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중 : 💌 수상한 우체통 💌 : 상황극판

2020-09-18 (불탄다..!) 21:19:59

야옹.

여기는 내 집이다옹.
우체부씨는 자꾸 우체통이라고 부른다옹.
편지를 넣어두면 우체부씨가 와서 꺼내간다옹.
이상한 편지는 내가 숨겨버리기도 한다옹.
자주 찾아오라옹.

멍멍.
🐾

3 이름 없음 (EnSGzq2x0Y)

2020-09-20 (내일 월요일) 12:53:32

(잉크 같은 것으로 덧칠되어 보이지 않는다) 군에게.

있잖아.
사실 나 외계인이다?
초능력도 쓴다?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정작 쓰려니까...쓰기 힘드네.
비밀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건 역시 힘들어ㅋㅋ
그렇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오늘이 지나면 이 힘을 숨기지 않아도 돼.

친부모님을 따라 다른 나라로 간다는 거 반은 거짓말이었어.
나 다른 나라로 아니라 아예 다른 별로 간다?
그러니까 오늘이 지나면 온 지구를 뒤져도 날 찾지 못할거야!
정 찾고 싶으면 우주비행사라도 되어보든가!

네게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어보이지만.
역시 네가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로 잉크로 덧칠이 되어있다) 양이잖아? 내가 아니라.
잘 됐네! 걔도 너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잘해봐!!
나도 고향에서 행복하게 잘 지낼거니까. ;)

그러니까 잘 있어. (조금 번져있다)
좋아했어.

(밤하늘 테마의 편지지에 쓰여진 비뚤배뚤한 손글씨.)

4 이름 없음 (blbgXMG8G.)

2020-09-20 (내일 월요일) 13:16:41

하여튼 A랑 B는 똑같이 고구마답답이들이야
서로 좋아하는맘 전 국민이 다알겠다
아직 손도 한번도 못잡았다고 말이돼???
오죽하면 내가 걔네 잘되게 해주려고 자리도 피해주고
영화 티켓도 구해주고 방도 바꿔주고 오해도 풀어줬는데

기껏 A도 잊어보려고 하고있는데

아

답답해

!￦%&#×÷#×/ㅡ

6 이름 없음 (hXYVFz.KNE)

2020-09-21 (모두 수고..) 00:22:04

이 편지는 172신년 베리타 공국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람에게 돌려도 행운은 오지 않는다.)

7 이름 없음 (PEq9rDXzFw)

2020-09-21 (모두 수고..) 02:02:37

펨브록 가 589번지, 데완 시, 아셰프 제국.

태양담쟁이 저택, 로이드 씨 앞으로.

사랑하는 디안에게.

안녕 디안. 잘 지내? 세상에 어둠안개가 내려앉은지도 벌써 1년이 다 됐네. 성 안에만 갇혀 지낸지도 그쯤 된 것 같아.

이제 뭔가를 새로 시작해볼 의욕조차 나지 않아. 너처럼 단련을 시작해보겠다던 편지 기억해? 예상대로였어. 3일 하고 그만뒀지 뭐야. 그래도 첫날은 꽤 열심히 했는데! 무게도 꽤나 많이 들어올렸다고. 진짜야! 기사들도 다들 놀랐다니까? ...며칠 안가 그만둬서 의미없긴 하지만.

심심하고, 지루하고, 의욕없고.......

투정부려서 미안해. 하지만 지금 너무 우울한걸. 일주일 전부턴 아무것도 안 하기 시작했어.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천장화만 바라보고 있는데, 어제는 아기천사가 든 리라의 금박이 조금 벗겨진 걸 발견했어. 지금 같은 시기에 화가들을 부를 수는 없지만 언젠가 보수를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 언제쯤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네가 너무 보고싶어 디안.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까? 네 따뜻한 숨결, 튼튼한 팔, 나긋한 목소리가 모두 너무나 그리워.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매주 편지 보내겠다던 약속은 어쩌고, 요 몇 달간은 편지 한 장 없더라. 물론 섭섭해하는 건 아냐! 그냥, 너는 어떻게 지내나 이야기도 듣고 싶고, 별 일 없나 해서.

늦어도 괜찮으니까 소식 전해줬으면 좋겠어.

재미없는 소금성에서, 레이아.

8 이름 없음 (szSAcH2dpw)

2020-09-21 (모두 수고..) 08:59:47

아들에게.

요즈음 많이 바빠져서 네 얼굴을 볼 틈도 없었다.
이 아비가 미안하다. 좋은 아비가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바빠선 제대로 된 아버지 역할도 못해주는구나.

너는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있니? 가문을 이어나가는 것도, 훌륭한 귀족이자 영주가 되는것도 좋지만 네 자신을 너무 혹사시키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넌 나의 소중한 아이니까, 네 자신을 아꼈으면 한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로 전하지만, 생일 축하한다 아들아.
얼굴을 맞대고 함께 기뻐하며 축하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왕께서 나를 전쟁터로 부르셨구나.
걱정하진 말아다오, 허나 나를 위해 기도는 해주었으면 한다.

아, 나의 벗 할포드 경이 언젠간 네 저택에 들릴거다.
어릴때에 네가 그리 좋아했던 할포드 삼촌, 기억나지?
네가 성인도 거의 다 되어가니 할포드 삼촌이 기뻐 날뛰며 네게 선물을 들고온다 하더구나.
그가 아주 격하게 환영할것이니, 조심하거라.
기쁠때 격하게 사람을 끌어안는 버릇이 있어서... 매우 아프거든.
네가 좋아할만한 선물을 들고 온다 하니, 기대해도 좋을것이다.

너와 나누고 싶은 말이 산더미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리 편지로만 전해야 해서 매우 아깝구나.
돌아와서 마음껏 얘기하고 축하하자꾸나.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한다. 사랑한다, 아들아.

네 아버지,
헬리에즈의 백작, 하를리우스 폰 헬리에즈 2세.

9 이름 없음 (O9Jzzm7khc)

2020-09-21 (모두 수고..) 16:30:00

얼굴도 모르는
>>0-1001님께

오늘은 수신자명을 쓰지 않고 편지를 보내 보았어.
야호- 누구 읽고 있어?
...우체통도 없는데 갈 리가 없지.

멋진
Y군

10 이름 없음 (445ql4asqw)

2020-09-21 (모두 수고..) 16:39:23

언제 와?

11 이름 없음 (sHW2QG61g6)

2020-09-21 (모두 수고..) 16:52:53

>>9
있다 읽고 누구-
야호

더 멋진
P양

...이거 진짜로 가는건가?

12 이름 없음 (O9Jzzm7khc)

2020-09-21 (모두 수고..) 17:01:59

덜 멋진
P양에게

우체통은 커녕 편지봉투도 없었는데 답장까지 왔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다른 편지들도 보내 주면 좋을 텐데.

P.S 안 봐도 분명 내가 더 멋지거든!

멋진
Y군

13 이름 없음 (sHW2QG61g6)

2020-09-21 (모두 수고..) 17:15:54

꽤 멋진
Y군에게

우와 진짜 답장이다!
어떻게 온거지? 이번에도 갈까?
안녕 Y군!!

확실히 더 멋진
P양

14 이름 없음 (O9Jzzm7khc)

2020-09-21 (모두 수고..) 17:22:09

멋진
P양에게

안녕 P양!!
답장이 엄청 빨리 오네.
어쩌면 못 봤을 뿐이지 우리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거 아닐까?
답장이 오기 전에 P양을 찾아볼게. 들으면 소리쳐줘!

더 멋진
Y군

15 이름 없음 (sHW2QG61g6)

2020-09-21 (모두 수고..) 17:31:12

조용조용한
Y군에게

한참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
기대했는데!
차라리 내가 먼저 불러볼게. 들으면 편지 보내줘!

더 멋지고 목소리도 더 큰
P양

16 이름 없음 (QGK1SvFNX2)

2020-09-21 (모두 수고..) 18:19:26

수수께끼의
P양에게

빛이 한 번 나타났나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는데 나도 아무 소리 못 들었어.
혹시 P양은 나보다 한참 먼 곳이나, 아니면 방음이 잘 된 곳에서 사는 걸까?

P.S 소리쳤다고 혼났다. 힝.

멋진
Y군

17 이름 없음 (SHl939Ws3o)

2020-09-21 (모두 수고..) 18:46:29

냉장고에서 자꾸 제 김치 빼드시는 분
쉐어하우스잖아요. 공동생활 규칙 모릅니까?
지금이라도 자수하고 광명 찾으세요.
순순히 사과한다면 먹은 만큼의 대가만을 요구하겠습니다.
침묵으로 일관하겠다면 걸렸을 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 못 집니다.

- 파란뚜껑 김치통 주인

18 이름 없음 (rrlNMeRKF2)

2020-09-23 (水) 19:37:54

선배!

선배?

저 밴드부 그만둘래요!

이번달에는 여고 공연 잡아주겠다면서요?
그거 파토났잖아요... 맨날 수산시장 공대 남고 같은 데만 공연다니고.
솔직히 여자애들한테 인기얻고싶어서 입부했다고요. 우리는 팬클럽 성비부터 개망했어요.

왜 이제 말 하냐고요?
작년부터 그만두려고 했는데 선배가 말렸잖아요.

이번에는 진짜 그만둡니다?
또 말릴까봐 편지로 써요.
울먹울먹 하지마요. 안통해요.
이번에는 진짜로 안통해요. 말리지마세요.

(퇴부 신청서가 동봉됨)

19 이름 없음 (c5mVdRH7Ec)

2020-09-23 (水) 19:44:39

왈왈

왈왈컹컹! 멍멍멍!! 크릉 킁 멍멍 왈왈! 멍멍 멍멍멍멍 멍멍멍멍? 왈왈왈왈왈

(아래쪽은 이빨자국이 있다.)

20 이름 없음 (QRBLdBiQMk)

2020-09-25 (불탄다..!) 05:33:18

이름 모를 룸메이트 친구

안녕? 잘 잤어? 아침부터 웬 종이가 보여서 놀랐을테니 일단 사과부터 할게. 편지를 얼굴 위에 두어서 미안! 혹시 네가 일어나서 편지를 눈치채지 못할까봐 그런건데… 이 행동이 내 첫인상을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마법학부의 돌린더흐야. 돌린더흐 쉴른. 그냥 돌린, 아니면 린더 라고 불러도 좋아. 다들 그렇게 부르더라고. (뭐어, 제국인들은 내 이름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거든)

이제 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내가 아는 거라곤 네가 나와 같은 열두살 신입생이라는 거, 그리고 너는 나와 달리 해가 뜰 시간에 일어나서 낮 동안 활동하는 종족이라는 것 뿐이야. 아무리 우리가 마주칠 확률이 희박해도 같은 방을 쓰는 사이인데... 이렇게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내서야 되겠어? 별다른 일이 없다면 우리는 고등부로 진학할때까지 5년동안 한 방을 쓸 텐데 그건 너무 어이없잖아. 그치!

이름도 아직 모르는 너에게 궁금한 게 아주아주 많은데 어디부터 시작하는게 좋을까? 어느 쪽 옷장을 쓰고 싶은지, 취미가 뭔지, 가족은 무슨 일을 하고, 또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낮에는 햇빛이 강한데 눈이 부시면 어떻게 하는지(종족차별적인 의도는 없어! 그냥 나는 낮에 활동하는 종족 친구를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궁금한 것 뿐이야... 오해하지 말아!)

오, 그래. 네 고향은 어디야? 이것도 꼭 물어보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날 가르친 선생님은 그 사람이 태어나 자란 곳은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고 했거든. 네가 온 곳을 알면 널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예를 들어, 북대륙은 좋은 곳이니까 그곳에서 자란 나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거지!)

혹시 너도 나처럼 멀리서 왔니? 얼굴만 보고 추측해보았을땐 넌 정말 제국인의 정석처럼 생겼지만… 외모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되는 거니까. 나는 북대륙 출신이라 넓고 넓은 은해를 건너서 왔어. 제국 수도 근처까지 가는 상선을 얻어탄 거라 좀 돌아서 오기는 했지만... 터무니없이 맛없는 식사를 제외하면 나름 괜찮은 항해였어. 넌 은해에 가 본적 있니? 은해 한가운데서 보름달을 본 적은? 있어? 은해는 달빛 아래서 정말 이름처럼 은빛이야.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땐 '와,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할 정도로 예뻤다니까! 그치만 선원들이 날 놀리기 시작하고 나서는 얼른 배에서 내리고 싶다는 생각 밖엔 안 들었지. "네까짓 게 어떻게 마법사가 된다구. 꿈도 크네 이 수다쟁이 녀석. 고 짹짹거리는 입으로 이야기꾼이나 해라!" 이런 소리를 무려 한 달 하고도 보름 동안이나 들었다고 상상해봐. 내 짜증을 짐작할 수 있겠니? 마법사는 내 오랜 꿈이었단 말야! 그들은 날 모욕한 거라구.

그래서 말인데... 계획을 세워놓은 게 있어. 겨울방학 때 고향에 가게 되거든 꼭 그 상선을 다시 얻어타려고. 그때쯤이면 마법학부에서 뭐라도 배운 상태겠지! 얼른 그 아저씨들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줄 만한 멋진 마법을 배우고 싶어. 별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불이 저절로 피어나는 그런 마법! 흐흐. 아직은 막 입학식이 끝났을 뿐이지만 말야.

앗, 돌아보니 편지에 온통 내 항해 이야기 뿐이네. 혹시... 내 이야기만 너무 많이 한 걸까? 그래도 이해해 주라! 꿈에 그리던 아카데미에 발을 들여놓게 됐는데 입학식이 너무 경건한 분위기라 아무한테도 내 신나는 기분을 말할 수 없었거든. 드디어 (일방향이기는 하지만!) 말동무가 생겨서 이것저것 말을 너무 많이 한 거 같아. 아직 할 말은 많지만 이만 줄여야겠다. 벌써 저기 새벽 해가 보여. 곧 네가 일어날 시간이네! 이제 이걸 네 얼굴 위에 알맞게 얹어놓는 일만 남았어.

이름 모를 룸메이트 친구야, (비록 일방적으로 이야기만 하긴 했지만) 대화 즐거웠어! 답장 꼭 꼭 꼭 해줘. 꼭!

너에 대해 매우 궁금한,
돌린더흐

추신. 책상에 놔둔 사탕은 너에게 주는 내 뇌물이야. 입에 넣으면 톡톡 터지는 맛이 나더라! 제국의 수도는 참 신기한 걸 많이 팔아.

21 이름 없음 (3r0lp4uPF6)

2020-09-25 (불탄다..!) 06:32:20

>>21
돌린더흐 쉴른에게

(이 이하로는 글씨 색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아마 이름만 적고 뒷내용을 고민한 오랜 시간동안 잉크병을 바꾼 것 같다.)
답장이 늦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편지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느라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편지를 무시한 건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새 학기를 맞이한 선선한 바람이 부는 요즈음입니다. 환절기에는 감기 기운이 들기도 쉬운데다, 밤에는 일교차가 심하여 건강을 해칠지 걱정이 됩니다. 당연한 표현이겠지만 — 쉴른씨의 편지에 답장을 드리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일반과의 하뉴 율리우스 드 밴세피아입니다. 쉴른씨의 말씀대로 저는 인간이고, 열두살 신입생입니다. (잉크 얼룩이 있다. 다음 내용을 고민한 흔적같다.) 저는 가진 옷이 많지 않아 제 몫의 옷장도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취미는 책읽기입니다. 저희 양친께선 밴세피아 영지를 관리하십니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습니다. 해를 직접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인간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햇빛에 눈이 부시지 않고, 눈이 부실 때는 눈을 찌푸리거나 감습니다. 제 고향은 아카데미를 기준으로 대륙의 남동쪽에 위치한 밴세피아 영지입니다. 대륙 최대의 밀 생산지이기 때문에 풍요롭고 백성들의 민심도 좋은 곳입니다.

저는 아카데미에 온 것을 제외하면 제 고향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북대륙은 어떤 곳입니까? 쉴른씨께서 좋은 곳이라 표현하셨으니 분명히 행복한 곳이겠지요. 북쪽으로 갈수록 겨울이 길어지고 눈도 많이 내린다고 들었습니다. 북대륙에는 정말로 일 년 내내 눈에 뒤덮인 마을이 있나요? 달빛에 눈길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은해에 비치는 보름달까지 구경할 수 있다면 짧은 인생동안 봐야 할 달은 모두 봤다고 자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쉴른씨께선 어떻게 마법사가 될 결심을 하셨나요? 저는 편도 한 달 반이라는 긴 여행을 떠나고자 생각조차 못할 것 같아 존경스럽습니다. 무례한 선원이 나이를 이유로 쉴른씨의 꿈을 낮잡아본 이야기는 화가 나지만, 그래도 여행 도중 은해의 보름달을 본 경험처럼 아름답고 멋진 에피소드가 더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와는 별개로, 겨울방학 기간이 왕복 세 달이라는 일정을 소화하기엔 짧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쉴른씨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적절한 배편을 준비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쯤 쉴른씨께선 다른 친구를 사귀셨을까요? 보내주신 편지로 보아 사교성도 좋고 대화를 이끄는 능력도 훌륭하신 분같습니다. 아무리 조용한 학문의 장이라고 한들 우리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분명 쉴른씨와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실 수 있을 겁니다. 벌써부터 떠들썩한 새벽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먼저 편지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기뻤습니다. 쉴른씨의 이야기를 읽는 게 정말로 즐거웠으니 혹시라도 폐가 될까 생각을 하신다면 걱정 말로 답장 보내셔도 된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남은 하루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답장은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놔주시길 바라며,
하뉴 율리우스 드 밴세피아 올림.

22 이름 없음 (3r0lp4uPF6)

2020-09-25 (불탄다..!) 06:33:06

#
아이고야 >>21은 >>20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

23 이름 없음 (pvTlcV4f66)

2020-09-25 (불탄다..!) 07:46:36

...♡

(점 세개와 예쁘게 그려진 하트 하나만이 있다)

24 이름 없음 (QdGr3o.PSM)

2020-09-25 (불탄다..!) 08:39:34

최 쌤. 2반 1교시 수업 쌤이 들어갔었죠?
들어가서 무슨 얘기 했어요. 애들이 나만 보면 웃네...

-방 쌤

25 이름 없음 (LuGSkTwk1I)

2020-09-25 (불탄다..!) 15:02:32

>>21

*탁자에 얌전히 올려놓은 편지지*

예의바른 하뉴에게

대체 왜 내 편지를 무시한 거야!! ....
.... 라고 쓸 줄 알았지? 땡! 나는 지금 자는 네 옆에서 편지지를 껴안고 너무너무 기뻐하고 있어. 혼자 쓰는 방이었다면 너무 신나서 노래를 불러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답장이 조금 늦어도 괜찮아. 어쨌든 답장을 받았으니 된 것 아니겠어? 나는 곰 같은 참을성을 가지고 있다고. 오래 오래 강가에서 기다렸다가 연어를 탁 채어 잡을... *조금 고민한 듯 잉크 번진 자국* 잘못된 비유였을까? 일단 하뉴 넌 연어랑은 안 어울린다. 내가 널 탁 채어 잡아먹을 일도 없고. 그냥 나는 글씨를 무지 느릿느릿 쓰는 모양인 너를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심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이야기야!

편지 말머리에 '하뉴 율리우스 드 벤세피아에게' 라고 쓰지 않은 이유는 너무 길었기 때문이야. 이름이 그만큼 길다니…, 혹시 제국인들은 자기 이름을 외우기 어렵진 않니? 내가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면 안주머니에 이름을 써가지고 넣어다니며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확인했어야 했을걸. 나도 '제이미' 라는 (북대륙과는 전혀 안어울리는) 미들네임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쓰지 않아. 서류를 작성할 때도 빼놓기 일쑤라니까. 내가 가정교사에게 혼날 때 말고는 거의 불리지도 않는 이름이야.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널 '하뉴 율리우스 드 벤세피아!' 라고 부를 때가 온다면 그건 내가 (가정교사가 손님용 유리잔을 모두 깬 게 나라는 것을 깨달았을때처럼)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가 아닐까? 아마 미들네임은 분노의 상징인 모양이니까.

아무튼 아주 깔끔하고 예의를 갖춘 너의 편지는 잘 읽었어. 단정하게 풀어 놓은 짐을 봐서 성격을 짐작했어야 했는데! 너는 아주아주 모-범-적-인 학생임이 분명하구나? 나처럼 어렸을 적부터 공부하기 싫어 도망다니지 않았던 것도 알겠네. 뭐, 내 글씨체와 편지 진행 방식을 보면 알겠지만 난 예의를 갖춘 편지쓰기에 대해 하나도 몰라. 내가 유일하게 아는 거라곤 "초록이 짙어지는 달입니다, 부인. 신의 뜻 아래서 모든 것이 평안하시길 빕니다." 밖에 없단 말야! (가정교사가 억지로 외우게 시켰어. 으!) 그동안 내가 보내야 하는 예의 바른 편지들은 다 저 문구로 시작할수밖에 없었지. 심지어 겨울에도 "초록이 짙어지는 달입니다…‥" 타령을 해야 했지 뭐야? 게다가 너는 부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제국인들은 북대륙 사람들과 다르게 신을 믿는 사람이 적다고 하니까 세상에, 결론적으로 쓸 수 있는 문장은 하나도 없어! 너에게 쓰는 편지에 예의를 갖추기는 북대륙에서 아카데미까지 헤엄쳐 오는 것만큼 어려운 거야. 변명을 늘어놓은 이유는 내가 조금 무례해 보이겠지만 용서해 달라는 의미였어. 내 맘 알지?

남동쪽의 벤세피아 영지... 네 말을 듣고 순식간에 머릿속에 넓게 펼쳐진 황금빛 밀밭을 상상할 수 있었어. 정말 멋진 경치였겠다. 빵도 많이 먹을 수 있었겠고! 민심이 좋다는 말은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말이지? 그게 제일 최고네. 언젠가 놀러가 보고 싶어. 정말로 태어나고 자란 공간이 너에게 영향을 끼쳐서 지금의 하뉴가 된 거라면, 벤세피아 영지의 사람들은 모두 따뜻하고 예의바르면서 친절한 사람들일 거야. 내가 살던 곳은 북대륙에서도 북서쪽에 있는 랑셰네 왕국이야. 원래 닐누이 왕국이었지만 복잡하고 긴 전쟁을 하더니만 내가 일곱살쯤에 갑자기 랑셰네 왕국이 됐어. 마악 '닐누이' 를 쓰는 방법을 익힌 참이었는데 철자를 다시 외우느라 엄청 고생했지 뭐야!

북대륙에서 12년을 살았지만 어떤 곳인지 설명하라고 하니 어렵네. 일단 좋은 곳이기는 해! 너도 말한것처럼 겨울이 무지 길고, 가끔은 너무너무 길어서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아주 예쁜 건 맞아. 내가 살던 랑셰네는 산맥 서쪽 방향이야. 덕분에 비교적 따뜻한 편이라 눈에 덮이지 않은 시간도 꽤 있어. 작은 동물들이 폴짝거리고 흙과 이끼가 얼굴을 내미는 시기지! 그런데 드라고 산맥을 넘어서 더 더 북동쪽으로 간다면 정말 일년 내내 눈에 잠긴 곳이 있을거야. 거긴 아주 춥거든. 그곳에선 달빛이 비치면 작은 유리조각이 빛나듯이 온 세상이 반짝거리겠지! 아무도 밟지 않아서 깨끗한 눈밭도 잔뜩 있을 거고. 사실 나는 눈이 내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우리 집 앞의 눈을 다 치워야 하거든. 얼어버리기 전에 얼른 치우라고 잔소리를 엄청 들어.) 그런 광경은 언제 봐도 탄성이 나오잖아.

마법사를 꿈꾸는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야! 내 고향에서는 내가 너무 자주 떠들고 돌아다녔던 덕분에 마법사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알아, 돌린! 안다니까!" 하고 호통을 쳐댔거든. 몇 번 쯤 더 들어도 덧나는 건 아닌데! 마법사를 꿈꾸기 시작한 건 정말 옛날이야.. 어릴적에, 그러니까,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인데… 하늘에서 긴 꼬리를 남기며 날아다니던 불꽃이 정말 멋있었어. 저게 무어냐고 물어보니까 마법이라고 하더라고. 저게 우리 집에 꽂히면 모두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단숨에 사랑에 빠졌지. 그때는 그게 누굴 공격하는 건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냥 분홍, 노랑, 파랑색 별똥별이 떼지어서 날아다닌다고만 생각했거든. 글로 쓰니까 조금 유치해 보이지만 여섯 살 꼬마애가 인생의 큰 표지판을 세우게 된 날이었다! 웃기지? 그리고 마법 마법 노래를 부르다가 우연히 만난 치료 마법사에게 재능이 있단 말을 듣고, 가정교사를 만나고, 아카데미 입학 시험을 준비하고… 그리고 여기야! 전쟁과 재능과 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거지. 너는 무얼 하러 아카데미에 와서 일반과에 입학한 거야? 너도 나처럼 꿈이 있어? 추측해보려고 했지만 일반과에서 배우는 내용이 무엇인지도 확실히 모르는 마당에 추측하는 건 너무 어려웠어. 음... ... 법률 상담가...? 사업가? 교수? (세상에,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아는 직업은 엄청 적단 말이야.)

여행은... 더 멋진 에피소드 같은 건 없어. 가정교사가 그랬듯이 나는 늘 무모하고 겁없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잠깐, 이거 다 똑같은 이야긴가?) 애니까 덜컥 상선에 타서 출발해버린거지! 바다 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기라도 하는지 하루가 열흘 같고 열흘이 하루 같던 날들이었어. 사실 멋진 모험담을 지어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관둘게. 더 말해줄만한 건 내가 선원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려고 여러번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한 이야기와, 실수로 어어엄청 독한 술을 마셔서 바다에 풍덩 빠질 뻔한 이야기 밖에 없어. 둘 다 멋진 경험이라고는 할 수 없네. (그치만 들어봐, 바다에선 다들 그런 술을 마신대! 매일 그런걸 마시면 하늘과 바다가 구분도 안 될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항해를 하는 걸까? 정말 목구멍이 불타는 기분이었어.) 그래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괜찮은 경험이었어. 은해는 상어가 자주 나오는 것 빼고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바다야.

오! 세상에. 하뉴! 배편을 준비해준다는 상냥한 이야기는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난 정말 괜찮아. 방학이 짧다면 복수는... 졸업때까지 미루지 뭐. 있지, 북대륙에는 유명한 격언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든 받은 만큼 돌려주어라." 라는 거야. (전쟁신 신화에서 따온 말이기는 한데 종교 상관없이 북대륙에서 자주 쓰여.) 당한 만큼 복수해주고, 도움을 받은 만큼 베풀라는 의미지. 하지만… 난 지금 빈털터리야! 그리고 아마 졸업할 때까지 계속 빈털터리 상태일 테니…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은 불가능한걸. 그냥 둬! 난 그런 멋진 도움을 받았다간, 꼭 그만큼 돌려주기 위해 애를 쓰느라 아주 힘이 들 테니까.

넌 진짜 똑똑하네. 마치 내 학교생활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아. 네 말이 맞아! '콜린 경' 이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와 친해졌어. 걔는 멋진 뿔과 예쁜 붉은 곱슬머리를 가진 앤데, 어제 기초마법이론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나는 콜린이다! 다들 안녕하신가!" 하고, 선전포고를 하는 기사처럼 선언하는 거 있지? 게다가 걔 손에 칼처럼 긴 날이 달린 완드가 들려있어서 모두가 그 앨 전설의 기사 콜린 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세더아일랜드 출신이라 남부 악센트를 쓰는데 정말 재밌는 애야! 같이 수업을 듣는 내내 즐겁게 쪽지를 주고받았어. 교수님께 걸려서 끝나고 칠판을 광나게 닦아야 했지만. 너는 어때? 일반과의 수업은 재미있었어? 새로운 친구는 사귀었니? 내 생각에 너는 분명 인기가 많았을 거야.

사실 이 편지는 점심 휴식시간부터 쓰기 시작한 거야. 도서관에서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뭔갈 열심히 쓰고 있으니 지나가는 교수님들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더라. 너도 나중에 편지를 쓰고 싶다면 참고해 봐! 편지지가 너무 좁아서 이만 줄인다. 꼭 꼭 답장해 줘! 곰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게.

언제쯤 이름으로 불러줄 건지 궁금한,
돌린더흐로부터.

추신. 말 편하게 해도 돼!

26 이름 없음 (5skcBSr8kg)

2020-09-25 (불탄다..!) 15:33:48

지금쯤 너는 새 집을 구했을까?
사실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서, 지금 이야기하려고 해.
파란 뚜껑 통에 든 김치 먹은 거 셰어하우스 주민이 아니라 나였(지운 흔적이 있다)
이 말을 듣고 쫓아올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편지를 보내자마자 잠적할거야.
잘 찾아보렴.

- 네가 아끼는 통을 지금 오른손에 들고 있는 너의 친구 -

27 이름 없음 (tqFcEJJzS6)

2020-09-25 (불탄다..!) 16:04:22

수신자-감색 창문

[녹색 지팡이의 연락이 없다.
꼬리를 밟혔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창문들의 생사를 확인하라.
성 위로 흰 사람이 지나가는 날,
약속했던 곳에서 만난다.]

위는 깃발의 전언이다.

잡힌다면 영예롭게 죽어야 하겠지만
너까지 죽는 일은 없었으면 해.
사용할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맹독을 보낸다.
부디 무사히...

발신자-자주색 비둘기

28 이름 없음 (3r0lp4uPF6)

2020-09-25 (불탄다..!) 17:03:58

>>25

(똑같은 내용의 편지지가 한 장은 반말로, 한 장은 존댓말로 써져있다. 이하는 반말로 쓴 편지의 내용.)

돌린더흐씨에게.

픽시의 날갯짓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고 좋은 저녁이야.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었어? 말을 편히 놓는 게 정말로 많이 어색해서 내가 무례하지 않게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돌린더흐씨는 마법으로 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니까 내가 말을 이상하게 해도 말뜻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해.

돌린더흐씨가 편지를 받고 노래를 부를 정도로 기뻐할 줄 알았더라면 글씨를 좀 더 빨리 쓰는 거였는데. 그래도 내 미들네임을 부르면서 나를 다그칠 정도로 늦게 편지를 주진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교육 방식은 대륙이 달라져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음, 사실, 이름 외우는 게 힘들지는 않아. 나의 고향과 아버지의 이름만 외우고 있으면 되니까. 아마 다른 대륙인들도 비슷할 거야.

북대륙에서는 편지 첫머리에 적는 인삿말이 정해져 있어? 다음에 나도 사용해봐야겠어. 돌린더흐씨가 말한 가정교사는 첫 번째 편지에서 말해준 선생님과 동일한 분이셔? 자라온 환경과 인격 형성이 큰 연관이 있다고 말씀하신 분 말이야. 그 분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했었는데 편지 흐름 상 마땅히 물어볼 자리가 없어서 생략했었거든. 좋은 분이셨어? 그리고, 나한테 편지를 보낼 땐 복잡한 예법을 지키려고 신경쓰지 않아주는 게 더 기쁠 것 같아. 나도 노력 많이 할 테니까. (비록 높임말을 사용한 편지를 같이 보내기는 했지만.)

고향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워. 산맥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이 기후가 다르다니 굉장히 신기했어. 무슨 원리인걸까? 그리고 땅 위에 풀이 아니라 이끼가 자란다는 표현도 색달라서 재미있었고. 눈이 그만큼 자주 내리면 농부들이 잡초 뽑는 걸 싫어하듯이 눈치우는 일이 고되긴 하겠다. 이건 내가 너무 섣불리 질문한 것 같긴 하네. 그래도 언젠가 북대륙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더 커졌어. 내 고향은 왕국처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지 않은 곳이라 전해줄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게 아쉬워. 이런 아카데미나 수도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많이 모이지만 ─ 돌린더흐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적절한지는 모르겠는데 ─ 수도에서 멀어질 수록 종족 다양성이 떨어져.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비슷한 얼굴들이었어.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은. 돌린더흐씨 빼고.

랑셰네 왕국에선 전쟁의 영향으로 군사적 목적의 마법이 많이 개발되고 개량된 거려나? 하늘에서 불꽃이 날아다녔단 문장을 보고 놀랐어. 왜냐하면 밴세피아에서 내가 본 마법은 밀을 갉아먹는 해충 박멸이나 자동 먼지떨이같은 것 뿐이거든. 여기서 돌린더흐씨가 원하는 종류의 마법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네. 전쟁이 무섭지는 않았어? 북대륙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렇긴 한데, 나는 내 몸을 지킬 능력이 되지 못하니까 많이 무섭기도 해.

그리고 돌린더흐씨의 꿈이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여섯 살 때의 꿈을 지금까지 좇고 있다는 게 정말 멋있고 부러워. 그러니까, 어, 나한테는 이런 이야기 많이 해도 돼. 많이 해줘. 선원분들이 어떻게 네 방해를 피했는지와 바다 위에서 마시는 독한 술 이야기, 그리고 하마터면 상어에게 잡아먹힐지도 몰랐던 이야기(은해에 빠질 뻔했다고 했으니까.)도 나한테는 정말 재밌는걸. 앞선 편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정말 말재간이 부족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해본 적이 없고, 많이 하지도 못 해. 그래서 만약 내가 언젠가 줄 보답에 부담을 갖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왜냐면 그 때의 나는 편지를 통해서 얻은 기쁨을 '받은 만큼 돌려주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콜린 경 이야기는 나도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어. 같은 일반과 중에 기초마법이론을 청강하는 학생이 한 분 계시거든. 나는 아직 친구는 못 사귀었어. 그러니까, 어, 내가 이런 이야기 했다고 다른 친구에게 말하면 안 돼. 일반과의 학생들은 다른 과에 비해 귀족들이 많은 데다가 2학년이 될 때 마법학과나 검술학과로 전과하는 비율이 아주 높으니까 굳이 친구를 만들 생각을 안 하는 것도 같아. 그래서 보통 평상시에도 교류가 잦은 가문의 자제분들끼리 모이는 경향이 큰데, 음, 사실 나는 사교회에 나간 적이 없어.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거든. (그래서 마법학과도 검술학과도 나는 못 가.) 그래서 어느 무리에 끼어들기가 조금 힘들어.

그래도 일반과가 나쁘다는 건 아니야. 세계사라든가, 정치학이라든가, 경제학이라든가. 공통교양 과목에선 마법과 검술 이론에 대해서도 배우는데, 비록 실전에서 사용하진 못하더라도 학문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건 아주 흥미로운 것 같아. 만약 차기 가주인 형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아카데미에서 계속 연구를 하는 삶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돌린더흐씨가 말한 대로 교수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기도 해. 돌린더흐씨는 장래희망이 뭐야? 고향으로 돌아가서 왕실 마법사가 되는 것도 멋질 것 같아.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무례한 질문이면 무시하고 넘어가도 좋아. 나는 인간 외의 종족과 대화하는 게 서툴러서 실수를 할 수도 있어. 마법학과는 실습만큼 과제도 많다고 들었어. 나는 해야 할 숙제가 많을 때마다 밤을 새는 일이 많았었는데, 너는 낮에 잠을 자지 않는 게 아예 불가능해? 그러니까, 왠지 네가 과제로 괴로워하는 걸 바라는 것 같은 말이 되긴 했지만, 언젠가 네가 그래야 할 날이 생긴다면 같이 아침식사를 하면서 눈을 마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친절한 사람과 편지로만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잖아.

이번에 보내준 편지도 상당한 양이었는데 만약 페이지가 무한한 백지책을 가져다주면 돌린더흐씨는 안의 내용을 모두 채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읽는데 쉬운 양은 아니었을 텐데 여기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슬슬 펜촉이 닳기도 했으니까 이만 말을 줄일게. 다음 편지에서 보자.

팝핑캔디를 구하지 못해 대신 먹으면 눈색이 바뀐다는 젤리를 올려두며,
하뉴 율리우스 드 밴세피아 보냄.

추신. 곰 비유는 멋진 비유였어.

29 이름 없음 (ZO/z3WI2xg)

2020-09-25 (불탄다..!) 19:48:53

불효자에게.

잘 도착했냐? 나 취직했다. 직원이 세 명 밖에 없는 우체국은 그다지 좋은 직장은 아니야.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나거든. 방금 전에도 어떤 망할 놈이 누가 봐도 수상한 짐을 맡기고 가길래 싸구려 폭탄일까 불안해했다니까. 열어보니 순무였어. 젠장할. 그래도 직원이라 우표를 싸게 살 수 있다는 건 좋네.
얼른 평소처럼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쳐. 우리 나라에서 제일가는 왕립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면서 어째 편지 한 통이 없냐? 이제 우리 마을이 깡촌이라 쪽팔리디? 혹시 도시 애들이 따돌리냐? 개새끼들. 아무튼 무슨 이야길 하든 좋으니까 뭐라도 써서 보내! 이 누님이 적당히 걸러서 케니어 아주머니가 안심하실만한 스토리로 만들어주마. 잠이 잘 온다는 향수 같은 걸 가져다 드리기는 했는데 사기였는지 뭔지 케니어 아주머니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걱정에 잠을 못 드시나 봐. 그래, 언제나 그랬듯이 만병통치약은 너겠지. 그러니까 얼른 괜찮은 편지를 보내라고. 완벽하게 안전한 증기기관차를 타고 수도에 도착했을 거고, 꽃잎 흩날리는 희망 넘치는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수백번을 말씀드려도 믿지 못하시는 모양이다. 어휴. 아무튼 얼른. 아주머니 쓰러지시기 전에.

사랑을 한 톨도 안 담아서,
로렌.
(수도의 시계탑 우표가 붙어있다.)

30 이름 없음 (nHJNo8EpNA)

2020-09-26 (파란날) 00:20:33

유리벽 너머의 마이니로부터

안녕. 우음. 편지에는 어떤 말을 써야하는지 아니? 편지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어. 자기소개부터 시작할래. 안그러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모를 테니까... 나는 마이니라고 해. 매일 아빠 회사에 놀러오니까 내가 어떻게 생긴진 알고 있지? 나이는 11살이야. 생일은 7월 5일이고 소다와 초콜릿쿠키를 좋아해. 이제 너에 대해서도 말해줘! 너는 머리카락이 하얗고 엄청나게 긴데 그걸 알고 있니? 너네 방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잖아. 날때부터 머리가 그렇게 예쁜 색이고 길었니? 어떻게하면 나도 너처럼 하얗고 예쁜 머리카락을 가질 수 있을까? 머리카락을 더 깨끗하게 감으면 되겠니? 그리고 너네 방(←그 유리 상자를 말해.)에 집게처럼 생긴 물건에 집혀서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매달려있던데 그건 아프지 않니? 동생 모가 머리를 잡아당기면 나는 머리가 너무너무 아프던데 너는 안그러니? 너를 보면 친구가 되고 싶어. 넌 안그런 것 같지만.... 쳐다보면 고개를 돌려버리잖아. 아빠도 말을 걸지말라 해.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이게 정말 그렇게 잘못이야? 아빠 몰래 너네 방으로 편지를 밀어넣어. 너는 대답은 안하지만 그래도 답장은 해줄 수도 있잖아? 그럼 내일도 올게!

유리벽 너머의 이름 모를 친구에게

31 이름 없음 (UoP7dmDtzg)

2020-09-26 (파란날) 01:16:06

>>29

안녕, 렌.

소식이 늦어서 미안해. 가방을 잃어버렸지 뭐야. 잃어버렸다는 말이 맞나? 누가 기차역에서 내 가방을 자기 거랑 바꿔서 들고가는 바람에 되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역에서 덜덜 떨면서 자보기도 하고……. 그동안 입학 서류가 없어서 학교도 못 들어갈 뻔 했다니까.
취직이라니, 기쁜 소식이네. 축하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어때? 너한테 편지 받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우리 늘 스무 걸음 거리에 살았는데 말야. 내 팔을 부러뜨리던 네가 잘 자라서 이제는 멀쩡한 사람을 폭탄테러범으로 의심하는 걸 보니 정말 자랑스럽다.
애들은 괜찮아. 너처럼 날 괴롭히지도 않고, 다들 성실해. 역시 도시 애들은 공부 잘 하더라. 따라 잡으려면 많이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 우리 깡촌 부끄럽지 않으려면 말야. 아직도 얼떨떨해. 내가 어떻게 장학생이지? 선발 과정에서 실수한 거 아닌가 싶어.
아, 기숙사 같은 방을 쓰는 친구가 수도 출신이더라. 이곳에 대해 잘 배우고 있어. 근사한 레스토랑도, 네가 좋아할만한 곳도 발견했어. 뭔지는 안 알려줄 거야. 궁금하면 다음에 수도로 놀러 오던가.

사랑을 반의 반 숟가락 담아,
에단.

추신.
어머니를 돌봐줘서 고마워. 내 소식이랑 같이 스카프만 전해드려 줘. 다른 건 네 선물이야.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소포에는 장미향 향수와 시집, 스카프가 들어있다.)

32 이름 없음 (v3hYI0nDl.)

2020-09-26 (파란날) 03:07:32

>>30

유리벽 너머의 ==== (까맣게 덧칠해졌다)

매일 멍청한 얼굴로 이쪽을 보는 게 누군가 했더니 너구나. 말 걸지 말라 들었다면서, 편지는 왜 쓴 거야? 혼날까봐 무섭지도 않아?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소다랑 쿠키도 뭔지 모르겠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으니까 됐어. 내 머리가 어떻게 길고 하얗냐고?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원래 이랬는지, 변한 건지도 기억 안 나. 네 말대로 거울도 없는 곳이잖아. 차라리 너희 아빠한테 물어보지 그래. 그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아프지 않냐고? 말하기 싫어. 알아서 뭐 하게. 애초에 난 너랑 친해지고 싶은 생각 없어. 나랑 친해져봤자 나쁜 일만 생길걸. 그러니 평소처럼 거기서 가만히 서 있다 집에나 가. 이번에는 이 말 하려고 어쩔 수 없이 쓴 거고, 다음부턴 절대 답장 안 할 거야. 편지 쓰지 마.

유리벽 너머의 사람에게

33 이름 없음 (AU14OfWX2o)

2020-09-26 (파란날) 14:52:02

>>31
에단에게.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역에서 자다가 소매치기는 안 당했고? 빼빼 말라서 돌아왔다간 아주머니가 눈물로 강을 이루실 테니 먹는 거엔 돈 아끼지 마. 우체국은 그냥 그래. 같이 일하는 직원은 제시랑 던이라고 멍청이 같은 놈 둘이 있어. 제시는 알지? 맨날 울던 놈. 옛날엔 바보 제시라고 불렀는데 우체국에 취직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바보같은건 여전해. 아까도 주소를 잘못 받아썼다가 나한테 얻어맞았고 지금은 빽빽 소리를 지르고 있네.
흥, 나라면 수도 애들 가식 같은 건 안 믿을 걸. 너같이 순해빠진 애들이 대도시에 가면 사기 당하기 일쑤란다. 내가 어렸을때부터 괴롭혀 줬던 이유는 바로 그런 데 가서 기 죽지 말라고 그런 거야. 누님의 큰 뜻을 이제 좀 알 것 같냐? 시비를 거는 새끼가 나타나면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보는 게 시작이야. 그리고 주먹을 꽉 쥐고 인중을 힘껏 때려. 아니면... 그냥 성적으로 눌러주던가. 넌 바보같은 면은 있어도 공부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잘 했으니까 겸손 좀 떨지 말고! 장학생 딱지 붙이고 들어갔으면 그래도 잘하는 축일 거 아냐?
네 소식과 스카프는 잘 전해다 드렸어. 가방 잃어버린 부분이랑 덜덜 떨면서 잤다는 부분은 빼고. 수도 아가씨들에게 무수한 구애를 받느라 늦어지지 않았겠냐고 했지. 캐니어 아주머니께서는 이제 좀 안심하신 모양이다. 다 이 누님의 기막힌 스토리 텔링 능력 덕분이지 않겠냐.이제는 밖에도 좀 나가시던데, 월급을 좀 저축해놓고 있으니까... 휴가를 받으면 아주머니 모시고 놀러 갈게.

걱정을 좀 하고 있는,
로렌

추신. 향수 잘 골랐어. 고마워.

34 이름 없음 (BjQ9PF7/a6)

2020-09-28 (모두 수고..) 12:50:19

(까만 화면에 삐빅거리는 소리와 함께 깜빡이며 나타나는 흰 글씨)

[지구에서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900일 전]
[LOADING...]
[전송 실패]
[다시 시도하시겠습니까?]
[LOADING...]
[파일이 손상되었습니다. 여시겠습니까?]
.
.
.
.

사�� ...
일어났�요¿
좋□ □□입니다.
□걸 보고 있□□ 것은 도착하기 □일 전이라□ 뜻이겠□□. 당신 □료 말로는 1��일이 걸린다□ 하□□□.
몸은 ㅇ•ㅣ떻습□까. 숨은 □ 쉬어□니까? 춥지는 않아요�
우주� 가겠다□ 당신을 더 말렸□야 했□□.
□아오면 나는 �살 더 나이가 □어 있겠지만 당신은 싱그러□ 그대로□ ��요. 그런�도 절 사랑□ 줄 건가□? 글쎄□... 냉동□□은 기억을 □□ 잃어버□ 수도 있□고 해서 선택하지 □았□□□. 당신을 잊□버린다면 저는 물�� 벗어난 물고기□□ 금방 □어버리고 말□□□.
위험□ 일은 아니��, □□일 뿐이라고 몇번□고 저를 안심시□던 사랑□ㄹ•ㅣ운 ��이 눈앞에 보이는 □ 아른거□□□. □말로 아무 □도 없는 � 맞죠? 연구□ 어때요� 잘 진행□□ □□□¿
□□... 당신의 모든 것□ □□습니다. 보�싶어요. 사랑한□고 더 자주 ��줄걸.
다른 □□에 있어도
영□의 시간이 지나도,
내 마음□ 영□히 그대로��.

□□□이 □□을 □□□,
GREY □□□

35 이름 없음 (7Fz3pUnSys)

2020-09-28 (모두 수고..) 21:21:55

>>33

안녕, 렌.

답장이 조금 늦어져서 미안해. 선물이 마음에 든다니 기쁘네. 시향해 보니 꼭 네가 생각나서 샀어.
학교 식당은 정말 훌륭해. 책에서나 보던 음식, 디저트들이 매 끼 다르게 나와. 아니, 심지어 와인도 주더라니까? 나 아무래도 둥글어져서 굴러 가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가끔은 배리 아저씨가 해주시던 요리가 그리워. 왜, 신메뉴 개발하면 우리한테 먹어보라고 하곤 하셨잖아. 그 기묘한 맛의 감자요리가 뭐라고 이렇게 생각나는지 모르겠네.

세상에, 바보 제시가 우체국에 취직했단 말야? 직원이 셋인데 둘이 멍청이라니 네가 고생이겠어.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소중한 친구였는지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겠다. 일이 힘들지는 않아? 무거운 소포 같은 건 멍청한 애들 시켜서 옮기라고 해. 힘은 네가 더 세겠지만.
역시 불주먹 로렌은 다르구나. 법보다 주먹이 가깝긴 하지만……. 나는 에단의 방식으로 해결할게. 저번 편지로 걱정시켜서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나 낯을 좀 가리잖아. 이제 이곳 생활에 제법 적응한 것 같아. 그래도 날씨 하나만큼은 적응이 안되네. 여긴 벌써 조금 춥거든. 따뜻한 우리 마을이 그리워.
어머니 소식을 전해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다면 난 어머니를 두고 이 먼 곳까지 혼자 올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을거야. 전공 공부는 정말 재미있어. 학교 도서관도 정말 커서 좋고. 아, 이 편지도 도서관에서 쓰고 있어.
아, 그리고 10월 내내 건국 기념일이라고 크게 축제를 한대. 구경거리가 많은가봐. 네가 그때 쯤 휴가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좋은 소식 기대할게. 그렇지 않더라도 소식 자주 들려줘.

평안을 바라며,
에단

(수도행 기차표가 두 장 동봉되어 있다.)

36 이름 없음 (d1a2fr0oRk)

2020-09-28 (모두 수고..) 23:54:15

안녕하세요, 마법사입니다.

이 주소를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머무르고 있는 저택은 고아원이 아닙니다.
당연히, 당신의 바램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죠. 저는 상냥한 마법사가 아니니까요.
당신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저 역시 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답니다. 이해해주실거라 믿습니다.

대신에 절인 높은보리수유가지를 동봉해 보냅니다.
한 잎, 뜯어서 어금니로 잘게 다지면 마음 깊은 곳의 자물쇠를 열 수 있게 됩니다.
당신에게 작은 용기의 발판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이제 다신 답장 하지마세요.
마법사가.

37 이름 없음 (IXutKw4v/6)

2020-09-29 (FIRE!) 00:54:22

에리에게.

아르드나 공화국에 발령된지 벌써 3개월이 되어가네. 처음엔 한달만 다녀오면 된다고 했으면서 계속 시간이 늘어나더니 지금까지 와버렸네. 너가 걱정하던 일은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아. 제국이 공화국에 설치해둔 대사관에서 암살 기도가 일어난 이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세르파 경께서 제국으로 급히 귀환하시고 두 국가 사이에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지. 그게 세르파 경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인지 아니면 제국을 향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대사관은 안전해. 제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대사관을 경호하는 인원들이 두배 가까이 늘기도 했고, 경계용 마법 아이템도 잔뜩 배치했거든. 최근 수상한 동향도 느껴지는 것은 없으니까 암살기도는 세르파 경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지 않았나 싶어. 아 요즘엔 어떻게 지내? 펠러와 슈레네의 결혼 소식은 들었어. 여기도 나름 정보가 들어오긴 들오더라고. 그 둘은 매일 같이 싸우더니 결국엔 결혼까지 하네.

얼른 권한대행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말이야. 그렇게 사람 구하기가 힘든가 싶기도 하고 ... 떠날때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졸지에 거짓말이나 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말이야. 보고싶어, 에리. 매일 같이 너 생각만 해서 일도 손에 안잡힌다니까. 그렇다고 일을 미루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말고. 한 두달 정도만 있으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그 날 꼭 보러갈께. 그럼 나 없다고 우울해하지말고 잘 지내, 안녕!

에슈나가 사랑을 담아 보냄.

38 이름 없음 (MszdM1kKy6)

2020-09-29 (FIRE!) 13:35:08

안녕, 두꺼운 공책. 혹은 이걸 읽고 있을 훗날의 누군가.

오늘부터는 너와 나 둘 뿐이야.
바깥은 아직도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아마 핵이 떨어지면 이곳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겠어.
어서 빨리 우리 군대가 놈들을 몰아내고, 다시 예전의 생활을 되찾아 줬으면 좋겠다.
오늘따라 마트의 지루하고 괴로운 계산대가 너무 그립군.

39 이름 없음 (hmiyCoKYQk)

2020-09-29 (FIRE!) 14:34:42

보고 있어요? 이거 누가 주웠어요? 아직 눈이 있어요? 나랑 얘기할 수 있어요? 답장을 쓸 수 있어요? 제발 이거 읽으면 대답해줘요... 나, 나 혼자만 남은 건 아니죠?

(종이비행기에 적혀 있다.)

40 이름 없음 (SVbT6HDCOM)

2020-09-29 (FIRE!) 15:08:29

안녕, 낡은 공책 씨.

그래, 바보같은 짓이야. 누군가가 공책에 적은 편지에 답을 하다니. 답장을 써봤자 전할 방법도 없잖아? 당신이 어제의 사람인지 일주일 전의 사람인지 일 년 전의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멍청한 짓인 건 알지만, 그래도 쓸래. 읽다 보니 궁금해졌거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게다가 미치도록 지루하기도 하고 말이야.

지금 바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 실제로 죽은 건 쥐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겠지만. 아마 시체가 산처럼 쌓여도 세상에서 쥐가 사라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간간히 들려오는 건 바람 소리밖에 없어. 차라리 사이렌이라도 울리면 좋을 텐데. 하긴, 이제 울릴 사람도 없으려나.
너무 조용해서 가끔은 세상에 나 말고 전부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 지난 몇 주 동안 산 사람은 그림자도 못 봤으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살았는데 나만 죽은 걸수도 있겠다.

오늘 편지는 여기서 끝낼래. 뒷내용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랬다간 너무 빨리 끝나버릴 테니까 아껴 읽을 거야. 하루에 한 장씩. 그러고 보니 읽을 만한 걸 찾은 것도 한참만이네.

추신. 난 가끔 사람들로 가득 찬 퇴근길의 지하철이 그리워.

41 이름 없음 (MszdM1kKy6)

2020-09-29 (FIRE!) 15:36:09

안녕. 아직 뻣뻣한 공책. 혹은 먼 훗날 내 무덤에서 파헤쳐진 이걸 읽고 있을 누군가.

둘이서 함께하는 두번째 날이야. 여전히 시끄럽고, 정신없어. 늘 그렇기는 하지만.
다만 지금은 좀 다르지. 평소의 소음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머플러를 벌집이라도 만들어 둔 것 같은 엔진 배기음들이었어.
근데, 이제 들리는 소음은 사이렌 소리와 어딘가, 어딘가 먼 곳에서 코끼리 따위가 엉덩방아라도 찧고 만 것 같은 소리야,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대통령이 '국민 여러분, 이번 사태가 끝나는 날까지 모쪼록 살아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국군이 필사의 전력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라는 의미없는 방송밖에 들리지 않아.

문득,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알루미늄 배트를 쳐다보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총을 들었어야 했을까? 저 친구들이 포화 속으로 뛰어 들 때 내가 같이 있어줘야만 했을까?

아직은 모르겠어. 지금 당장은 이 콘크리트와 합금으로 이루어진 잠수함 속에서 떠다니고 있을래.

42 이름 없음 (SVbT6HDCOM)

2020-09-29 (FIRE!) 15:55:48

안녕, 군데군데 잉크가 번진 공책 씨.

편지를 읽고 오랜만에 소리내서 웃었어. 코끼리의 엉덩방아, 적절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네. 그 정도로 큰 소리를 내려면 아마 크기가 자유의 여신상 정도는 되는 코끼리였을 거야.
잠수함이라니, 신기하다. 잠수함은 박물관에서밖에 보지 못했어. 공책 씨는 해군이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특수한 직업? 내일의 편지에는 답이 나와 있으면 좋으련만.

공책 씨가 전쟁에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다간 편지도 여기서 끝이었을 테니까. 지금은 먹을 것보다도 오히려 읽을 거리가 더 소중해. 적게 먹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졌지만, 아무도 없는 거리를 하루종일 넋놓고 쳐다보면 정신이 이상해지는 느낌인걸. 그런 의미에서 공책 씨는 내 정신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야. 모쪼록 앞으로도 책임감을 갖고 임해주길 바라.

추신. 알루미늄 배트는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지!

43 이름 없음 (7ggHIxrLt6)

2020-09-29 (FIRE!) 16:33:22

사랑하는 아빠께

창문으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 속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이 도시의 날씨는 변함없이 아름다우니, 아빠가 계신 지구 반대편의 ■■■■에도 볕이 잘 들었으면 좋겠어요.

날짜를 헤아려 보니 아빠가 집을 떠나신 지도 반 년이 다 되어 가네요. 그간 저는 키가 꽤 커져서 이젠 놀이공원에서 못 타는 기구가 거의 없어요.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려고 한 달마다 제 방 벽에 기대 서서 키를 펜으로 표시하고 있답니다. 열심히 기록했으니까 아빠가 오시면 꼭 보여 드리고 싶어요. 나중에는 엄마 키도 넘고 아빠 키도 넘을 수 있겠죠? 그 때가 되면 아빠가 지금 우리 가족을 지켜 주시는 것처럼 제가 부모님을 지킬 거예요.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잘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본 시험 성적도 학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담임 선생님께서 말하셨어요. 그래도 아직 몇 등인지 아는 건 아니니까 엄마께는 성적표가 나올 때까지 비밀로 할 거예요.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데, 걔들은 제가 어려운 말을 많이 써서 신기하대요. 그냥 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에 나오던 말들을 쓰는 것일 뿐인데, 별명이 애늙은이가 되어 버렸어요. 그래도 책 읽는 건 즐거운걸요. 아빠를 닮은 걸까요?

엄마는 여전히 몸이 안 좋으셔서 자주 누워 계세요.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대요. 몸이 병이랑 싸우고 있는 중이라서 힘들 뿐,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엄마가 병을 이기는 데에 전념할 수 있게 제가 집안일을 좀 더 많이 하려고요. 요즘은 엄마를 위해 야채죽을 끓여 드리고 있는데, 솜씨가 좋다고 칭찬받아서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아빠가 돌아오실 때쯤에는 분명 엄마도 건강해지셔서 우리 가족 셋이서 함께 여행을 갈 수 있을 거예요.

■■■■의 상황에 대해서 때때로 신문에 조그맣게 기사가 실려요. 그걸 꼼꼼히 읽은 다음에 가위로 오려서 모아 두고 있는데, 대부분은 몇 번의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평온하다는 내용이에요. 아빠가 직접 겪으신 일들이 곧이곧대로 신문에 나오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곳에서 정말 많이 노력하고 계신다는 걸 저는 알아요.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쓸 때면 아빠가 일하시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아요. 아빠, 저도 엄마도 아빠를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해요. 무사히 집에 오시길 바라며 매일 기도하는 것도 빼먹지 않고 있고요. 그래서 답장이 얼른 왔으면 좋겠지만, 바쁘시다면 천천히 쓰셔도 전혀 문제없어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 편지가 힘이 되길 바라면서 이만 마칩니다.

○○○○년 ○월 ○일 □□□의 우리 집에서 사랑을 담아,

◇◇◇ 올림

44 이름 없음 (MszdM1kKy6)

2020-09-29 (FIRE!) 22:57:57

안녕, 내 서랍에서 3일째를 맞이하는 공책. 혹은 또 지금 이걸 여기까지 읽은 누군가.

이젠 폭발음이 꽤 가까이 들려. 아마 놈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겠지. 이례적인 속도야. 내가 있는 곳 자체가 위험하기도 하지만.
가능한 이곳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어. 내 은퇴 자금과 연금 모두를 부어버린 나만의 방주이자, 그저 장식으로만 쓰고 싶었던 트로피.

움직이지 못하는 이 잠수함은 퇴역한 핵잠수함을 땅속에 묻어버려서 만든 간이 쉘터지. 공사 비용도 장난이 아니었다고.
흙과 모래의 바다에서 반영구적인 잠항중인 이 늙다리는 더이상 마음껏 움직일 수 없어. 마치 나처럼.

폭발로 땅이 울릴때마다 다리가 쑤셔오고 있어.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지.
살아남고, 여기를 나간다면 그때는 제대로 걸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내 방주는 영영 내 무덤이 되어버리고 말테니.

45 이름 없음 (prTO3HvXEY)

2020-09-30 (水) 00:47:53

안녕, 내 가방에서 3일째를 맞이하는 공책. 정확히 말하면 4일째지만. 공책을 주운 첫날은 읽어볼 겨를이 없었거든.

잠수함은 바닷속에 있는 게 아니었구나. 조금은 아쉬운걸. 잠수함을 타고 심해를 돌아다니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해저 2만리>처럼 말이야. 하지만 모래로 된 바닷속에 잠기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아.
그나저나, 공책 씨는 대체 뭐하는 사람이었길래 잠수함을 방공호로 만든 거야? ...라고 물어도 답은 없겠지만.
공책 씨는 다리가 불편하구나. 하지만 편지가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건 당신이 제법 오래 살아남는다는 뜻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돼. 당분간은 최선을 다해서 본분을 수행해 달라고, 내 정신 건강 담당자.

오늘은 운이 좋았어. 아직 물건이 남아 있는 편의점을 발견했거든. 심지어 전기도 들어와! 덕분에 전자레인지도 쓸 수 있었어.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이런 때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갖고 있던 라디오는 고철덩어리가 된 지 오래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기계공학을 미리 배워둘 걸 그랬어. 공책 씨의 방공호에는 라디오가 있으려나? 어쩌면 최신식 스피커를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지. 홈시어터까지 겸해서 말이야.

추신. 매번 공책 씨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아? 오늘은 당신을 뭐라고 부를지 생각하다 자야겠어.

46 이름 없음 (dnYGvyPu0M)

2020-09-30 (水) 01:54:28

기록부 서류/2037_4786
2037-01-26|A-O8구역 격리.
2043-05-02|A-08구역 선발대 투입.
2043-08-07|A-08구역 D_45에서 Downfall 현상 발생. world outer 이용해 shutdown을 시행했으나 12명의 사상자, 30명 정도의 부상자, 5명의 변이자 발생.
2043-08-08|nihilism의 주입을 통한 idea 생성으로 오염을 해결하고자 A-08구역 D_45에서 nihilism을 3시간 가량 오염지역에 투사함. 결과로 오염 지역의 87%에서 idea가 생성되었고 3명의 변이자가 회복됨. 13%가 복구되지 못한 이유로는 원래 예상대로 sabotage의 발생으로 인한 matador로 생각됨.
2043-08-09|A-08구역 D_45의 Downfall 억제를 위해 anchor를 내려 perception freezing을 의도, 성공적 동결이 가능했음.
2043-08-18|선발대, 연구원, 치료중인 환자를 가리지 않고 일부가 환청, 환시를 호소함. 로렌샤흐-플랑크 벡터 고정을 이용해 대증적 치료를 시행, 성공적으로 치료됨.
2043-08-20|상부의 명령대로 A-08구역에 자율신경연동 인공지능 Libero를 전체에 설치하고 새로 도입한 공간감적 상층차원연결망 통신도 원활히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함. 앞으로 상부의 명령과 메뉴얼에 명시된 긴급상황을 제외하면 관측적 연구만 허가함.

47 이름 없음 (WgV9dUcE5.)

2020-09-30 (水) 01:56:37

안녕, 내 공책... 아니. 바라건대 살아남아서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누군가.

일이 생각보다 더 심각해졌어. 전쟁이라는 것이 물론 쉽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끝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이런 건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했는데. 이젠 본토에 대놓고 미사일이 내려찍니 어쩌니를 다투는 상황이 되었다. 아마 그걸 대비해서 미사일 기지들도 안테나를 쫑긋 세우고, 언제든 포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겠지.
불쌍한 병사들은 그걸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목숨을 내던질거고.

어쩌면 이, 불안감을 피해보려 매달린 공책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자, 후대에 남길 기록이 될 지 모른다는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부디, 그저 다락방에서 찾은 할아버지의 낡은 일기장 정도로 이 공책이 썩어가길 바라며 글을 남기기 시작하겠다. 이제부터 말투가 좀 딱딱해질지도 몰라.

서기 20(무엇인가 액체가 묻어 알아보기 힘들다), 양력 9월 30일.
우리 나라, 아니 전 지구는 전쟁 중이다.
이건 지구인들끼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이 물론 비극적이지만, 난 차라리 비극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6공병대대 소속, 아니 소속이었던 서바울 예비역 원사다.
인류는 침공당하고 있다. 별들 저 너머의 존재로부터.

지구를 좀 적당히 반짝이게 했어야 했는데. 제기랄.

48 이름 없음 (UY/ROar1/6)

2020-09-30 (水) 12:03:11

제발 멍청한 짓 좀 그만해라 동생아.
그 혁명인지 뭔지 나는 관심도 없어.
네가 우리 집에서 살아오며 가진 기성세력들에 대한 증오도, 권력에 대한 혐오도 나는 다 이해해. 그렇지만 넌 내 동생이잖아. 혁명가 이전에 내 동생으로서 빠져나와 줄 수는 없는거니?
-형 다니엘.

49 이름 없음 (prTO3HvXEY)

2020-09-30 (水) 12:57:24

(여기저기 정체모를 얼룩이 묻어 알아보기 힘들다)

안녕, 드디어 정체가 밝혀진 공책 씨.

밤새도록 고심한 끝에 멋진 이름을 지어냈는데 바로 다음 장에서 이름이 밝혀지다니, 이러기 있기야? 서바울도 나쁘지는 않지만 지난밤이 헛수고가 되어 버린 건 조금 슬픈걸.
참고로 어제 지었던 이름은 윌슨이야.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따왔어. 만약 이 공책을 잃어버린다면 나도 톰 행크스처럼 엉엉 울어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 가방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는 하지 말도록!

당신 편지를 읽다 보니 시기가 대충 언제쯤인지 짐작이 가네. 오늘은 서기 20██년 10월 7일, 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일 째야. 근데 사실 아닐지도 몰라. 중간에 날짜를 하루이틀쯤은 빼먹었을 수도 있거든. 달력도 없는데 날짜를 세는 건 생각보다 힘들더라고.
처음에 전쟁 얘기를 들었을 때는 오보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야 그렇잖아?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출근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일상을 보냈는데 갑자기 우주 전쟁이라니. 이럴 줄 알았다면 <스타 워즈> 시리즈로 예습이라도 해둘걸.
그런데 지금은 또 여기에 익숙해져 있어. 빈 가게에 들어가 음식과 생필품을 챙기고, 반쯤 무너진 집에 기어들어가 잠을 청한다는 건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텐데.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사는 와중에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면 조금 우울해져.

추신. 방금 이 책을 펼쳐두고 통조림 뚜껑을 땄더니 소스가 온 사방에 튀었어! 책에도 몇 방울 묻었잖아, 젠장.

50 이름 없음 (dlHT7A1rDk)

2020-09-30 (水) 22:28:31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엔 네가 눈치가 너무 빨랐고 거짓말을 못했어. 정말 더럽게 못했어.
복잡한 건 다 내가 가지고 가. 그러니까 앞으로 넌 그냥 살던대로 살아.
이걸 쓰는 지금에야 네게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뭘 해보기엔 너무 늦었지. 상관없다는 마음이 앞서기도 하고.
나 이제 가. 잘 지내. 덕분에 오랜만에 재밌었어.

51 이름 없음 (TjQ5DPr/02)

2020-10-02 (불탄다..!) 10:36:16

엄마에게

매일 밥상머리에서 할 말 못할 말 다하다가 갑자기 편지를 쓸려니까 영 이상하네. 연필같은 거하고 인연이 없는 내가 어머나 세상에? 편지를 다 쓰고 있다면 그건 전부 엄마 때문이니까 자랑스러워 하라고~. 여하튼 오늘은 엄마한테 꼭 털어놓을 말이 있으니까. 난 들을 말 없다 성가신 아들놈아. 어쩌구. 평소처럼 이러지 말고 끝까지 읽어 좀.
사실은 나는 엄마 아들이 아니야. 지금껏 속여서 정말 미안했어. 젠장. 그런데 이렇게 오래 숨기려고 처음부터 맘먹은 건 아녔다고. 그럼 내가 누구냐? 아무도 아니야. 길거리에 아무데나 발로 차면 차이는 전쟁고아들 있지? 많지? 내가 그 중에 하나야. 하나였다고. 엄마 아들이 되기 전에는. 뭐시냐. 거짓말 한 데도 독한 의도 따위 거 없었어. 이슬 피할 다리 밑 지하도 이런 데나 찾아다니기 질려서 하루 모면해보려고 거짓말했던 거야. 그런데 집은 따뜻하지 엄마 의외로 요리잘하지 엄마가 성깔 드러운 욕쟁이에 험악하고 다혈질이기는 해도 죽 잘 맞지 같이 지내는 게 어느샌가 즐거워져버려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어.
편지 읽고서 다리몽둥이 운운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만~. 제때 떠나기로 해서 망정이지. 나는 여기를 떠나기로 했어. 끝까지 읽길 잘했지. 이건 작별 편지라고. 영영 굿바이 바이바이 포에버라고 이제.
엄마가 불쌍하더라고. 내가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내가 진짜 아들은 아니고 될 수도 없고. 팔방미인 아들인 척은 잘해도 못하는 거쯤 널리고 널렸다고. 이러니저러니해도 엄마는 사실 착하다는 거 알고나니까 더 속이기 싫어졌어. 아들이 아니면 그때 말했던 자세한 얘기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고 있겠지. 시시하겠지만 눈치로 때려맞추기였어. 내가 엄마 만나기 전까지 쳐먹은 게 눈칫밥밖에 없었는데 그걸 못하겠어? 거기다 안 그래보여도 엄마 감성은 쓸데없이 풍부해서 생각하는게 다 보인다고. 십대 소녀냐고 아줌마 주제에.
자~. 이제 내가 하고싶은 말은 다 했어. 내가 싫겠지. 이제 나타나지 않을테니까 마음 놓고 엄마 인생을 살라고. 나한테 속은 세월이 아깝겠지만 거기에 해줄 수 있는 거는 아무것도 없어. 돈을 좀 모아서 놓고가긴 하는데 월세 밀린 거 내고 집 수리하면 그걸로 끝나겠지. 그래도 언젠가는 돈모아서 꼭 가고싶던 사막으로 여행을 가. 유목민족하고 찐한 연애를 해보고 싶댔나? 그딴 거는 망령된 꿈이니까 포기하시고요. 사실같이 여행가고 싶어서 그때까지 비밀로 할까 고민도 해봤는데 그런데 그럼 썩을 놈에서 죽일 놈으로 레벨업 할 것 같아서 포기했고요.
그러면 마지막 인사야. 엄마. 엄마의 아들로 살았던 시간은 즐거웠어. 정말이야.
...안녕.

아들이었던 ★★

52 이름 없음 (b/rvHNc1XQ)

2020-10-02 (불탄다..!) 11:00:20

이 편지는 172신년 베리타 공국에서 시작되어...

53 이름 없음 (I6ROOUSbBU)

2020-10-02 (불탄다..!) 11:56:49

안녕, 오늘따라 슬픈 공책. 혹은 이걸 읽고 있을 누군가.

미래에 남길 기록이라는 점 때문에 펜을 드는게 점접 부담스러워졌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거긴 해.
놈들은 다행히도 내 방공호는 찾아내지 못하는 것 같아. 땅에 묻어버리기 전에 외벽에 납을 발라둔게 효과가 있었던걸까?

나에 대한 것을 적어둔 페이지를 지워버릴까 잠깐 고민 했었어.
나중에는 내가 서바울이라는 사람이 아니게 될 수 있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만약 누군가 이걸 읽고 있다면, 내게 어울리는 새 이름과 소속을 생각해주면 고맙겠어.

상황. 상황은 먹을거리도, 마실 물도, 전력도 충분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이 다음이야.
지금 이것들도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다 한정되어 있는데, 이게 다 떨어질때까지 저놈들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전혀 처음 보는 체계의 무기들에 대비해서 싸울 군인들만 불쌍하게 되었어. 물론 나중에는 불쌍한 사람들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말겠지만.

다리가 아파. 정확히 말하면 다리가 있던 곳이 아파.
친구들이라도 좀 데려와서 숨을 걸 그랬나 싶어. 벌써부터 외롭다.
다들 살아들 있을까? 그렇다면, 모두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