) 13:38:51

# >>440 1950년대 갬성으로 유치하고 무모한 십대들이 보고싶었는데 철컹철컹 엔딩이군
# 수고했어~

442 이름 없음 (wHFVHAP4Wk)

2020-11-29 (내일 월요일) 13:46:50

>>423

정말 이기적이네
아직도 겨울을 좋아해?
(CD커버 사이에 웃는 얼굴을 그린 낙서 쪽지가 끼워져있다.)

443 이름 없음 (tB8linDRj.)

2020-11-29 (내일 월요일) 15:42:49

>>442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어.
그저 네가 있(지워짐) 시집은 아직 가지고 있어?
(익숙한 서명 뒤에 끼워진, 그대로 돌아온 웃는 얼굴의 낙서, 어째서인지 종이가 약간 얼룩지고 쭈글쭈글해져 있다.)

444 이름 없음 (wHFVHAP4Wk)

2020-11-29 (내일 월요일) 15:59:50

>>443

아직도 가끔 읽어.
오래 전에 필사해준 시 하나를 보내.

(조금 큰 종이봉투, 안에 CD와 손수 뜬 듯한 목도리, 접힌 낡은 종이가 들어있다. 몇몇 글자는 흑연이 번져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하니
눈감을밖에.

정지용, 湖水 1

445 이름 없음 (tB8linDRj.)

2020-11-29 (내일 월요일) 16:32:20

>>444

고마워.
요즈음에는 좀처럼 가슴 안까지 닿는 게 없어서.
(몇 전이고 지우고 고친 흔적)그 때 이후로, 무슨 일은 없었어?

(CD에 백석의 시집, 그리고 익숙한 서명)

#후회~하고~있어요~ 왜 적절한 거 찾는데 20분씩 걸리는 팝송을 넣었던 것이지 나는...

446 이름 없음 (wHFVHAP4Wk)

2020-11-29 (내일 월요일) 16:48:01

>>445

별 일은 없어. 항상 똑같지. 사람을 만나볼까 했지만 (지저분하게 지워진 흔적)
나는 아직도 그림을 그려. 너는 조금 싫어했지만.
얼마 전에는 다시 너를 그려볼까 했다가 결국 그만뒀어. 너는 잘 지내? 요즘은 아프진 않고?

시집 고마워.

(CD 사이에 끼워진 접힌 종이, 누군가의 뒷모습이 색연필로 낙서 되어있다.)

# ㅋㅋㅋㅋㅋㅋ근데 첫 곡 듣고 노래 되게 좋아서 놀랐어요ㅠㅠ 옛날 팝송 넣으니까 편지 분위기도 너무 좋고...ㅜㅜ

447 이름 없음 (i/Um/IIKpg)

2020-11-29 (내일 월요일) 17:17:30

넌 정말 대단해. 뭐든 쉽게 해내 버리지. 한때는 그게 마냥 부러웠던 때도있었는데... 난 너무 무서워.
앞으로 얼마나 더 미친놈처럼 굴어야 네가 본색을 드러낼까.
그리고 정말 역겨운 건. 네 가면이 벗겨질 순간에 짜릿함을 느낄 나.
그때 일? 걱정하지 않아도 중학교 때 같은 짓은 안 해.
네가 원하는 대로 열등감에 미쳐버린 만년 2등으로 남아 줄 테니까. 그러니까 더 망가지기 전에. 각자 갈 길 가자.
부모님들도 걱정하시잖아.

그리고 나한테 한 번이라도 더 이딴 사진을 보내면 그땐 정말 죽여버릴 거야.

(오직 당신만이 한 방울의 잉크도 묻지 않고 나머지 두 사람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의로 잉크를 부어버린 사진과 함께 편지가.)

448 이름 없음 (tB8linDRj.)

2020-11-29 (내일 월요일) 17:18:26

>>446

뭐라도, 가슴 안으로 닿는 게 있다면 좋은 거야. 이제는 싫다고 말하지 않(지운 흔적)을게.
자주 열이 올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쁘다고 생각되지는 않아. 겨울이니까 그런 건지.
아니면 내게 (지운 흔적)공허함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너도 그래?

(CD 아래로 익숙한 서명, 그리고 종이가 너덜너덜할 정도로 고쳐 그린, 투박하고 어색한 손의 소묘)

#편지 분위기로는 정말 좋은 것 같아, 나도 보내주는 거 계속 찾아 듣고 있는데 쓰는 분위기가 살아...

449 이름 없음 (wHFVHAP4Wk)

2020-11-29 (내일 월요일) 17:36:49

>>448

너랑 같이 보낸 겨울은 따뜻했는데. 이번 겨울은 조금 춥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나도 요즘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 알다시피, 여기는 산 속이잖아. 벽난로를 피워도 가끔 사라지지 않는 한기가 서려. 네 말처럼 그래서 인건지.

네가 보내주는 노래는 다 듣고 있어.
있잖아. 알고 있겠지만 난 너가 미워. 근데 (지저분하게 지운 흔적)

(CD와 홍차 티백 한 박스. 박스 안에 작은 쪽지가 있다. -잎차로 보내고 싶었는데, 미안- )

# 저도 보내주는 노래 다 찾아서 듣고 있는데 하나같이 가사도 잘 맞고 분위기도 너무 좋네요... 몰입하게 돼요

450 이름 없음 (9Dnn7LTs4c)

2020-11-29 (내일 월요일) 17:49:42

시간이 참 많이 지났네. 다들 어떻게 지내려나? 친구놈도 그렇고, 친구놈의 집사랑, 다른 친구들, 그리고 나의 그녀도!
벌써 일 때문에 떠난지 1달정도 지났나? 곧 돌아갈 시간이 다가와! 돌아가는대로 친구놈한테 가서 돌아왔다고 자랑하고, 기념품도 주고... 할 일이 너무 많은걸!
옛날 그 친구놈의 결혼식 상대 찾기가 생각나는 날이라서, 편지를 끄적여봐. 못보던 우체통이 생겨나서 말이지.
다들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 내 이름? 맞춰볼래? 맞추면 선물이 있다구!

451 이름 없음 (tB8linDRj.)

2020-11-29 (내일 월요일) 17:50:02

>>449

차라리 춥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솔직히 말해서(너덜너덜해서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글씨) 네가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려고 해.
모르지는 않아, 모를 수도 없고. 그런데, 자꾸 잊으려고 해.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모르겠다, 하나도.
시간은 흘렀는데, 나는 아직 멈춰 있어.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미안해.

잘 가지고 있을게.

(CD 아래 익숙한 서명, 낮선 브랜드의 샴푸가 한 통)

452 이름 없음 (wHFVHAP4Wk)

2020-11-29 (내일 월요일) 18:04:40

>>451

창 밖이 어둡다.
나도 그만 흘러가려고.
보내준 샴푸는 고마워. 미안. 쓰진 않을거야.
고마워. (지운 흔적) 이제 얼마 뒤에 눈이 오려나봐. 건강 조심해. 다음 겨울은 따뜻하길 바랄게.

(CD 사이에 조금 큰 종이 한장이 접혀있다. 종이에는 수채화로 그린 누군가의 뒷모습이 그려져있다.)

453 이름 없음 (tB8linDRj.)

2020-11-29 (내일 월요일) 18:29:45

>>452

나는 어둠을 볼 수 없어.
이상한 말이지, 누구도 어둠을 볼 수 없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나는 볼 수 없게 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공간에, 공백에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겹쳐 보이게 된 뒤로는 그랬어. 해가 져도 느끼지 못하게 됐어.

그렇게 사로잡혀 있는 게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 두려웠어. 시를 읽지도, 쓰지도 않게 되었어. 샴푸를 바꾸고, 레코드를 창고에 넣어 버리고, 그렇게 하면 바뀌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했어. 나는 그토록 격렬하게 그 시절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어. 그 같잖은 구속이 너무 아프다고 느꼈어. 정말 아픈 건 너였을텐데.

너를 떠나 한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내 안에 영원히 남을 마음의 종양이 생긴 것을 느꼈어. 그게 나를 잡아먹는 것이 두려워서, 집을 나서지 않게 되었고, 거울을 보지 않게 되었고... 나를 말라 죽어가게 내버려두려 했어. 내 아픔을 마주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하고 말았어.

그러나 나는 겨울을 싫어했는데, 내 몸을 갉아먹는 한기를 그토록 싫어했는데도, 12월이 다가오니까 나도 모르게 집을 나서고, 눈밭을 걸었어. 함박눈이 내 온몸을 덮어 가는데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더라. 너무 늦게 깨달은 거야. 너를 좋아했기에, 겨울이 좋다고 말했어. 그리고 정말 겨울이 좋아졌어. 나는 그 순간의 나에게 영원히 속박되고 만 거야.

그런데, 나보다도 아팠을 네가 먼저 내게 편지를 보냈어. 항상 어리고, 두려움에 빠져 있고, 약하고, 끝내 너로부터 도망친 내게 너는 먼저 손을 내밀었어. 언제나처럼.

이상하기도 하지. 이제껏 내게 건네줄 한 줄의 글도 짜내기 어려웠는데, 왜 지금은

3년 전, 그 장소, 눈

(마지막은 급하게 휘갈긴 글씨, 그리고 낡은 우산 하나가 CD와 함께 동봉되어 있다.)

ㅡ성화

454 이름 없음 (Vaknfa.Dz2)

2020-11-29 (내일 월요일) 18:37:50

3번째 녀석,

샘플을 보내.

(유리병에 든 보랏 빛 머리카락, 날붙이로 짧게 잘린 자국이 선명하다.)

455 이름 없음 (wHFVHAP4Wk)

2020-11-29 (내일 월요일) 18:46:51

>>453

미워한다고 말해서 미안해.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어.
미안해. 미워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급하게 쓴 글씨)

(편지와 함께, 당신을 그린 그림이 함께 보내졌다. 그림 밑에는 당신의 이름이 쓰여있다. CD는 당신이 보낸 것을 그대로 다시 동봉한 것같다.)

# 이 편지 이후 둘은 3년 전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났을까요?

456 이름 없음 (tB8linDRj.)

2020-11-29 (내일 월요일) 18:53:29

>>455 #그러길 바라... 못만나면 한쪽이 눈 맞고 죽거나 할지도 모르겠다.
#음, 그보다도 궁금한 건, 다시 만나면 두 사람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457 이름 없음 (zBFV/syGp6)

2020-11-29 (내일 월요일) 18:57:21

>>456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건 너무 배드엔딩...ㅠ
# 그러게요... 사실 처음에는 둘 다 사귀자는 언질도 없으면서 서로 연인인 것처럼 구는 애매한 사이였다가 상대방이 먼저 떨쳐버린 거라고 생각하고 편지를 쓴 거였거든요. 서로 사랑하는 걸 확인하고 다시 만나서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기도 하고...
# 편지에 몰입하는 거 되게 오랜만이었는데 여운 남네요 ㅜㅜ

458 이름 없음 (GaR5n06zhA)

2020-11-29 (내일 월요일) 19:30:09

이 편지를 받은 누군가에게.

안녕하신가요, 당신! 좋은 아침 좋은 오후 어쩌면 좋은 밤이에요!
느닷없이 편지를 보낸 저는 마법사 체니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무료하거나 외롭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당신에게 찾아온 특별한 기회죠!

이름하야 체니의 랜덤 편지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당신을 위하여~ 서비스★
좀 유치하지 않냐구요? 에이에이. 이런 건 원래 좀 유치한게 잘 먹히는 법이랬어요. 그 편이 인상적이구요.

자자 사담은 이쯤 하고 그럼 아래의 설명을 잘 읽고 당신의 펜을 움직여주세요!

설명 1. 이름이 랜덤 편지인 이유! 말 그대로 전세계 혹은 다른 세계와 시대 어딘가의 랜덤한 누군가에게 당신이 쓴 편지가 간답니다! 언어의 차이는 어떡하냐구요? 걱정마세요! 편지지가 알아서 그 사람의 언어로 번역해서 보여줄거에요. 제대로 된 언어와 문자를 쓰는 사람 한정으로만 가니까 이상한 답장이 올 걱정도 멀리멀리!

설명 2. 당신이 쓴 편지는 기본적으로는 정말 아주 랜덤하게 가지만 편지봉투에 원하는 수신인의 조건을 적으면 그 조건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갈거랍니다! 추상적이어도 상관없어요! 편지는 당신의 마음과 기분을 파악해서 날아가주거든요! 아~ 이 부분 정말 고생했어요. 마법식을 짜는데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냐면...이하생략.

설명 3. 이제 가장 중요한! 편지의 이용법은 정말 정말 간단해요! 이 편지와 같이 들어있던 또 하나의 빈 편지지에 당신의 편지를 써서 동봉된 봉투에 넣어 잘 봉인한 후 당신의 우편함에 다시 넣어주세요. 그럼 1시간 이내로 편지는 수신인을 찾아 사라지고 늦어도 사흘 내에 답장이 당신의 우편함에 들어올거랍니다. 답장에 빈 편지지와 봉투도 같이 들어있을테니 다시 답장을 쓰면 만사 오케이!

모든 설명을 읽었다면 다음은 편지를 쓸 차례!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어서 편지를 보내보세요!

추신. 아 맞다. 혹시 저에게 문의가 있거나 저와 편지를 주고받고 싶다면 봉투에 수신인을 저로 적어주세요! 저 문의도 좋고 잡담도 정말정말 좋아하거든요! 장난은 별로 안 좋아하니까 사양이에요! 호옥시나 그럼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면 아주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날지도요?

459 이름 없음 (tB8linDRj.)

2020-11-29 (내일 월요일) 19:30:30

>>457 #나 같은 경우는 약간 깨질 수 있고 위험하고 일탈적인 느낌의 동거? 그런 거라고 생각했음, 그래서 캐릭터적인 면에 집중해서 썼음, 어른스럽고 자기가 상처받았음에도 먼저 일어나서 다시 손을 잡아주는 청이랑, 미숙하고 두려워서 도망쳤지만, 끝내 감정을 속일 수 없었던 성화, 이렇게.
#그래서 사실 마지막 답신은 첫 편지를 보고 쓴 거, 원래 첫 편지에 대해서는 그냥 앨범으로만 답장했잖아. 다시 손을 맞잡는 게 무서워서. 그리고 사족인데 이름을 계속 안쓴 건... 내가 이름을 마지막까지 못 정해서 고민했거든 ㅠㅠ
#나도 진짜 간만에 상판에서 몰입해본 것 같아. 고마워.

460 이름 없음 (QHF8qr.gos)

2020-11-29 (내일 월요일) 19:42:52

>>459

# 저도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분위기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저찌 비슷했네요! 캐릭터 분석도 너무 좋고... 솔직히 완벽한 엔딩이라고 생각해요ㅠㅠ
#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ㅋㅋㅋㅋㅋ
# 성화와 청이의 프리퀄도 궁금하긴 하지만... 아쉽네요 ㅜ-ㅜ
# 저야말로 감사해요 진짜 이 편지는 성화주가 다 살리셨습니다....

461 이름 없음 (T4qTMI6MB.)

2020-11-30 (모두 수고..) 09:56:53

오랜만이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못했구나. 마지막 수신기록이 벌써 한달도 넘었으니 말이다. 네 수신기록은 더 오래되었겠지. 미안하다. 요 한달간 걸었던 곳에는, 전기가 통하는 곳이 흔하지 않거든. 그래도 결국에는 낡은 유스호스텔의 공용컴퓨터 앞에 앉아 네게 이메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10분에 1달러라는 사용료를 내야하지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운 일 아니겠니.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나는 잘 지내고 있다. 한달전 메일에 썼었던 목적지에 도착해, 지금은 타슈켄트에 있지. 이 근처의 초원은 텅텅 비어있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한산하지만, 일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그 아포칼립스 이후 지금에도 꽤나 규모가 있더라. 계속 키 작은 풀들이 깔린 초원을 걷다가 갑자기 포장도로가 나타났을 때는 어색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이 낡은 유스호스텔에서 며칠간 더 머무를 생각이다. 먹을 것과 이런저런 생필품들을 좀 더 채워넣어야 하거든. 그렇게 여장을 다시 꾸리고나면 어디로 갈까를 고민 중이다. 처음에는 좀 더 북쪽으로 갈까 했는데,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 만큼 그걸 좋은 생각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 생각으로는,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 카스피해 쪽으로 가보고싶다. 북쪽이던 남쪽이던, 어느쪽이건 너에게서는 계속 멀어지게 되는 길이다. 그나마 남쪽에는 좀 더 도시가 많을테니, 네게 더 자주 연락할 수 있겠지.

- 너의, Спутник

462 이름 없음 (ZO/WpONQV.)

2020-11-30 (모두 수고..) 11:13:19

>>461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저는 잘 지내요. 지금 저는 기차 안에 비치된 컴퓨터로 메일을 쓰고 있어요. 요금은 30분에 70루블이니 아저씨보다는 형편이 낫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인터넷은 자꾸 끊기고 툭하면 멈춰 버리긴 하지만, 아저씨 말마따나 있는 게 어디에요.

저는 어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탔어요. 아직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가 남아 있더라고요. 기차표는 상상 이상으로 비쌌던 데다가 시설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요.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경험도 좋을 것 같지 않아요? 그래도 앞으로 돈은 좀 아낄 필요가 있어 보여요.

블라디보스토크는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어요. 어차피 볼 만한 거라고는 전부 잔해가 된 지 오래기도 했고요. 그나마 가장 멀쩡하게 남아있는 건 넓은 광장 하나였어요. 듣기로는 원래 동상도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부서졌다는 것 같아요. 어쩐지 아저씨라면 동상이 부서지기 이전의 모습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밖은 벌써 눈이 쌓여 있어요. 지금은 밤이라 어두워서 안 보이지만, 낮에는 하루종일 창가에 앉아서 바깥을 구경했어요. 아포칼립스 이후로 기후가 이상해졌다는데, 여기는 비교적 괜찮은가봐요. 전 눈이 좋아요. 비록 살면서 눈이 내리는 걸 많이 본 적이 없다고 해도요. 어쩌면 그래서 더 좋아하는 걸수도 있겠네요. 앞으로 눈은 질리도록 봐야 할 텐데, 설마 그 사이에 질려 버리지는 않겠죠?

중간에 기차에서 내릴지 아니면 이대로 종착역까지 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요. 아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겨울이겠죠. 북쪽에서 겨울을 맞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좀 더 생각해 보려고요. 물론 정말 마음에 드는 곳을 지나치게 되면 아예 정착해 버릴지도 몰라요.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저를 보러 와줘야 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Apollo.

추신. 아마도 기념품점이었을 곳에 버려져 있던 엽서를 하나 주웠어요. 실제로 여기에 적어서 보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군데군데 얼룩이 묻고 흠집이 났지만,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엽서다. 피의 궁전을 찍은 빛 바랜 사진이 실려 있다.)

463 이름 없음 (T4qTMI6MB.)

2020-11-30 (모두 수고..) 13:08:07

>>462

안녕. 어제 늦게 마을에 도착한 덕분에, 오늘 점심에서야 네 답장을 읽었다. 아저씨, 라는 호칭도 반갑게 느껴지네. 나이에 맞지 않는 말투라던가, 아포칼립스 이전 시대의 자료에 관심이 많아서 옛날 이야기가 잦은 나 때문이겠지만. 그러니까 동상에 관한 질문에 답하자면, 그래, 그 광장에 대한 사료라면 분명 읽은 기억이 있다. 깃발을 휘날리는 사람의 동상이 서있었다던가… 서버에 접속할 수 있었다면 서적에서 갈무리해둔 이미지를 보냈을텐데, 아쉽게도.

어디 있으려나 했는데, 그리 멀지는 않았구나… 기차가 움직인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들었는데, 진짜였다니 조금 의외다. 세계정부가 대재앙 이후로 멈춰버린 발전소들을 복구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지만, 노동자도 지식인도 부족한 이 시대에는 역시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 하긴, 가깝다 해도 사람의 걸음으로는 여전히 먼 길이다. 그래도 정착지가 생긴다면 알려줘. 가는 길의 중간이면 들릴테니. 조금쯤 돌아가게 되더라도.

사실 네 소식을 들으면서 약간 의외기는 했다. 나와는 달리 너는 성실하다는 느낌이었으니, 학교에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대학원에 진학할지 여행을 떠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까지도… 무상으로 교육은 다 받아놓고 이렇게 뛰쳐나가 여행자가 되어버리는 세계정부의 골칫덩이, 인 나를 네가 혼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짐작했어야 했나? 실없는 소리다만, 반쯤은 진심이다.

이제 슬슬 자야한다. 내일도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제 때 알맞은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내일 준비를 마치고 모레 새벽에는 출발해야 하거든. 그러니 네가 답장을 보내주더라도 짧으면 며칠, 길면 몇주 뒤에야나 읽을 수 있겠다. 뭐, 어찌됐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운이 좋거든. 언제나 그렇듯이, 네 글은 결국 내게 도착할거다.

그럼, 그때까지 잘 지내기를.

464 이름 없음 (ZO/WpONQV.)

2020-11-30 (모두 수고..) 14:07:31

>>463

안녕, 아저씨. 메일을 읽고 동상에 대해서 상상해 봤어요. 그 동상은 어쩌다가 깃발을 흔들게 된 걸까요. 누군가 유명한 사람이었을까요? 옛날 사람들은 동상의 얼굴을 실제로 볼 수 있었겠죠? 그 사람들이 부러워요. 옛날에는 분명 멋진 것들이 더 많았을 텐데, 지금은 남아있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지금 저는 하바롭스크라는 도시에 있어요. 작지만 마음에 들어요. 오늘은 여기서 하루 자고 갈 생각이에요.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 숙소를 찾았거든요. 방은 낡았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친절하세요. 게다가, 싼값에 컴퓨터를 빌려 주셨어요. 여러모로 운이 좋은 하루였어요.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하바롭스크는 멀쩡한 곳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특별히 볼만한 건 없었어요. 아마 원래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건물은 예뻐요. 크고 웅장하기보다는 어딘가 안정감을 주는 느낌이에요. 가능하다면 아저씨와 함께 보고 싶었어요.

학교는, 예정보다 일찍 졸업했어요. 더 남아서 공부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아저씨가 떠나는 걸 봐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다만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라면, 그 전에 더 많은 걸 봐두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후회는 안 해요. 학교에 남아서 배울 수 있는 것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기차도 못 타 봤을 거고, 넓은 광장에 서 있는 동상의 얼굴을 상상하지도 못했을 거고, 한적한 외국의 거리를 혼자 돌아다녀 보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얼굴을 보고 하면 부끄러운 말도 글로 쓰면 망설임이 없어져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할게요. 아저씨가 여행자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사실 화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라요. 반쯤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난 건.

내일은 다시 기차를 탈 거예요. 목적지까지는 이틀이 넘게 걸린다니까, 아마도 다음 메일의 내용은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 될 것 같아요. 아저씨가 어디에 가서 어떤 걸 보고 있는지 궁금해요. 그러니까 자세히 이야기해줘야 해요.

465 이름 없음 (T4qTMI6MB.)

2020-11-30 (모두 수고..) 14:45:07

>>464

안녕. 네가 잘 있다고 말해주니 기쁘네. 그리고 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미리 말해두자면, 나도 잘 있다. 무사히 카스피해에 도착했지. 음, 정확히 말하자면 카스피해 북쪽에 있는 도시인 구레프다. 남쪽으로 갈 수도 있었겠다만, 예전부터 어쩐지 나는 그 쪽 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다. 개인취향의 영향인 셈이지. 너와는 조금 더 멀어졌지만, 기차라면 금방 따라잡겠지.

어쨌든 이 쪽 길을 선택한 덕분에, 나는 뜻밖의 물건을 손에 넣었다. 어느 폐허가 된 마을에서, 소설책 한 권을 주웠거든. 영번역이 되어있기는 했지만 원래는 아시아의 작가가 쓴 책이라는 것 같다. 나는 그 소설을 들고 다니면서 짬짬히 읽었다. 표현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글이었다. 다만 내용은 취향이 아니라서 조금 미묘했지. 네게도 이 책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진학은 결국 거절했구나. 우리 둘 다 여행자가 되어버리다니, 이래서야 다시 만났을 때 선배가 화내도 할 말이 없겠는 걸. 그렇지만, 글쎄… 나는 그렇게 용감한 사람은 아니야. 고등 교육 기관에서 배웠던 생명공학과 의학 지식은 좋아했지만, 역시 나는 한 곳에 머물러 착실히 쌓아나가는 것에는 그다지 적성이 없었을 뿐. 그러니 적어도 나한테는 지난 세기의 그 재앙이 있어서 다행이었던 걸지도 모르지… 죽어간 사람들이 들으면 분명 분노하겠지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버릴만큼, 우리 세대에게 아포칼립스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는,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던 셈이니 말이다. 옛날에는 세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는 노인들의 말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 우리에겐 그 일상의 풍경들이 비일상이다. 그 괴리감에 매력을 느껴 사료를 수집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네 목소리가 듣고 싶다. 위성전화 같은 거라도 있었더라면. 하지만 아포칼립스 이전만큼 전자제품이 저렴하지 않은 요즈음에는 무리지. 애초에 내가 지나고 있는 곳은 전자제품은 커녕 전기 공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벽지니까. 낡고 고장난 공용컴퓨터의 1분 사용료로 10달러를 내야 하는.

모레 쯔음 구레프를 떠나려 한다. 아마 이 다음에도 계속 서쪽으로 갈 확률이 높겠다. 일단은 좀 더 남쪽… 그러니까 옛 터키가 있었던 쪽으로 가면 어떨까 하고 있다. 뭐, 아직까지는 모를 일이다. 어쩌면 구레프에 며칠 간 더 머무를 수도 있고, 방향을 돌려 다시 초원으로 가거나 아랄해를 향할 수도 있겠지. 내가 경로를 정하는 방식은 꽤나 제멋대로니까.

구레프를 떠나게 되면 다시 메일하겠다. 이번에는 적어도 네 답장은 읽고 출발할 수 있겠구나. 날씨가 쌀쌀해지는데 몸간수 잘하고 아프지 마렴.

이만 총총.

466 이름 없음 (ZO/WpONQV.)

2020-11-30 (모두 수고..) 15:59:31

>>465

안녕, 아저씨. 잘 지낸다니 다행이에요. 카스피 해라는 이름은 아주 예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책에서는 바다만큼 큰 호수라고 적혀 있었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숫가에 서 있는 기분은 어떨까요. 이쪽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철도는 내륙으로만 지나가니까요. 게다가 이런 추위 속에서는 전부 얼어붙어 있겠죠. 하지만 얼어버린 바다도 싫어하지 않아요. 저는 산보다는 바다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지금 기차는 작은 역에 잠시 정차해 있어요. 시간은 밤이지만 바깥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눈이 내려요. 지난 이틀 동안은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창 밖을 구경하고,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하고, 가끔은 기차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기도 하고 있어요.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들려오는 소리는 기차가 달리면서 나는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정도예요. 고요하다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읽을거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끔 해요. 그럴 때는 아저씨가 보낸 메일을 다시 읽어요. 아저씨가 주운 책의 내용이 궁금해요. 나중에, 다시 만나면 저한테도 보여주세요.

저는 4인실을 혼자 써요. 기차는 크지만 승객은 많지 않아요. 이제 와서 기차를 탈 사람도 얼마 없으니까요. 복도를 따라 늘어진 객실을 보면 아포칼립스 이전을 상상하게 돼요. 이 기차도 한때 사람을 가득 태우고 달리던 시절이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4인실을 채울 정도의 인원도 없어요.

옆 방에서 머무는 사람과 친해졌어요. 이름은 카야예요. 카야는 나이가 많아요. 늙었지만 늦게라도 세상을 구경해보고 싶어서 기차를 탔대요. 저만한 손주가 있다고도 했어요. 바깥을 구경하거나 아저씨에게 메일을 쓰지 않을 때면 주로 카야와 얘기를 나눠요. 국적도, 생애도, 어느 하나 겹치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옛날 사람들도 이런 기분을 느끼면서 기차여행을 했던 걸까요.

아저씨와 달리, 저는 학교에서 공부할 때 특별히 어떤 걸 좋아했던 기억은 없어요. 그저 막연하게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좋아하는 게 뭔지 아직 깨닫지 못한 걸지도 모르죠. 어찌 됐건, 아저씨가 용감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는 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하는 걸 찾아 떠나지는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많다는 건 어디까지나 지금의 인구에 맞춘 기준이긴 하지만요. 그럼 저는 용감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내일이면 기차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요. 바이칼 호수를 보러 갈 생각이에요. 카스피 해와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바이칼 호수는 카스피 해와 비슷할까요? 아저씨도 몸조심하세요.

추신. 저도 아저씨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여건이 되면 노래를 하나 녹음해서 보낼게요.

467 이름 없음 (wHq/5Op1Fc)

2020-12-01 (FIRE!) 09:12:03

>>466

일주일만인가? 미안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구레프에 있다. 저번 편지 말미에 너한테 아프지 말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정작 내가 덜컥 감기 몸살에 걸렸지 뭐냐. 꼬박 며칠 간을 앓고 일어나니 이미 하얀 눈이 소복하게 깔렸더라. 달력상으로는 아직 가을인데, 눈이 이른 곳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겨울의 한가운데로 툭 떨어진 셈이었지. 그 아포칼립스 이후에는 흔한 일이지만… 고민 끝에, 적어도 이번 추위가 조금 가신 후에야 출발하기로 했다.

사실, 며칠 기다려 본다고 해봤자 어차피 한겨울이라는 건 똑같겠지만. 그래도 사람한테는 일단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한 법이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는 동안 눈이 더 쌓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느 정도 현실도피다만. 눈은 보기에는 좋아도 걷기에는 불편하니까. 하긴, 이 시기에 걸어서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테니,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본래는 앙카라를 거친 후 거기서 이스탄불로 가서, 배를 타고 아테네로 넘어갈까 했다. 아테네는 겨울을 보내기에 괜찮은 곳이지. 기후가 바뀌기는 했어도, 지중해 기후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는 아포칼립스 이후에도 남아있으니. 그렇지만 만약 네가… 중간에 멈추지 않고 오게 된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테니, 맞이하기 위해 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북쪽으로 가려면 역시 아무래도 이동수단을 구해야 겠지.

여기도 마찬가지로 조용해. 얼룩진 유리창 밖으로는 눈 내린 들판이 보이고, 고요하다. 이야기했던가? 언젠가 저녁 무렵의 초원에서 야생마 무리와 마주쳤었다. 내 쪽으로 더 다가오면 어쩌나, 하고 긴장했었지. 야생마의 발굽은 위협적이니까 말이다. 다행히도, 나는 그 무리의 주의를 끌지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아찔한 경험들 때문에 여행자들은 보통 야생동물이 적은 길로 다니지만… 야생동물이 적은 만큼, 인간이 많은 점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글쎄, 이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길을 선택할 때가 오면 별 생각없이 마음이 끌리는대로 선택해 버리는 게 나지만 말이다. 사람을 만나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또한 즐거운 일이기도 하니까. 대화를 나눌 사람이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다음 메일 전까지 약속할 수 있는게 많지는 않네. 눈이 굳으면 차라리 걷기 편할텐데. 다음 도시로 출발하기 전, 혹은 다음 도시에 도착한 후 다시 메일하겠다.

PS. 카스피 해의 사진을 보낼게. 생각만큼 얼어있지는 않아. 여전히, 파도도 치고.

468 이름 없음 (J0nZ.QNreM)

2020-12-01 (FIRE!) 16:47:04

>>467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다행히도 저는 아직 멀쩡해요. 가끔은 요즘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요. 메일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아저씨도 이미 나아 있길 바래요.

기차는 지중해 근처를 지나가지는 않아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느긋하게 내려가는 방법도 있겠죠. 아저씨도, 저도 여행의 방식에 그리 크게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기차를 탄 것도 어디까지나 충동적인 선택이었고요. 중간에 아저씨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기차에서 내려버릴 수도 있어요.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엇갈리지 않도록 미리 메일을 보내야겠죠.

저는 이르쿠츠크를 며칠째 떠나지 않고 있어요. 하바롭스크에서 하루 자고 간 걸 제외하면 기차에서 내려서 어딘가에 길게 머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바이칼 호 주변에는 숙박시설이 많아요. 원래 있던 숙박시설을 수리해서 쓰는 곳이 다수라고 들었어요. 빈 집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걸 보면, 이전에는 더 많았겠죠. 하지만 지금은 머물 사람도 머물 곳을 제공하는 사람도 얼마 없어요.

아저씨가 보낸 사진을 봤어요. 어째서 카스피 해海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아요. 카스피 해와 바이칼 호는 다르게 생겼어요. 바이칼 호는 지금 완전히 얼어붙어 있거든요. 얼음이 얼어서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고, 그 위로 또 눈이 쌓여 있어요. 그 상태로 설원이 끝도 없이 이어져요. 눈이 덮이지 않은 얼음은 맑은 청록색이에요. 얼음을 햇빛이 비추면 눈 위로 빛무리가 생겨요. 그 모든 게 정말 아름다워서,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계속 보고 있게 돼요. 사진을 찍어 보내고 싶었는데, 사진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어요. 아쉬워요.

아포칼립스 이후로 더 춥고 더 덥게 변한 곳이 있는가 하면, 덜 춥고 덜 더워진 곳도 있다고 해요. 그중 이르쿠츠크는 덜 추워진 곳이래요. 물론 여전히 추위는 살을 에이지만, 그래도 참을만 해요. 옛날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추위를 어떻게 견딘 걸까요.

추위가 약해진 덕분에 저는 매일 바이칼 호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어요. 숙소에서 바이칼 호는 걸어가기에 조금 멀어요. 그래서 차를 얻어타야 해요. 이르쿠츠크는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아포칼립스 이전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많아요.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숙소를 나서서 걷다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중간에 내리면 또 다른 차가 보일 때까지 걷는 식이에요. 도착해서는 특별한 걸 하지는 않아요.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구경할 뿐이에요. 그러다 추위가 심해지면 다시 숙소로 돌아와요. 옛날 사람들은 이걸 히치하이킹이라고 했대요. 오늘 아침에 차를 태워 준 사람이 알려 줬어요.

여기는 뭐든지 거대해요. 건축물도 하바롭스크에 비해 크고 직선이 많아요. 숲은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어요. 그리고 물론, 바이칼 호도 있어요. 광대한 자연을 보고 있으면 사소한 건 전부 잊게 돼요. 애초에 아포칼립스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이전에 지구상에 사람이 존재했던 적이 없는 것만 같아요. 그 앞에 있는 건 저랑 바이칼 호 뿐이에요. 대화를 나눌 대상이 없으니 말도 필요하지 않아요.

학교에서는 아포칼립스 이후로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졌고,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온갖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배웠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어요. 오히려, 다들 친절하게 차를 태워 주고 도움을 주고는 해요. 가끔은 목적지와 완전히 반대편인데도 절 끝까지 데려다 준 사람도 있었어요. 배고프지 않나며 작은 간식을 주고, 춥지 않냐며 따뜻한 차를 줘요. 이르쿠츠크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에요. 기차에서 만난 카야도, 노트북을 빌려준 숙소 아주머니도, 그 이전에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도 전부 상냥했어요. 제가 본 게 전부라고는 단정하지 않아요.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걸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 세상이 제 생각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오늘은 다른 때보다 조금 길어졌네요.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가 봐요. 얼마나 더 이르쿠츠크에 머물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정착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아저씨를 만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여정을 이어갈지도 모르고요. 내일이 되면 호수로 가서 생각해 볼 거예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답이 나오겠죠. 아닐 수도 있지만.

추신. 야생마는 아름답게 생겼어요?

469 이름 없음 (q9.Pq.uuSU)

2020-12-01 (FIRE!) 17:28:09

4번째 녀석,

보내.

(유리병에 든 붉은 색 머리카락)

470 이름 없음 (Q34lqMz7xM)

2020-12-01 (FIRE!) 17:30:08

>>468

아스트라한으로 가는 낡은 페리 위에서, 이메일로 보낼 내용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어. 지난 며칠간은 카스피 해의 북쪽을 지나는 도로를 따라 걸었지. 물가를 따라 걷는 건 언제나 괜찮은 생각이야. 대체로 평탄하고, 마을을 만나기 쉽지. 편한 길, 이라고 까지는 못하겠지만. 3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만 움직여야 한다면 대체로 그렇겠다만은. 새삼 아직 제대로 움직이는 디지털 카메라에 잉크와 종이를 들고 다니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들 내가 책이라도 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

너는 이제 이르쿠츠크구나. 그 근처까지 갔었을 때, 그 도시라면 여전히 자동차가 다닐지도 모르겠다고는 생각했다. 구할 수 있는 물품의 질과 양이 전혀 달랐거든. 근처라고 해도 걸어서는 사흘 이상 걸리는 거리였지만, 자동차라면 도로 상태에 따라서는 8시간 정도도 가능할테니. 그러니 이 시대에 자동차라는 건 확실히, 문명의 상징이지. 포장된 도로와 안정적인 연료의 공급, 멀리까지 뻗어있는 생활권이라는 건…

그러고보니 아포칼립스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복습한 것도, 나한테는 꽤 오래전 일이 되었다. 2학년의… 1학기였던가, 2학기에서는 그 이전 시대의 역사를 공부했으니. 너에게 이르러서는 커리큘럼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용은 비슷했으리라 짐작한다. 아포칼립스 이후의 위험한 세계, 풍요로웠던 그 이전, 그 당시 사람들의 어리석음, 현재의 불안. 어느 정도까지는 맞는 이야기일 거다. 그러나 너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나보구나. 얼어붙은 호수도. 이전에 흑해에 들렀을 때가 생각나네. 나는 거기서 유빙이 우는 소리를 들었었어. 유빙과 유빙이 부딪히며, 기이한 소리를 내지. 이 계절의 바이칼도 비슷할까 싶다.

정착하게 된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우리가 어디에 머물든, 만나는 건 가능해. 시간과 거리의 문제일 따름이지. 우리는 지금 길 위에 있지만, 목적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느 쪽이든 네 마음이 가는 쪽으로 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다. 마음가는대로 연구실을 뛰쳐나온 사람의 말이니, 그럴 듯하지.

그래도 이메일은 보내줘, 노트에 손으로 옮겨서 들고다니면서 가끔 읽기도 하거든.

+

아스트라한의 숙소에서 타이핑을 한다. 내가 며칠 전 쓴 글을 다시 보는 건 은근히 낯선 데가 있다.

추신에 답하자면, 글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은 대체로 거칠지. 그걸 아름답다고 느끼느냐 아니냐는 취향의 문제일 거다. 하지만 내게는 인상적이었어. 그때는 배터리가 떨어져서,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471 이름 없음 (yFyfdwGKLI)

2020-12-01 (FIRE!) 18:40:37

>>241

마을을 나온 뒤로는 우체통이 없어서 편지를 보내기가 어려웠어. 늦어서 미안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중간에 또 길을 잃을 뻔 하기는 했지만!
식량 저장고가 날아갔다니...! 이전보다 더 큰일이잖아!
역시 설원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 같네...
부디 잘 복구되었기를 바라!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도와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어쩌면 그 망원경으로 내 모습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점점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거든.
내일이나, 늦어도 다음날 즈음에는 그리웠던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때는 글씨로만 보는게 아니라 직접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이럴 수가. 맨손으로 작업한다니... 그러다가 손을 다치거나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장갑 안 끼면 일 못하게 내가 손 잡고 안 놓아줄 거야!
물론 장난! ;D
그럼! 당연히 보여줘야지!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나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 걱정하지 말고 있어. 하루 만에 전부 먹어서 창고를 비워줄 테니까! 알았지?
눈보라가 조금 잠잠해진 것 같길래 큰 소리로 너를 불렀는데, 어때? 거기까지 들렸어?
부디 들렸으면 좋겠다!
네 말대로 오늘은 꼭 하늘을 올려다볼게. 예쁜 별과 오로라를 볼 수 있도록!
고마워. 너도 항상 몸 조심하기를! 부디 눈보라가 더는 너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게!

- 설원의 하늘 아래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472 이름 없음 (vopa1FAGTc)

2020-12-01 (FIRE!) 23:39:08

>>471

아냐, 나도 늦기도 했으니까. 둘다 쌤쌤이라는걸로 하자.
길을 잃을 뻔 했다니. 조심해서 다녀야지. 이런 설원에서 길을 잃었다간 큰일이라구.
그래도 복구는 잘 끝났어. 이래저래 사냥도 다니고 했긴 하지만. 몸은 성히 잘 있어.
드디어. 라는 말이 절로 나오네. 설원은 위험해. 추운것도 추운거지만 이상한 생물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조심해서 와.
내 목소리는 뭐, 5년전 그날에 비해 달라졌을지도 몰라? 그때는 성장기였으니까...
손을 잡아준다라...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사람의 온기는 장갑보다 따뜻한 법이니까. 그래도 그 상태라면 일을 못할테니 불편할지도 모르겠네.
아무리 그래도 물려준다는건 내가 부끄러우니까 패스.
.......이래도 고집 안굽힐거지? 포기해야겠어.
하하, 정말 불렀구나. 어때? 들었을까 못들었을까?
네가 온다고 생각하니까 두근두근하네. 열심히 집을 청소중이니까, 느긋하게 오길 바라.
오는길에 길 잃지 말고,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와.
그러면 따뜻한 코코아를 대접해줄테니까.

- 설원에서, 주인장.

473 이름 없음 (J0nZ.QNreM)

2020-12-01 (FIRE!) 23:54:48

>>470

결국은 다시 기차에 몸을 실었어요. 이르쿠츠크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아직은 여행을 계속하고 싶어요. 이 뒤에 더 경이로운 걸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여기 남고 싶지는 않아요. 게다가 아직은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요. 아저씨가 지나온 길도 포함해서요. 하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곳들 중에서 살고 싶은 장소를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전 이르쿠츠크를 고를 거예요.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바이칼 호 근처에 집을 짓고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가서 얼어붙은 호수를 볼 수 있다는 건 낭만적이지 않나요?

지금 기차는 노보시비르스크와 예카테린부르크 사이에 정차해 있어요. 더 정확히는, 갇혀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선로가 막혔거든요. 기차 밖에서는 사람들이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치우고 있어요. 빠르면 오늘 저녁에는 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대요. 승객 중에는 가만히 앉아 있기 지루하다며 도우러 나간 사람도 있어요. 저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노보시비르스크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았어요. 잠깐 내려서 둘러본 게 다예요. 작지 않은 도시지만 크게 주목할 만한 건 없었어요.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내륙에 있는데도 해海라고 불렀어요. 카스피 해가 생각났지만, 카스피 해나 바이칼 호와 달리 특별히 마음을 끄는 건 없었어요. 어쩌면 저는 바이칼 호에 너무 익숙해져서 다른 호수를 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조금 슬퍼요. 바이칼 호만큼은 아니더라도 멋진 호수가 아직 많이 남아 있을 텐데.

아포칼립스의 역사는 1학년 공통 과목으로 바뀌었어요. 아마 아저씨가 배운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 특별히 좋아했던 기억은 없어요. 아포칼립스 이전의 유물 다수가 훼손된 것도 사실이고, 아직 추측이 분분한 내용도 많으니까요. 유빙과 유빙이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는 어떤 느낌이에요? 바이칼 호에서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요. 아니면, 유빙이 우는 소리를 제가 바람소리로 착각한 걸까요? 어떤 원리로 그런 소리가 나는 건지 궁금해요. 학교에서 이런 걸 가르쳐 준다면 좋을 텐데.

기차가 멈춰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져요. 머리를 비우고 창 밖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학교에 남아 있었더라면, 또는 좀 더 빨리 학교를 떠났더라면, 제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어쩌면 아저씨와 함께 여행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 모든 가정 속에서도, 여행을 하는 건 결국 지금의 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한 시간 내내 생각한 끝에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결국 저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여행을 떠난 셈이에요.

만약 정착하게 되더라도 메일은 매일 보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