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합은 연례 행사로 여겨지는 듯 싶었으나 파급력은 컸다. 간단하게 지금까지의 정책으로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회의를 하는 듯 싶다가도 어느새 한 쪽의 이득을 위해 긴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귀족의 권리냐, 혹은 황제냐. 둘중 한 쪽이 이기면 그들은 서서히 세력을 불려나간다. 회합은 황제의 앞에 내놓을 정책을 논의한다는 명분 하에 큰 이득을 가지고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자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득을 챙긴 사람 중에는 당연히 도미닉 후작이 존재했다. 딱히 무어라 평하지 않아도 최근 그의 안건으로 인해 마정석의 유통경로가 제한되며 꽤 많은 이득을 챙겼을 것이다. 제 아내의 사치스러운 장신구가 나날이 늘어나는 것을, 그리고 소네타가 아카데미 내부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을 보면 같은 귀족파도 그가 이득을 얻어내는 것에 혀를 내두르곤 하였다.
오늘도 도미닉은 어떻게 해야 귀족들의 세력을 키우고 자신의 입지를 더 다져 다른 세력의 사람들을 짓눌러야 할지 나름 고민했을 것이다.
폭군이라 불리는 공작이 참석하기 전까지는.
도미닉은 동요하는 주변 귀족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비추지 않던 자가 어찌 이 곳에 온단 말인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파중 가장 위험한 자가 이 자리에 참석한다면 그 파장은 자신조차 감당하지 못할 것인데도. 도미닉이 입술의 속살을 짓씹었다.
"이런!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동안 참석하시지 않으셨기에 무슨 일이 있으셨나 싶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눈치가 없는 자는 아니었다. 도미닉은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걸어두었다. 그동안 참석하지 않아놓고 이제 오는 건 무슨 연유인가. 라고 해석해도 좋을법한 귀족들 특유의 화법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주변 귀족들이 슬슬 그의 눈치를 보았다. 맞는 말이었지만. 도미닉은 눈이 마주치자 슬쩍 테이블 밑의 주먹을 새하얗게 쥐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넌지시 인사를 건네는 후작, 공작은 그의 인삿말에 묘하게 날이 돋쳐있으며, 그 밑바닥에는 공포가 깔려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의 행보는 마치 악마, 아니 그 이상과도 같은 것이라서, 많은 이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눈치가 빠르면 빠를수록 공작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지 알아채기 쉬울 테니, 오히려 공작에게 그런 류의 인간은 다루기가 쉬웠다. 인간은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게 본성이니, 공작은 그 본성을 십분 이용하기로 했다.
" 무슨 일이 있기는 했지, 그동안 생각보다 바빴으니 말이오, 그러나 최근 하던 일이 막힌지라, 머리도 식히고 일을 끝낼 실마리도 찾을 겸 왔소. "
그리고 그건 바로 네놈이다. 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매서운 눈매와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후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최근 마정석을 수입하는 데 상당히 많은 제한이 생기지 않았소? 당연히 마법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물건이니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런 점에서 후작의 안건은 꽤나 효과적이던데... "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감았다.
" 이 면제 조항이라는 것은 꽤나 흥미롭더군, 후작. "
그 말과 함께 수입 조례, 그 중에서도 마정석에 해당하는 부분을 펼쳐 든 공작은 예의 그 깔보는 눈빛으로 후작을 응시하며 다시 한 번 미소지었다.
그 면제 조항이라는 것은.. 마정석 수출입 시에 붙는 어마어마한 세금이 특정 무역관을 지나게 되면 통행세만 지불해도 좋다는 것. 그리고 그 무역관은... 대부분 스노우디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조항에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결국 그 통행세는 황실의 재산이 되는 것이니까. 그 과정에서 이문이 남긴 하겠지만 당연한 것 아닌가?
다른 이들은 후작이 그저 공작의 심술에 걸려들었다고만 여겼으리라.
그가 품에서 슬쩍 꺼내 올려놓은 양피지의 정체를 모르니 말이다. 그것은... 통행증이었다, 후작의 친필 서명이 있는 통행증, 통행세를 면제해주는 물건, 본래라면 통행증은 외교성에서 처리했어야 할 테고, 담당하는 귀족도 따로 있지만..
" 설명해주었으면 좋겠구려. "
양피지는 위화감 없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눈치가 어지간히 빠른 이가 아니라면 그게 언제부터 놓었는지 모를 정도로.
빌어먹게도, 도미닉의 두 눈동자가 슬그머니 다른 곳을 응시한다. 아무리 긍지 높은 귀족일지라도 특유의 오만한 눈동자를 더 마주했다간 자칫 이성을 놓을지도 몰랐다. 슬슬 상대를 돋구는 것 같았기에. 도미닉은 사람 좋게 웃던 미소를 떼지 않으려 애쓰는지 주먹을 더욱 세게 쥐었다.
"그러셨군요, 이런, 공작님의 노고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합니다."
힘들게 삽질만 하시는 군 그래. 도미닉은 그런 의미를 담아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설마 들켰을리가 없잖은가. 설마.
"아무렴, 마탑의 연구에도 도움이 되니 가벼울리가 없지요. 하여 제가 안건을 낸 것입니다만."
부러 중립인 마탑까지 언급하며 도미닉은 슬슬 입술을 다물었다. 마탑까지 피해를 줄 생각은 아니겠지? 같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미닉이 입술을 깨물었다. 면제 조항. 젠장, 휘말린 기분이 들었다.
"...."
마정석을 수출입하는 세금을 제하고, 통행세는 스노우디아로 연결한다. 그렇기에 가장 높은 세금이 붙는 물품중인 하나인 마정석을 자신의 영지로 하여금 유통하게 하고, 그의 상단에겐 통행증을 부여해 이득을 취하는 것. 도미닉은 지금까지 그 방법으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취했는가!
".....하하!"
그렇지만 눈 앞의 남성은. 빌어먹을 황제의 개는, 지금 통행증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 쥐새끼가 정보를 흘린 것인가? 도미닉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도미닉은 통행증을 담당하지 않았다. 형평성을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그의 친필 서명이 있었다는 것은.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공작님. 제가 어찌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위조. 혹은 매수.
"제가, 아무리 귀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이 나라의 태양이 위에 계시지 않습니까. 어찌 제가 고귀한 뜻을 악의적으로 써먹겠습니까, 공작님."
주변의 귀족들이 슬 기싸움을 눈치챘는지 입을 다문다. 귀족파도, 황제파도 선뜻 나서기 힘든 문제였음은 당연했다. 어찌 보면 각 자리의 수장이 맞붙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도미닉이 주먹을 꽉 쥐자 옆자리에 있던 귀족이 시선을 피했다. 도미닉의 가면이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감히 이종족 주제에 사람을 이리 저울질 하다니. 도미닉의 두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왔다. 이대로라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의심을 거두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몇 귀족이 양피지에 관심을 가지자 도미닉의 눈이 서슬퍼렇게 빛났다. 머리를 굴리는 것 같았다.
늦어도 하나는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파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전에, 스노우디아 가문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거나, 아니면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질 것이다. 그것 만큼은 안 됐다!
만약 가문이 망한다면 사랑하는 아내는 자신을 버리고 본가로 돌아갈 것이다. 데뷔탕트를 앞둔 아우로라와 마법사가 되고 싶어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소네트는? 아, 길가의 거지보다 더욱 구차한 삶을 살게 되겠지! 그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도미닉이 일순 몸을 떨었다. 살기에 질렸는지 입술을 꽉 깨문 도미닉의 안색이 창백했다. 한참동안 도미닉은 침묵한다. 주변의 귀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쉴 동안에도, 공작이 말을 꺼내는 순간에도 도미닉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회의 할 안건은 없군 그래. 이번 회합은 마치도록 하지. 부디 이번 데뷔탕트에서 만나길 바라네."
그리고, 그가 회장에서 나간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숨을 가다듬더니 나직하게 이르곤 자리를 떴다. 귀족들은 잠시 그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다 "하필 걸려도 폭군에게 걸렸구만." 따위의 말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제각기 흩어졌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공작님."
기어이 쫓아오는 것은, 역시나 도미닉이었다. 도미닉은 불안감을 눌러담으며 한 글자 한 글자 겨우 씹어뱉듯이 말했다.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뭐 길든 짧든 큰 상관은 없긴 해도. 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공작이 아직 복도에서 빠져나가지 않았기를 바란 모양인데, 발걸음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공작은 돌아섰다. 아니나 다를까 발소리의 주인은 후작이었다, 공작은 후작의 표정을 보면서 옅은 미소를 띄웠다, 영악한 귀족답게 자신의 앞에 닥친 상황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듯, 간신히 내뱉은 한 문장에, 공작은 표정을 숨길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던 것인지... 소름끼치도록 즐겁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역시 그대라면 이런 선택을 하리라 생각했소, 무모한 자가 아닌 이상 모험을 즐기지는 않을 터이니. "
무엇을 원하느냐...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스로의 턱을 어루만지던 공작은 깔보는 듯한 눈으로 후작을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 그 전까진 나 없이도 적당히 균형이 유지되길래 회합까지 가지도 않았소만, 최근에 눈 앞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맘대로 날뛰는 게 눈꼴시어서 말이오. "
정말 그 정도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붙인단 말인가? 공작은 진심인 듯 웃으면서 후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 그대가 다른 귀족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숨통을 끊는 것이 내게는 가장 쉬운 방법이니, 저항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소만 그래야 즐거울 테고. "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내뱉은 공작은 말을 이어갔다.
" 그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대가 귀족파의 수장으로써 내 밑임을 인정하는 것이오, 모든 이들 앞에서 말이지. "
흐음...
" 구체적으로는 무릎을 꿇는 정도면 되겠지. "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귀족이라면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야기였으니, 후작이 쉽게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공작은 미소를 띄운 채로 후작을 쳐다보았다, 과연 그는 받아들이고 영락할 것인가, 아니면 분노에 차 거절하고 가문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인가, 아니면...
복도가 긴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공작이 자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느긋하게 가는 것인지. 도미닉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의 폭군과도 같은 성미를 잘 알고 있는 자였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그의 눈에 들지 않았고,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건만.
몇 번째 욕을 삼키는지 모르겠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즐거운 것인가? 이 상황이? 제국과 함께하였던 4개의 가문중 하나를 짓밟는 것이? 오싹했다. 공포가 엄습해왔다.
"모험을 즐길 정도로 어리석진 않습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말에 도미닉이 입을 다물고 기함한다. 겨우 그 정도로 한 가문을 이렇게 몰아넣는 것인가? 도미닉의 표정은 겉으로는 태연해보였으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보였다.
"...."
제정신이 아니군. 내버려두는 황제도 제정신이 아님은 분명했다. 도미닉은 그렇게 생각했다. 원하는 것이 밑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얄량한 자존심이 그것만큼은 안 된다며 비명을 내질렀다.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됐다. 자신은 귀족파를 대표하는 자였고, 자신이 무릎을 꿇는다면 모든 귀족파가 권익을 포기하고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나을 정도의 처사군. 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아무리 공작님이 흔드실 수 있다 하여도 저희 가문 또한 제국의 건립때부터 있던 가문입니다. 그 공이 찬란한 역사를 지탱하도록 하였으며 지금껏 이어진 바, 명예만큼은 지키도록 해주십시오."
내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른 것을 내어줄터이니,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명백한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그렇게 당당하고 태연하게 표정을 유지하던 이가 지금, 명예만은 지키게 해 달라며 부탁해오고 있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것들은 짓밟아 제 처지를 깨닫게 해줘야 하는 법.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서도, 이 상황에서조차 명예를 운운하며 머리를 짜내 자신에게 협상을 시도하는 모습은 썩 괜찮다, 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 ...... "
이렇다 할 답 없이, 그저 먹잇감이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탈출하려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거미처럼, 그는 미소를 띄운 채 후작을 쳐다보았다. 일말의 자비조차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그러나.
" 확실하게 하는 게 내 좌우명이오, 허나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모습을 보자니 한 번쯤 그 명예란 것이 얼마나 후작에게 중요한지에 대해 흥미가 생겼소. "
그렇게 이야기하며 턱을 어루만지던 공작은 손가락을 튕기며 이야기했다.
" 좋소, 후작이 무릎을 꿇는 건 사적인 자리에서 끝내는 것으로 하지, 아무도 그대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모르도록 말이오. "
선심쓰듯 이야기하는 공작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 후작이 오늘을 쉽게 잊으리라 생각지는 않지만, 나중에라도 그대가 잊어버린다면 큰일이니, 후작의 소유 중 한 가지를 맡아두고 싶은데. "
넌지시 묻는 어투였으나, 분명히 그 뜻은 협박이었고, 담보를 내놓으라는 명령이었다.
" 정확히 무엇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으리다, 다만 후작도 알 것이오, 그대의 명예와 바꿀 만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 "
공작은 후작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을 상상하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같잖은 것을 보낸다면 즉시 움직이리라 생각하니 한 걸음 물러서 주면서도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러면서도 이 영악한 자가 또 어떤 선택으로 즐겁게 해 줄지를 기대하면서, 그는 후작을 응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4가문중 하나다. 그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후세를 위해서라도, 과거를 위해서라도. 그의 미소가 어찌 그렇게 잔인해보이는지. 도미닉의 주먹이 새하얗다 못해 달달 떨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도미닉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협상이 통한 것인가. 그러나 무릎을 꿇는 것은 감수하여야만 했다. 도미닉이 입술을 잘근 깨문다. 자신의 소유 중 한 가지를 맡는다는 것은, 담보를 잡는다는 것은. 도미닉이 머리를 굴린다. 마탑은 분리되어 있기에 그가 손에 쥐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하여 가문의 보배는? 그가 그런 것을 넘볼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
".....알겠습니다."
도미닉이 속으로 절망한다. 섣부른 판단은 이미 그의 뇌를 잠식하고 자리를 잡는다. 명예와 바꿀만한 것은 또 다른 명예가 아닌가. 가문의 명예와 맞바꿀만한, 도미닉의 명예. 도미닉이 고개를 숙였다. 그 누구도 지나지 않고 사용인조차 없는 복도에서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미닉의 자존심이 양 손에 잡힌 깃털처럼 가뿐하게 꺾이는 소리였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바치겠습니다."
새된 목소리에 절망이 엄습한다. 도미닉은 한참동안 무릎을 꿇고있다가, 비틀대며 일어서더니 시간을 뺏어 죄송하다는 핑계를 대며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물러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은 언제라도 무너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좌절을 겪은 도미닉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자수를 놓고있던 아우로라가 그를 맞이했다. 자수를 하다 손가락이라도 찔렸는지 아우로라의 새하얀 손가락에는 붉은기가 어려있었다. 도미닉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에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이렇게 여린 딸을 공작에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용인들은 기함했다. 도미닉이 제 딸들을 끔찍이 아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사랑했던가? 싶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은 소네타가 아카데미에서 한 달에 한 번 집에 오는 날이었다. 도미닉의 우울한 기분을 알아챘는지 프라나가 도미닉을 위로했다. 아우로라, 잠시 방에 가 있으렴. 오늘 저녁 메뉴는 네게 비밀로 하고 싶구나. 애써 웃은 도미닉을 바라보던 아우로라가 조신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올라갔다. 해사하게 웃는 딸을 보자 다시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결정의 때가 오고야 말았다.
"..그렇게 되어, 아우로라를 공작저에 보내게 되었다."
저녁 식사가 무르익자 어렵사리 결정을 내린 것을 고했다. 평화롭던 식사가 산산조각이 났다. 우아하게 칼질을 하던 소네타의 손짓이 멈추고, 프라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냐는 듯 제 남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미닉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우로라는 가만히 스푼을 내려놓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봐요, 당신.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맞아요, 아버지. 어떻게 언니가..." "..."
명예와 바꿀 것은 제 딸이었다. 도미닉의 명예요, 스노우디아의 또다른 명예라 불리는 것. 소네타가 식기를 내팽개치더니 차라리 자신을 공작에게 바치라 하며 아우로라를 안고 울었다. 소란에서 아우로라가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가 이득을 얻는 죄를 범했고, 공작은 아버지를 겁박한 것인가? 머리가 이해를 끝마치자 아우로라는 소네타를 달랬다.
"..소네타는, 열심히 공부해야지. 마법사가 되기로 했잖아." "그렇지만 언니가 없으면 의미도 없단 말이야!" "떼 쓰지 말렴.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르셨으나 나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잘못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란다."
초상집 분위기구나. 아우로라는 담담히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을 꾹꾹 눌러담았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쉽게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것은 아우로라를 옭아맸고, 후작저를 집어삼켰다.
일주일이 지났다. 공작을 더는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후작은 마차에 오르려는 아우로라를 품에 안았다. 소네타는 오지 못했지만, 소네타의 몫까지 프라나가 자신을 안는다. 아우로라가 눈을 내리깔았다. 평소보다 더욱 공을 들였기에 혹여 머리가 망가질까, 드레스의 매무새가 흐트러질라, 조심조심 안는 것이 그렇게도 슬플 수가 없었다. 아우로라는 팔을 뻗어 부모님을 껴안고는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침통한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보나 집사는 이미 손수건으로 눈물을 툭툭 닦아내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 알려지나요, 아버지?" "...대외적으로는, 네가 공작저에 바쳐지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저.."
화합을 도모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을 뿐이지. 그 말이 끝나자 아우로라가 눈을 접어 웃었다. "걱정 마세요. 자주 편지할게요." 라며.
마차 안에서 아우로라는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공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에 몸이 몇 번이고 흘러내릴 뻔 했지만, 그럴때마다 생각에서 빠져 고쳐앉았다. 사실 그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공작이 무섭다고 생각이 될 때마다 마차가 덜컹거려서 상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니까.
..솔로몬 루인 아젤. 황가의 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공작은 아버지가 늘 저택 안에서 다른 귀족과 입에 담고는 했다. 뒤에서 욕을 하는 건 좋지 않음에도. 폭군은 예삿일이요, 저번엔 무어라 했더라. 같잖은 이종족이 감히 인간을 쥐락펴락 하려 든다. 나 쇠로 된 검을 아침으로 씹어먹을 녀석. 같은 말을 했었지. 아우로라의 머리 한 구석에서 공작의 모습이 상상이 되기 시작했다. 쇠를 먹는 날카로운 이와 매서운 눈...큰 흉터와 용인이라는 상상속의 모습..
"앗..!"
덜컹! 하는 감각에 또 몸이 흐트러진다. 그리고 아우로라는 마차가 멈췄음에 의아함을 느낀다. 왜 더 이상 풍경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 아우로라가 문을 열자 마부가 곤란한 듯 아우로라를 바라보았다.
"그게, 마차로 가기엔...너무 가파릅니다. 마침 공작님의 명으로 오셨다는 분들이 계시는데..말이 거칠지도 몰라서.."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어 아슬아슬한 길을 바라보고 용기병을 한 번 쳐다본 뒤, 말로 시선을 옮겼다. 아우로라가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파란 리본이 넘실댔다.
"..그렇지만 공작님께는 가야하지요. 드레스 매무새가 망가지긴 하겠지만...이것도 공작님께서 나름 뜻이 있으신 게 아닐까요?"
아우로라가 해사히 웃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분명 한 편으로는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사님들이 지켜주실거라 믿고 말이죠...." 라면서. 결국 선택은 하나였다.
"...이만 돌아가세요, 마부님. 아버지와 어머니께 저는 잘 지낼거라고 꼭 전해주셔야해요." "하지만 아가씨..!" "저는 괜찮아요. 마법도 쓸 수 있으니까요. 기사님, 저를 말 위에 올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우로라는 상냥하게 웃었다. 마부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는 등, 그런 의미로 쩔쩔매는 것 같자 지은 미소였다. "정말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편지도 할 테니까요. 아무도 마부님을 혼내지 않을 거니 너무 마음에 담지도 말아요." 라고 덧붙이자 그제서야 마부는 고개를 어색하게 숙이며 뒤로 돌았다.
"고마워요, 기사님."
용기병을 바라본 아우로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기사의 손을 잡았다. 딱딱한 건틀릿에 감싸진 손의 감각이 익숙치 않다. 정말 기사님이시네. 완전무장을 한 용기병은 또 처음보는지라, 아우로라는 두 뺨을 발그레 밝히는 것이다. 꼭 책에서 그려진 삽화 같으니, 무지 멋있다고 생각했다. 능숙한 솜씨로 자신을 말 위에 태워주자 아우로라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다. 다른 용기병들은 마부를 도와주러 가나보다.
믿음에 부응하겠다는 말에 아우로라가 활짝 웃었다. 말 위에 오른 용기병은 안장에 매달린 끈을 꽉 잡으라 하였고,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끈을 쥐었다.
"알겠어요."
말은 짧게 울음소리를 내곤 가파른 산길을 능숙히 타고 올랐다. 아우로라가 옆의 숲길을 바라보았다. 마차 안과는 다르게 산들거리는 바람도 불었고, 상쾌한 풀내음이 코를 스치고 지나간다. 마냥 신기한 광경이었다. 차갑지만 화사한 북쪽과는 확연히 달랐고, 말을 타는 것이 익숙치 않았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궁금한 거요?"
아우로라가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두 눈꼬리를 부드럽게 내렸다. 궁금한 것은 많았다. 여기는 사시사철 푸를까? 공작저는 어떤 곳일까? 스노우디아처럼 복작복작할까? 아. 아우로라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푸른 리본이 바람에 나부꼈다.
"..공작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아우로라가 멋쩍은지 뺨을 붉히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무 바보같은 질문은 아니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공작님과 정 반대에 서계시는 분이라서, 공작님에 대해서는 잘 얘기해주지 않으셨거든요."
세간의 평은 썩 긍정적이지 않다고? 아우로라는 다시금 아버지가 다른 귀족과 했던 대화를 떠올린다. 폭군, 망할 이종족. 불과 같다는 말에 아우로라가 잠시 앞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숲길은 새가 행복한듯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그렇지만 공작님이 없었더라면 이런 평화로운 새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겠구나.
"..그렇군요."
반대파에겐 껄끄럽지만 제국 내에서 공작의 존재는 중요하다. 단호함이 공포를 부르고, 따르는 이들에겐 외경을 부른다라. 아우로라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긴, 아무리 스노우디아나 여타 가문이 모인다 해도 공작가 또한 4가문이 아니던가. 그만큼 대단한 사람인데, 파가 다를 뿐이겠지. 아버지의 입장에선 아쉬웠을수도 있겠다. 그래서 더 미워했던걸까?
"후후, 기사님의 말씀으로 대단한 분이시라는 걸 알 것 같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아우로라는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거의 다 도착했다는 말에 아우로라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 대답을 듣다보니 시간이 빠르게 간 것일까? 공작님을 대면하더라도 별 일이 없을 것이란 말이 안심이 되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을 속으로 되내이곤, 아우로라는 조심스럽게 용기병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렸다.
"..와아.."
그리고, 산의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될 정도의 광경에 아우로라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려보냈다. 뭇 다른 귀족들의 저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우로라는 자신을 호위해준 용기병에게 감사하다는 듯 한 손을 제 가슴팍 위에 얹고 눈을 감으며 고개를 가벼이 까딱였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린듯한 중년의 남성에게 예를 갖추듯 가볍게 드레스 자락을 들었다 놓았다.
"반갑습니다. 기사님께서 도와주신지라 무사히 올 수 있어 감사를 표할 따름이어요."
아, 사자의 귀다. 수인일까? 이종족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지 아우로라는 잠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듯 싶었다. 지금까지 만난 수인들은 모두 노예로 쓰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공작저의 사용인으로 만난 것에서 무언가 콕콕 찔리는 것이었다. 아직도 스노우디아는 멀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우로라는 상념에서 벗어나 눈을 휘었다.
용기병은 예를 갖춘 후, 말을 몰아 저만치 멀어져 갔고. 사자 수인은 아우로라의 답을 들은 뒤 고갤 끄덕였다.
"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이야기하며 천천히 앞서 나아가는 사자 수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공작저 주변에 난 길이 여느 마을의 오솔길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작저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기도 했고.. 부러 길을 낸 것이 아닌, 사람이 돌아다님으로써 자연스레 생긴 것처럼, 공작저의 조형물이나 길은 퍽이나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 오솔길의 끝에는 족히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의 돌문이 있었으니, 묘하게 괴리되어 있다고 하겠다.
굳게 닫힌 돌문의 왼쪽에는 설렁줄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사자 수인이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나지막한 종소리가 울렸고, 곧 돌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보인 것은 동굴이었으나. 내부의 크기는 어마어마하여 천장이 까마득해 보이기까지 했다. 동굴다운 울퉁불퉁함이 있긴 했으나, 바닥은 잘 닦여 평평했고, 아이보리 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벽 역시 심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없었다.
신기한 점이라면 발광석 대신 빛을 내는 구체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는 것일까. 그 빛은 자연광과 비슷한 느낌이었고, 덕분에 동굴 내부임에도 눈의 피로가 덜했다.
" 생각보다 크다고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공작님께서 원하실 때마다 조금씩 넓혀왔기에, 아, 응접실은 이쪽입니다. "
어느 정도 걷다 보니 공작저 통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홀에 도착했다, 중앙 홀은 역시 넓었으며, 정면에는 2층으로 오를 수 있는 넓은 계단이 있었고 양쪽에는 공작저를 좌, 우측으로 도는 복도가 있었다. 그 곳에서 사자 수인은 계단의 왼쪽에 있는 방으로 아우로라를 안내했다. 그 와중 아우로라는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이 인간도 있고, 수인들도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정한 비율로.
아무튼, 사자 수인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서면. 아늑한 분위기의 응접실이 아우로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방 가운데에는 네모난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구리, 은, 금으로 만든 작은 종과 간식거리로 좋은 초콜릿과 사탕이 든 병이 놓여있었다. 종에는 손잡이가 달려 흔들 수 있었고, 탁자 옆에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인 수수한 카트 한 대가 놓여 있었으며, 손님이 앉을 수 있는 소파가 주인이 앉을 소파와 마주보고 있었다.
벽 쪽에는 동굴이었음에도 창문이 나 있었으며, 바깥 풍경이 보이는, 신기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 옆에는 찬장이, 그리고 책들이 꽂힌 책장이 있었다.
" 혹시 무언가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탁자에 놓인 종을 흔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편안히 기다려주십시오. "
그 말을 끝으로 사자 수인은 방을 나섰다. 자, 모처럼 얻은 자유시간을, 아우로라는 어떻게 쓰게 될 지...
안내! 아우로라의 두 눈동자가 별이 박힌 것 마냥 반짝거렸다. 과연 어떤 곳일까 싶었던 것이다. 아우로라는 사자 수인을 차분한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여느 마을의 오솔길과 다를 바가 없었다만 자연스레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우로라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다. 마을이 형성되어 있구나. 평화로운 느낌이 들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우로라는 돌문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클 줄은 몰랐는데. 설렁줄을 잡아당기는 모양새와 함께 돌문의 위엄과는 어울리지 않는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후로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은, 글쎄. 아우로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했겠지. 짤랑짤랑, 쿠구궁. 대체 어떤 조합인걸까, 하고 가만히 생각하기도 일순이었다.
"..."
말을 잃었다. 아우로라는 어떠한 감탄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올려 천장을 바라보려 애썼다. 이렇게 넓을 수가 있을까? 동굴다운 울퉁불퉁함이 있긴 했지만 바닥은 반질반질했고, 아이보리 색의 카펫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발광석이 없는 것에 아우로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빛을 내는 구체는 마력으로 만든 것일까? 쨍하니 화려한 스노우디아의 발광석과는 사뭇 달랐다.
"굉장히 크네요..멋있어요!"
아우로라가 수줍게 웃었다. 원하실 때마다 넓혀왔다니. 이질적이면서도 확 와닿는 말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공작의 성격중 하나를 엿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우로라는 역시 넓은 중앙홀을 눈에 담았다. 사용인들은 인간도, 수인도 고루고루 섞여있는지라 아우로라의 호기심과 경외심을 키워나갔다.
아, 정말 달랐다. 신세계를 엿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우로라는 사자 수인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응접실은 제가 상상한 것과 비슷했다. 어느 응접실이 살벌하겠냐만은. 그렇지만 다른 것은 역시 동굴이었다는 점이 아닐까.
"알겠습니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해요."
아우로라는 웃으며 사자 수인이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우로라는 후, 하고 짧은 심호흡을 하였다. 공작저는 굉장히 넓었고, 아직까지 그렇다 할 일도 없었다. 아버지가 걱정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기에 안심이 되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불안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아우로라의 두 눈이 낮게 내리깔렸다.
괜찮을거야. 홀로 중얼거린 아우로라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소파는 푹신해보였고, 찻잔과 찻주전자가 놓인 트레이는 수수해보였다. 초콜릿과 사탕이 든 병에 아우로라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지만 이내 아우로라는 시선을 피했다. 역시, 참아야 했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우로라의 시선이 책장에 꽂혔다. 마법사의 피를 이었기 때문일까? 아우로라는 눈을 잔뜩 빛내며 책장을 향해 종종 걸어갔다. 과연 어떤 책들이 있을까? 한 권 정도는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우로라가 책장을 향해 걸어가 어떤 책이 있는지 살펴 보자니, 대부분의 책은 다분히 흥미 위주인 모양이었다. 단순한 시집이나 소설이 대부분인 책들 사이에, 드문드문 마력 운용법이라던지, 역사서 등이 끼어 있었다. 아우로라가 책을 읽는 것을 즐겼다면 한 번씩은 읽어 봤을 책들이었다.
조금 더 찾아본다면 책장의 위에 간신히 걸쳐진 책 한 권을 볼 수 있으리라. 그 책은 이전에 아우로라가 본 적이 없을 내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은 제국과 드래곤에 대한 전설이 적힌 책이었으니.
그 시각.
응접실을 벗어난 사자 수인은 공작에게 손님이 응접실에 도착해 있음을 알리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복도를 걸어들어가 이윽고 집무실 앞에 도착한 사자 수인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고,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들어오거라. "
공작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리고, 사자 수인이 들어와 예를 갖춘다.
" 아가씨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공작은 그 말에 고갤 끄덕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영애를 보냈단 말이지. 과연 그 아이가 후작가의 명예를 대신 할 수 있을지, 공작은 미소를 띄우고 집무실을 나섰다.
흥미 위주로 모아둔 책일까? 아우로라의 손가락 사이로 책 표지가 빠르게 지나갔다. 단순한 시집, 소설, 아, 이건 읽은 적 있는데. 기사님과 공주님의 로맨스! 음, 옛날 소설이긴 하지만 정말 좋은 이야기였지. 어느 순간엔 비극적이기도 하고, 기사의 그 굳건함으로 위기를 벗어나기도 하고. 아우로라는 다음 책의 제목을 읽어본다.
아, 소네타와 함께 읽어보던 마력 운용법에 대한 책이다. 무언가 슬퍼지는 것 같아서 아우로라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음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역사서다. 황태자로 인해 잠시 입궁했던 날, 근 일주일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읽었던 책이었나?
아.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다.
"어..?"
책장의 위, 간신히 걸쳐진 책 한 권. 아우로라는 책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처음 보는 책이다. 타파이트빛 눈이 올망올망 빛났다. 뭐지? 정말 뭐지? 책 한 권일 뿐인데도 아우로라의 호기심은 이미 세계수를 발견하고 그 용도를 고민하는 마법사와 같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손이 닿을까? 아우로라가 손을 뻗어본다. 아, 역부족이야.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듯이 아우로라가 까치발을 든다. 조금만 더 닿으면 될 것 같은데. 조금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