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 오티래놓고서는, 저녁 되자마자 하는 것은 그놈의 술, 술, 술, 술 파티였다. 아에 주점 하나를 통채로 빌린 것에서 이 술 파티에 얼마나 목숨을 걸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점 특유의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분위기 탓에 가게에서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죄다 묻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왜 저 한 문장만 이리도 선명하게 들리는지. 계속 이어지는 술 파티에 체력이 닳을 대로 닳아 피로에 쩔은 귓가로 파도치듯 철썩 하고 몰아친 가사에 무언가에 홀린 듯 반쯤 마신 맥주를 테이블로 내려놓았다. 저 노래가 뭐더라? 음악은 크게 관심이 없는 카테고리였을 뿐더러 봄을 맞이해 컴백한 가수나 아이돌 그룹이 한둘이 아니다보니 그 많은 노래와 가사가 이리저리 섞여 가물가물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려 했으나 그 생각은 이내 옆에 앉은 여자 선배가 상체를 불쑥 들이밀며 잔에 빈틈이 생기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저 미친 인간이 맥주잔에 소주를 반틈이나 섞었다. 조심스레 킁, 하고 냄새를 맡자 쓰디 쓴 술냄새가 아리게 울렸다. 차마 여성, 그것도 선배의 멱살을 쥐지도 못한 채 어색히 웃고만 있자 앞에 앉은 녀석이 픽 웃으며 내 잔을 쑥 낚아채갔다.
"...어?" "얼굴에 다 보여. 자아, 자, 흑기사 구합니다, 흑기사!"
분명 저 녀석이랑은 옆 과의 녀석일텐데, 언제 우리 과의 테이블로 흘러들어왔는지. 게다가 참 넉살도 좋은 녀석이다 싶었다. 옆에 앉은 여자 선배도 크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아닌건지 양손을 입가에 모으고 와아아, 흑기사 나와라, 라며 소리를 왕왕 치고 있었다.
"다른 과 녀석들 중엔 누구 없냐! 서유진, 서유진 흑기사 구해요! 여자 나와라!!"
...그런데 마지막엔 흑심이 튀어나왔다. 어느 순간 예쁜 여자 나와라!! 나와주세요!! 라며 본래 목적에서 변질된 외침이 소란스러움을 가르고 울려퍼졌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저 말이 정말 싫었다. 반박을 할 수가 없어서. 이루어지기는커녕 뭘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도망친 건 나였지만. 이래서야 내 팔자 내가 꼰 셈이니 제대로 탓할 사람도 없었다. 첫사랑,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동적으로 떠오른 한 얼굴을 술로 몰아냈다. 어차피 옆에는 부어라 마셔라 알코올에 영혼을 판 인간들이 태반이었으니, 나 하나쯤 맥주를 원샷한다고 해서 딱히 신경쓸 사람도 없었다. 이쯤 됐으면 슬슬 괜찮아질 법도 한데, 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냐. 젠장, 생각하니까 또 보고 싶어지네.
하지만, 맹세코 예상하지 못했다.
"서유진 흑기사 아무도 없냐—!!"
저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도, 설마 하며 돌아간 시선 끝에 저 얼굴이 있을 줄도.
삼 년 만에 재회한 상대를 찬찬히 뜯어볼 참도 없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고등학교를 가기로 해놓고 말도 없이 바꾼 건 나니까 죄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는데, 내 착각이길 간절히 빌었다.
근데 저거 저렇게 놔둬도 되나?
언뜻 보기에 제법 난감한 표정이었는데. 그렇다고 내가 나갈 수도 없고. 누가 대신 나서 주지 않으려나, 초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절대로 나만은 눈에 띄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와하하하하, 하며 녀석의 말대로 흑기사 나와라! 예쁜 신입 없냐! 하며 떠드는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개처럼 마시라는 과대의 말은 꺼려졌었으나, 이렇게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주목받는 것도 크게 기꺼운 일은 아니어서, 녀석을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없어, 없어. 예쁜 여자는 아니지만 더 예쁜 내가 마셔야지."
양친 모두 술에 약한 편은 아니기에 나도 술에 크게 약하진 않을 것이다(라는 착각을 했다). 이 정도는 마셔도 될 것이다(라는 착각을 했다). 섞어 마시는 것 쯤은 아까 사이다와도 섞어마셨을 때 괜찮았으니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라는 착각을 했다). 녀석의 손에서 컵을 낚아챘다. 손의 체온으로 미지근하게 달궈진 소맥은 맛도 없고 쓰기만 썼고 양도 많았고, 어쨌든 종합적으로 최악이었다. 그저 좋은 것은 이 분위기 뿐이었다.
"크, 으, 으으으, 맛, 없어!" "그게! 선배의! 사랑이다, 요놈아!"
결과적으로 선배가 넘긴 술은 다 마셨잖아요! 으아아, 그만, 그만 해요! 옆에서 술을 채워줬었던 여자 선배 또한 발딱 일어나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다시끔 와하하, 하고 내가 좋아하는 소란스러운 웃음이 울려퍼졌다. 그게 좋아 나도 따라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였더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를 즐기게 된 것은.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반배정을 훑어보며, 이제 이름도 흐릿해진 어떤 녀석이 없어졌을 때, 그 때 외로워서 무턱대고 사람들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때, 였, 었나, 그러니까, 그 흐릿한 녀석이...
"...응?"
...뭔가, 방금 후닥닥 시선을 돌린 저 녀석의 뒷통수와 닮은 것 같은 느낌이. 아니, 그런데 색이 다른데? 그런데 뒷통수의 이런저런 형태가. 아니아니아니, 그래도 색깔이. 고개를 갸웃갸웃 흔들다 눈을 깜빡이다, 부산스러운 몸짓에 선배가 취했다고 착각했는지 크크 웃으며 옷자락을 쭈욱 잡아끌었다. 힘없이 그녀의 손에 잡아끌렸다.
"우리 막둥이, 취했으면 잠깐 바람 좀 쐬고와라. 튀지마, 너 혼자 못 들어갈 것 같으니까. 좀 있으면 딴 녀석보도 데려다주라고 할게. 저기, 뒷쪽 출입문 쓰면 딴 녀석들 신경 안쓰이게 나갈 수 있으니까. 복지과 녀석들 테이블 옆을 지나서 쭉 가라." "으, 으브윽, 네, 네."
정신없이 그녀의 말을 뇌 속으로 꾹꾹 집어넣으며, 신발도 내 것 한짝과 남의 것 한짝을 거꾸로 신고(야, 그거 내신발이야! 뒤에서 고함소리가 클클 웃는 소리에 묻혀 들렸다) 비틀비틀 걸었다. 그러니까, 복지과 옆 복도. 복지과 옆 복도. 복지과. 복지과의 저 뒷통수 놈. 알코올이 뇌를 헤집었다. 헤집으며 옛추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술에 절은 발걸음은 어느새 아까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그 녀석의 앞에 내 몸뚱이를 집어넣었다. 다짜고짜 들이닥친 웬 낮선 취객을 보는 복지과 학생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녀석의 헐렁한 후드를 쭉 잡아당겼다.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애를 쓰다가 정작 내 앞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대뜸 잡아당겨진 후드에 목이 졸려 켁,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뱉은 것도 잠시, 훅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숨을 멈췄다.
서유진.
그간 떠올리는 것조차 애써 피해 왔던 얼굴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머리와 달리 눈은 바쁘게 이곳저곳을 훑었다. 생각보다 막 그렇게 많이 변하지는 않았네. 키는 여전히 네가 더 크고. 머리는 기른 건가. 내가 아는 너와 내가 모르는 네가 마구 뒤섞였다.
그리고 결국, 깨달아버린 것이다.
네 눈은 변함없이 어두운 연둣빛이라는 걸.
"어... 안녕?"
후드를 잡은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쓰레기 같은 짓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먼저 연락을 끊어 놓고서 만나자마자 인사랍시고 건네는 말이 안녕이라니.
갑작스러운 난입에 당황한 복지과 테이블에서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저 뒤에서 방금 전 애타게 흑기사를 찾던 선배들이 야야, 쟤 취했다! 그러길래 그걸 왜 먹여! 따위를 외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친 뒤 황급히 녀석의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주점 밖으로 뛰쳐나가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2월 밤의 찬 공기가 알코올에 잠긴 머리를 식혀 주었다. 그때까지 꽉 쥐고 있던 손목을 그제야 놓으면서 계면쩍게 웃었다.
"그... 오랜만이야."
당장에 혀를 깨물어 버릴 뻔했다. 오랜만이야가 뭐냐, 오랜만이야가. 당연히 오랜만이지, 네가 도망갔으니까! 당장에라도 쥐구멍을 파고 싶은 심정이었다.
묘하게 기분이 들뜬 것 같긴 했지만, 그와 반대로 몸은 홧홧히 달아올랐고 목구멍은 시큼했고 다짜고짜 붙잡혀 당겨지는 손목은 저릿했다. 무엇보다 이미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갑자기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처럼 머릿속을 쾅쾅 때리며 뒤집는 덕택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시야마저 흐릿해지는 것 같아 눈을 부볐으나, 이내 찬 바람이 불어와 눈과 머리를 괴롭히는 무언가를 쓸어버리고 흩어졌다. 한층 선명해진 시야를 깜빡깜빡 했다. 이래서 밖으로 나가는걸 권유하신 거구나.
"그... 오랜만이야."
...지금 이 새끼가 무슨 말을 한거지? 그래, 아까 주점에서 녀석이 어물어물 안녕인지 나발인지 인사를 한걸 들은 것 같은 기억이 조금 날락말락 하기도 했다. 다만 주점 안의 밀폐된 공기 탓에 정신이 헬렐레 했었고, 주위 소리도 시끄러웠고, 술에 절어있었기 때문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걸 이렇게 확인사살까지 날려주다니. 어이가 달나라까지 날아갈 것 같았다.
"...지금 내 표정이 어때보여?"
아마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표정일거다. 왜냐면 내 기분이 그러니까. 에라이, 하며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헝클러뜨렸다. 낡은 머리끈이 뚝 하고 끊어졌다. 안그래도 온 몸이 홧홧하건만,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덮어 더 신경질이 났다.
아, 하하, 하. 뒷목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금 표정 말이죠. 날 잡고 누구 하나 족치지 않으면 성에 안 차겠다는 표정인데요. 그리고 그 누구는 아무래도 나인 듯했다. 물론 입이 찢어져도 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미안해."
이럴 때는 선제공격이다.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연락 끊은 것도, 잠수탄 것도, 정말 미안해. 네가 싫어서 그랬던 것도, 뭔가를 잘못해서 그랬던 것도 아니야. 그냥..."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냥, 뭐? 어떻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
너를 너무 좋아했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 우리 둘 다 남자잖아. 게다가 너는 나를 친구로밖에 보지 않았고. 차라리 가망이라도 있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본심을 숨기고 너랑 계속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도망쳤어.
—라고.
"...미안해."
결국 고개를 푹 수그리며 웅얼거리다시피 말을 흐렸다. 신발 앞코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코끝이 아렸다. 하 씨, 나쁜 건 난데 왜 눈물이 나는 거야. 나는 너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려본 적이 없으며, 애초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비참했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