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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왈츠는 언제 들어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역시 봄이라면 이 노래가 아닐까? 가온이가 노래 선정은 정말로 잘해. 지금도 저기에서 요리를 만들고 있는 가온이를 바라보다가 나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봄을 맞이해서 새로 구입한 연보라색 드레스는 오늘을 위해서 아껴두고 아껴둔 복장이었다. 정확히는 무도회를 하기로 결정한 그 날 바로 구입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입고 왔다는 이야기.
일단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돌아가기도 애매했기에 나는 무도회장 내에서 춤이나 출까 해서 천천히 무대 쪽으로 걸어나왔다. 같이 춤을 출 이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가만히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다들 그래도 즐거워보여서 다행이야!"
두 손을 꼭 모아서 그런 혼잣말을 하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리듬을 타면서 걸었다. 춤을 추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 나로서는 더욱 즐겁고 행복할테니까.
여기저기에 '신' 님들이 가득하시자 역시 한 박자 늦게 감탄의 소리가 작게 터져나왔다. ...제가 처음 보는 '신' 님들도 엄청 많으세요...! 두리번두리번, 홍학 특유의 모습으로 여기저기 돌아가는 고개로 인하여 목 뒤에 묶인 검은색 리본이 하늘하늘거렸다.
모두들 즐겁고 행복해보이는 모습. 봄의 왈츠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서로 대화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는 '신' 님들의 모습은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해도 괜히 자신이 더 즐거워지는 영광 중의 영광이나 다름 없었다. ...저의 '신' 님도 저렇게 행복해하고 계실까요?
문득 생각에 잠긴 채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던 중, 왠지 낯익은 누군가의 모습이 하나밖에 없는 시야 속에 들어오자 잠시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그 존재는 다름 아닌...
"...누리 님?"
놀란 듯 한 박자 늦게 멍하니 두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곧 재빨리 누리 님 앞으로 걸어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리 님. 오늘 누리 님의 옷 씨의 색깔, 너무 예뻐요. 정말로 잘 어울리세요, 누리 님!"
앞으로 리듬을 타고 걸어가는 도중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리스! 애초에 나에게 님이라고 붙이는 이는 얼마 되지 않기도 하고, 리스의 목소리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기에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바로 나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하기도 했으니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리스를 바라보면서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내 옷을 칭찬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러는 리스의 옷이야말로 너무 잘 어울리고 예쁜걸! 아무튼 고마워!!"
기분이 좋아 절로 꼬리가 살랑살랑. 참으로 부드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호를 그리듯... 살랑살랑. 그러다가 꼬리의 움직임을 멈추고서 나는 리스를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리스도 춤을 추러 무대로 나온 거야? 아니면 다른 볼일이 있어서 나온 거야? 다른 볼일이 있다면 도와줄게! 에헴!"
괜히 잘난듯 헛기침을 하면서 나름대로 폼을 잡아보지만 스스로 너무 어색하기 그지 없어서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무안한 감정을 웃음으로 승화하면서 리스를 다시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빠져 무도회장을 걷고 있자, 이내 곧 누리 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누리 님께 다가가 먼저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미소 짓자, 누리 님께서도 미소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도 돌아온 칭찬. 그에 기분 좋은 듯한 미소를 희미하게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꾸벅, 한 번 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정말로 감사합니다, 누리 님. 저도 선물 받은 옷 씨라서 조금 고민했는데... 다행이예요. 기뻐요."
더군다나 소중한 은인들에게서 받은 옷이었으니. 령도, 누리 님도, 모두 예쁘다고 해주자 기쁜 마음에 희미하게 양볼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아, 누리 님의 꼬리 씨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의 끝을 따라서 눈동자를 한 박자 늦게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들려오는 누리 님의 말씀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예 두 손으로 박수까지 짝짝짝, 치면서 마냥 해맑게 반응했다.
"...역시 누리 님...! '신' 님께서는 역시 대단하세요! 멋져요, 누리 님!"
찬양하는 마음과 희미하면서도 해맑은 미소에 거짓이라곤 조금도 없어보였다. 비록 누리 님께서는 무안한 듯이 웃어버렸지만.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에 한 박자 늦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정말로 즐겁게 놀고 있답니다. 령이랑 같이 춤 씨도 추고, 음료수 씨도 같이 마셨었거든요! 정말로 재밌었어요."
자신도 모르게 즐거운 기억을 자랑하듯이 얘기하는 두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이내 누리 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어머. 선물 받은 옷이야? 매우 소중한 옷이겠는걸? 누구에게 받은 거야? 누구에게? 응?"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난 리스에게 그렇게 물어보았다.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이? 혹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버린 매우 소중한 이? 괜히 궁금증이 터질 것 같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다가 내 머릿속으로 울리는 엄마의 '적당히 묻거라' 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꼬리가 바짝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두리번두리번거리자 저 편에서 엄마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식은 땀이 흐를 것 같았지만 꾹 참으면서 애써 웃었다.
"아, 아냐!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신님은 역시 대단하다는 말에 리스도 신이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직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뜩 들어 나는 더 말을 하진 않았다. 아직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으니까. 하지만 꼭 신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말거야!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나는 리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리스는 이미 춤을 춘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고개를 한번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령이? 령 말이야? 령 님이 아니라?"
리스는 보통 신에게 '님'을 붙이는데 령에게는 님을 붙이지 않는 이 변화는 대체 무엇일까? 괜한 궁금증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하다 곧 나에게 돌아오는 질문에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래도 내가 개최한건데 아무것도 안할순 없잖아? 춤을 출까 해서 나왔어! 물론 지금 출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왠지 모르게 자신이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을 선물해준 존재를 궁금해하는 듯한 누리 님의 모습. 그에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하려던 중, 왠지 모르게 누리 님의 꼬리가 위로 바짝 올라가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리 님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깜빡깜빡, 두 눈을 깜빡이며 느릿하게 누리 님과 누리 님의 꼬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자, 어딘가를 바라보던 누리 님께서는 이내 황급히 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얘기하셨다. 하지만...
"...누리 님께서 궁금해하셨으니까... 대답해드리고 싶은 걸요. 이 옷 씨랑 구두 씨는 성당의 수녀님들께서 저에게 선물로 주셨답니다. 언젠간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구해다 주셨어요. 그래서... 네, 정말로 소중한 옷 씨예요."
잠시 따스한 눈길로 자신의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괜히 구두도 몇 번 톡톡, 가볍게 땅을 울리도록 하다가, 이내 이어지는 누리 님의 물음에 한 박자 늦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여기서 그 말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리스와 성당의 수녀가 연결이 전혀 되지 않았으니까. 성당의 수녀라고 하면 인간계에서 기도 드리는 그 사람들 아니야? 그 사람들이 왜 거론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나름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가 나쁜 짓을 했을리도 없을테니까.
"어째서 그 인간들이 리스에게 그런 선물을 줬는진 모르겠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 알았어! 정말로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옷뿐만이 아니라 그 인간들도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주는 옷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금 입고 있을리가 없을테니까. 그렇게 납득을 하는 와중에 곧 리스의 입에서 더욱 놀라운 말이 들려왔다. 친구가 되었다는 그 말. 순간 믿을 수 없어 리스를 두 눈 깜빡이면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에게 존칭을 쓰고 자신을 신보다 낮은 존재라고 칭하던 리스가 령과 친구가 되었어?!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렇지?! 리스가 령과 친구가 되었다는거지?! 그러니까 우정을 나누는 그 친구 말이지?! 정말로 축하해!! 리스!! 아. 아. 그리고... 이미 추는 신들이 가득하잖아?"
이어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주변의 신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미 짝을 이뤄서 춤을 추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리스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네. 제가 예전에 인간계 쪽에서 죽었다가 저의 '신' 님께서 다시 저를 되살려 주셨을 때... 지금처럼 인간 씨의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거든요. 그 때 저를 잠시 거두어서 돌봐주셨던 분들이 수녀님들이셨어요."
정말로 좋으신 분들이예요, 선명하게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 그렇게나 선하디 선한 존재들을 만난 것은 그 때가 거의 첫 경험이었으니. 내리쬐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따스한 무짓갯빛 아래에서, '신' 님의 석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 순간을, 자신은 아마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잠시 깊게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그리고 색이 다른 두 눈을 부드럽게 접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로 좋아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간 씨들이세요. 수녀님들은."
저번에 받았던 세뱃돈을 일부만 남기고 몰래 성당에다 전달하여 보은할 정도로. 하지만 자신이 받은 은혜는 앞으로도 계속 갚아나갈 것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말에 누리 님께서 정말로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시자, 한 박자 늦게 덩달아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 네에... 령과 제가 서로 '친구'가 되었어요. ...사실 '친구'란 게 잘 몰라서... 령과 함께 알아가고 있는 중이예요. 그렇지만 령과 함께 있으면 무척 즐겁고 '행복'해요."
...이것이 '친구'라는 걸까요? 마음이 조금 간질간질, 뭔가 따스한 것으로 가득차고 있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가 누리 님의 설명이 들려오자,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신' 님들께서 다들 춤 씨를 추고 계시네요."
형형색색. 다채로운 색깔들이 가득했다. 그 색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누리 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머뭇머뭇,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큰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마 그 인간들은 내가 아는 것이 맞다면 갈 곳이 없는 이들을 보살펴주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리스를 데려간거구나. 그렇다고 한다면 그 수녀들은 리스가 원래는 동물이었는데 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가만히 리스를 바라보았다. 만약의 경우에는, 그 수녀들이 주변으로 너무 퍼뜨린다고 한다면 나는 고위신으로서 인간들의 기억 속에서 리스를 지울 수밖에 없다. 잔혹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이 신계에 있는 기본적인 규칙이니까.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겠어. 하지만 리스. 일단 묻는 건데, 그 사람들은..그 인간들은 리스가 동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리고 주변에 퍼뜨리고 있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조금은 진지하게 물으면서 꼬리의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니까. 아무튼 그와는 별개로 리스가 지금 행복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령과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다. ...마음을 열 존재를 찾은거구나. 그런 것이 뭔가 기분이 좋아 절로 미소가 지어져서 다시 한 번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 와중에 리스는 나를 가리키면서 춤을 추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가만히 리스를 바라보다가 나는 리스의 손을 살며시 잡으면서 웃으면서 한 마디를 던졌다.
"Shall we? ...엄마는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 했는데 난 좋아!"
리스가 먼저 제안을 했으니 굳이 더 물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리스를 데리고 무대의 중앙 쪽으로 천천히 유도하듯 다가갔다. 그곳은 신들의 중심이었다. 기왕 춤을 춘다고 한다면 역시 중앙이 좋잖아?
누리 님의 꼬리의 움직임이 멈추고 갑자기 조금 진지한 목소리의 물음이 들려오자,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누리 님을 바라보았다. ...누리 님, 갑자기... 어째서죠...? 왠지 모르게 동물적인 본능으로, 지금 이 순간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 위험했다. 금방이라도 다시 죽어버릴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존재의 죽음은 두 가지. 육체가 죽거나, 정신이 죽거나. 만약... 만약, 다른 이들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면, 그것 역시... '죽음'.
"......아... 니요... 그 분들은 전혀 모르고 계세요... 어째선지 저, 되살아난 직후에는 이 날개도 한동안 감춰져서... 수녀님들께서는 저를 그냥 인간 씨로 알고 계세요. 그리고 주변에 퍼뜨리고 계시지도 않아요. 그, 그러니까... 그 분들께서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으시니까... 그, 그러니까..."
횡설수설, 조금 움츠러들어 시선마저 아래로 떨구어 피한 채, 손가락을 괜히 꼼지락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두려웠다. 누리 님께서도 결국에는 '신' 님. 그것도 고위신 님. 자신이 이렇게 그들을 두둔한다고 한들, '신' 님의 지위 앞에서는 자신 역시 한낱 미물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누리 님께서는 이내 다시 웃어보이셨다. 그에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살짝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아예 무대의 중앙 쪽으로 다가간 자신들. 그러나 누리 님의 말씀도, 수녀님들도, 모두 다 계속해서 신경 쓰여 부드럽지만 뭔가 조금 어정쩡한 동작으로 자신의 드레스를 살짝 잡고 무릎을 굽혀 누리 님께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
왈츠 음악은 들려왔지만, 그와는 대비되는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침묵을 지켰다.
리스가 거짓말을 하는지 사실을 이야기하는진 알 수 없었다. 물론 리스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것이다. 신들은 인간들에게 너무 알려지면 곤란하다. 고위신조차도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들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가 계속해서 퍼지고 퍼지고 또 퍼져서 그 존재가 실체한다는 것이 너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면 그 기억을 없애버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리스의 말대로라면 굳이 없앨 필요가 없었다. 리스의 말대로라면 그 인간들은 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미소를 내비쳤다. 나도 리스가 좋아하는 이들을 건드리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신계의 규율이니까. 신이 인간들에게 너무 알려지면 인간들은 신에게 너무 의존하게 되고 우리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즉, 저들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간섭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세계의 균형을 깨뜨리기 딱 좋은 상황이니까.
아무튼 춤을 추기 위해서 무대 중앙으로 다가가는 것은 좋았지만 리스의 표정은 어두워보였다. 방금 내가 한 말 때문일까. 그렇기에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이야기했다.
"괜찮아! 아무것도 안할 거니까! 리스의 말대로라면 건드릴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불안해하기 없기야! 귀여운 옷도 입고 왔는데 뽐내지도 못하면 억울하잖아? 그러니까..."
이어 나는 리스의 손을 잡고 왈츠 음악에 맞춰어서 천천히 스탭을 밟으면서 리드하듯이 움직이면서 웃어보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진실이었다. 애초에 '신' 님께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으니. 하지만... 괜히 작게 꼼지락꼼지락거리는 손가락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야 불안하고 두려웠으니까. 혹시나 수녀님들께 해가 갈까봐. 그것도, 자신 때문에. 은혜를 입어놓고 그 은혜를 갚지는 못할 망정, 피해를 끼친다면... 자신은...
불안함과 두려움에 가득찬 표정은 어두웠고, 쉽게 밝아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비록 누리 님께서 정말로 다행이라며, 다시금 미소를 지어보이셨지만... 그럼에도...
무대의 중앙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족쇄를 찬 것 마냥 무겁게 느껴지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누리 님께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인사를 올리자, 이내 곧 다시금 자신을 안심시켜 주려는 듯이 웃어보이는 누리 님. 괜찮다며, 불안해하기 없기라는 그 말씀에 이어 자신의 손을 잡고 먼저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하는 누리 님의 모습에, 잠시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고 누리 님을 멍한 눈동자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리고 침묵.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신' 님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신뢰를 하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 누리 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네, 정말로 능숙하세요, 누리 님. 역시 위대하신 '신' 님들께서는 전부 다 능숙하신 것 같아서 대단해요. 은호 님께서도 누리 님만큼이나 춤 씨를 잘 추시겠지요?"
조금 망설이다 아주 살짝, 누리 님의 손을 맞잡고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리 님의 리드에, 누리 님의 스텝에 맞추어서.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것이 익숙한 듯, 조금의 삐걱거림도 없이 완벽하게 누리 님의 춤에 맞추어 천천히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말을 해도 괜찮겠지? 엄마가 그것으로 뭐라고 하진 않을테고 엄마도 다른 이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는 편이니까. 일단 엄마에게 배웠다는 것은 엄마가 이론만 가르쳐줬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실전에서는 내가 좀 더 능숙하다. 실제로 지금만 해도 나는 훨씬 능숙하게 잘 추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 하지만 리스도 엄청 잘 추는 것 같은데?
그 리듬에 맞춰서 다시 한 번 스탭을 밟으면서 나는 춤에 집중했다. 리스가 맞춰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리스는 나보다 훨씬 더 잘 추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 역시 왈츠에 집중했다.
"신이라고 해서 뭐든지 다 잘하는 것은 아니야! 가온이만 해도 그렇잖아?"
신이라고는 해도 가온이는 참으로 뭔가 나사 빠진 구석이 있으니까. 미리내에 가서 얼음동상이 되어서 돌아온 것도 한두번이 아닌걸. 슬쩍 시선을 가온이에게 돌렸다가 나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해서 리스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보였다.
"리스는 춤을 얼마나 췄어?"
같이 춤을 추면 대충 느낄 수 있다. 이 신이 얼마나 춤을 잘 추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리스는 아마도 나보다 더 잘추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금만 해도 조금도 스탭이 꼬이지 않는걸. 나는 한번씩 꼬이는 것과는 달리 말이야.
정말로 의외라는 듯, 놀란 듯, 멍했던 두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깜빡깜빡였다. ...하, 하지만 누리 님께서는 은호 님한테서 배우셨다고... 왠지 머리가 혼란스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누리 님의 스텝에 맞춰주는 발동작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완벽했다. 마치 춤 동작이 몸에 배어있는 것처럼.
"...하지만 '신' 님들께서는 거의 다 잘하시는 걸요. 가온 님께서는 그렇게나 넓은 과수원 씨에서 맛있는 신과 씨들을 키우시고, 거기에 관리자 님의 일에, 이런 행사 씨들도 전부 다 혼자서 준비하시잖아요? 정말로 대단하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동시에 도와드릴 수 없어서 죄송해요... 희미하게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하다가 말의 끝에서는 조금 시무룩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다시는 일을 안 시켜주실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기에.
"...네? 저요...?"
그러다 누리 님의 질문이 들려오자 잠시 두 눈을 깜빡이며 누리 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으음, 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얼마나 췄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렸을 때부터 춤 씨를 좋아하기는 했었거든요. 본능처럼..."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음악 소리에 맞추어 추는 춤은 여전히 부드럽지만 능숙해보였다. 이내 곧 빙글, 돌아 드레스 자락을 하늘하늘 날리며 누리 님께 희미하게 배시시 웃어보였다.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신' 님들이랑 춤 씨도 춰볼 수 있게 되어서 무척 다행이라고, 즐겁다고 생각해요. 저는 언제나 론이랑만 춤 췄었거든요."
"가온이는 이 일을 한 것이 한두 해가 아닌걸.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정말로 옛날부터 이런 일들을 했으니 몸에 익은 것 뿐이야...라고 가온이가 이야기한 적이 있어. 그러니까 너무 비교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도와주는 것 여부는...직접 묻지 않으면 모르지 않을까? 하지만 가온이는 그런 것으로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할 거야. 아마도?"
나는 가온이가 아니니까 확신있게 얘기할 수 없지만 내가 아는 가온이라면 아마 그렇게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한다. 가온이는 애초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혼자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이니까. 알파 늑대. 즉 우두머리 늑대였다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난 생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리더는 혼자서 이것저것을 다 해야하니까.
아무튼 춤을 추면서도 리스는 무난하게 내 질문에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춤을 췄다라. 춤을 좋아하는 홍학이었던걸까? 리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리스의 행동에 맞추어서 다시 스탭을 밟고 나 역시 턴을 하면서 돌았다. 물론 리스처럼 완전히 부드럽고 능숙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춤을 춘 것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기도 하고, 이런 곳에서 누군가와 같이 춤을 추는 것은 처음이기도 하고. 그래도 어떻게든 맞춰나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리스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앞으로도 춤을 추자고 다른 신들에게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매번 같은 대상하고만 추면 재미가 없잖아? 리스가 제안하면 정말로 바쁘지 않는한 다들 받아줄거라고 생각해!"
리스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니까 아마 어지간한 이들은 다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받지 않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신이 다 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래도 일단 이야기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리듬에 맞춰서 스탭을 마치면서 춤을 끝냈다. 그리고 리스를 바라보면서 윙크를 하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누리 님께서 태어나시기도 훨씬 전부터... 그렇군요. 그래도 저는 역시 대단하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그 많은 일들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해내신 거잖아요? 정말로 대단하세요. ...아, 물론 누리 님께서도 정말로 대단하시지만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다행이지만..."
희미하게 헤실헤실, 미소를 지으며 '신' 님들을 찬양하다가 이내 조금 머뭇거리듯이 말 끝을 흐렸다. 그래도... 뭔가, 사건이 일어났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마치 저번에 아사 님을 뵈었을 때 느낀 듯한 그 느낌...? ...물론 왠지 모르게, 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던 자신만의 직감일 뿐이었지만.
아무튼 그러면서도 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름답고 우아한 왈츠. 4분의 3박자의 스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물론 누리 님한테서는 조금 어색한 스텝이 가끔씩 나타나곤 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야 그럴 때에는 자신이 부드럽게 받아 넘기면 되었으니까. 춤은 완벽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추는 사람과의 끊임 없는 대화와 소통. 그것이 진정한 춤이었기에.
"...그, 그렇지만... 그러기엔 다들 많이 바쁘실 것 같아서요. 가온 님이랑 아사 님이랑 령은 관리자 님이시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