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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혀있는 홍보 내용도 좋고 다 좋은데 왜 쿠키 영상이 1시간이나 되는 것이더냐? 이 홍보 영상."
자꾸만 웃음을 터뜨리는 령의 모습을 지그시 곁눈질하는 이가 있다면 사우 말고는 없었다. 잘 갈아놓은 도끼를 품은 것처럼의 눈빛이 령의 웃음기를 응시하는 것이, 마치 어디를 도끼질할까 궁리하는 미친 나무꾼의 바라봄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별다른 말을 뱉어내지 않았다. 그 웃음이 사그라들 때까지 그저 한숨만 한 차례 푹 꺼트렸을 뿐. 무엇이라 말하는 순간마다 웃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을 눈치채었던 것이다. 미끼를 자꾸 던져줄 필요는 없었다. 할 생각도 없었고...
"그래, 자안뜩 고마워해라!"
곧바로 그 다짐을 깨버리는 자신의 멍청한 입을 사우는 원망해야만 하였다. 삿갓을 푹 눌러쓰고선 잠깐동안 신음질을 했다. 그러다가 도로 얼굴을 드러내면서 속에서는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침묵하고 있었어도 그러는대로 저 흑조 신은 비웃었으리라(어폐였다), 라고.
"아아...그렇다면 약 한 달인가. 인간계의 시간으로 친다면."
눈동자를 위쪽으로 하며 사우는 잠깐 고개를 비뚝였다. 그러다가, 자신 또한 그에 관한 답을 돌려줘야겠다 괜히 여기면서 "난 한 몇 백 년은 됐어. 세진 않았고."라고 첨언해내더라.
그는 눈밭에 파묻혀있던 자신의 얼굴을 빼올리며 느릿한 말소리가 들린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차가움이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났기에 손으로 툭툭 얼굴에 묻어있는 눈뭉치를 털어낸 뒤 뻗어진 작은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미안하군, 꼴 사나운 모습을 보였으니."
좀 더 주의를 가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거라 덧붙인 그는 자신의 옷에도 묻어있는 눈뭉치를 툭툭 털어냈다.
"아."
그는 춥지 않냐고 물으며 크림색 목도리를 내미는 작은 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미 오랜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 추위에는 적응했다며 붉게 달아오른 코와 귀를 감추지 못하는 작은 신은 그가 보기엔 전혀 추위에 적응한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그녀처럼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지는 않았으니까.
"괜찮다, 이 정도 추위야 추운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건넨 목도리를 받아들고서 되려 그녀의 목덜미에 감아준 그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듯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좋군, 그나저나 수시로 이렇게 눈이 쏟아져내린다니. 어디 보강이 필요한 것 아닌가. 분명 이 지역의 관리자는 세설이었을테지..."
턱을 짚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도 인사를 건네는 작은 신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본 그는 저도 특유의 양 팔을 크게 휘둘러 망토를 펄럭이는 자세를 취해보이고선 인사를 했다.
"그래, 인사가 늦었지. 나는 밤프, 가리의 관리자다! 너는 듣자하니 이 곳에 오래 산 주민인 것 같다만 이름을 알 수 있겠나?"
푸흡! 령은 또 위기를 맞았다. 아니 하필 나온 말이 "그래 자안뜩 고마워해라!" 일게 뭐람. 덕분에 령은 다시 팔로 제 입을 막아버려야 했다. 더 이상 웃지 말자, 웃지 말자 했는데도 자꾸만 새어나오는 이 웃음이 원망스러웠다. 사우는 제가 감당해내기엔 너무나도 귀여운 신이었다. 결국 령은 입을 열어 이렇게만 말해야했다.
"너 너무 귀엽다."
저가 잘못한 게 아니라 이 신이 귀여운 것이라고 합리화를 해본들 소용이 없었다. 보나마나 사우는 불쾌해하겠지. 령은 그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귀여운 걸. 이 꼬마의 모습을 취한 신은. 령은 겨우 제 자신을 추스리고 생각을 갈무리하였다.
몇백년. 령은 그 수많은 세월의 흐름에 숨을 멈춰야만 했다. 신들이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에 해당되는 사례를 실제로 보니 엄청난 시간의 압박에 무릎이라도 꿇어버릴 것만 같았다. 령의 눈이 반사적으로 크게 뜨였다. 몇백년이라... 자신도 그만큼 라온하제에서 길게 살 수 있을까?
"몇백년이라... 대단하구나, 사우는."
령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저보다 오랫동안 라온하제에 거주한 사람에 대한 예우였다.
저 자신도 새하얀 눈 속에 파묻힐 뻔 했다는 부끄런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은 채, 그녀가 살풋 미소를 지어내며 대꾸했다.
제 손으로 통해지는 무게감에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만, 그마저도 익숙한 듯 그녀는 태연히 중심을 잡으며 제 자리에서 몇 걸음 비틀댔다. 분명 아주 크고 거대한 나무였건만, 어째서 제 육체는 이리도 작고 나약한지 알 수 없을 길이었다. 되려 제게 목도리를 감아주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던 그녀는 보강이 필요할 것같다는 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내더니 새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 이쪽 지역이 아니라면 안전할테지만...,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
다만, 그녀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큰 동작을 내보이며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그의 행동에 연은 두 눈을 두어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느릿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나긋히 제 이름을 흘려냈다.
" ...저는 연이에요. 이 지역에서 그렇게 오래살진 않은 것같지만, 아마도... 가리의 관리자님이셨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
짧게 인사를 건넨 연은 혹여나 다시금 눈사태가 일어날까 새하얀 빛으로 물든 언덕 주위를 몇 차례나 두리번대더니 눈송이가 조금 묻어난 목도리를 고쳐두르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 다시 눈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네요. 이왕 오신 거, 이 곳 구경 좀 하고 가실래요? 저는 미리내의 주민이니, 도움이 될 지도 모르니까요. "
어딘가 확실치 않은 말투는 그녀의 버릇이자 특징이었다. 말을 마쳐낸 그녀는 제 발 밑에 한움쿰 쌓인 눈뭉치들을 휘적이며, 밤프의 결정을 기다리기 위해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르는 것도 문제는 아니지, 비록 관리자라 하였으나 그 직책을 떠맡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니까 말이야."
걱정스러운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말 없이 지켜보며 그는 자신의 머리위에 솟아난 더듬이 두 가닥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아까전 눈과 함께 쓸려내려올때 조금 망가져버린 것일까? 그러고는 다시 눈이 쏟아져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인가..."
그리곤 확실치 않은 말로 이 곳을 둘러보지 않겠느냐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동행해 길을 안내해주겠다는 투의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다! 본디 원래의 목적도 이 곳 미리내를 자세히 조사해보자는 생각으로 이 곳에 온것이었으니 동행인이 한 명 늘어난다해서 나쁠 것 없지!"
아아,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 사우는 입을 완전히 닫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그 희둥그런 모양새를 점차 게슴츠레하게, 눈꺼풀을 내리다가 완전히 접기 직전에 도로 원래의 모양새로 떴다. 다름이 아니라, 무엇이라 반응해야할지 몰라 일단 놀라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하기야 그렇지. 너 너무 귀엽다. 라니. 역린이라면 역린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노성을 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도 황당하였던 것이고. 그런데 그 행동이 몹시도 어린아이스러운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니던가? 사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침내 열었다.
"....아, 아라의 바다를 더이상 못 보는 수가 생긴다!!!"
도대체 세상에.
아무튼 좀 뒤에 사우가 한 손을 살짝이 흔들었던 것은 령이 무심코 두 손을 모았을 무렵이었다. 그러던 손으로 삿갓 챙을 살짝 누르고 숨을 뱉어내듯이 말도 따라 보냈다.
"...대단할 것 없어. 그냥 오래 있었을 뿐이니까. 령이 너도 앞으로 계속 눌러 앉는다면 그 세월 차버리는 건 금방일걸? 게다가 신끼리 세월로 위아래 논할 것도 없잖아."
신격을 정하는 건 고위신이냐, 아니냐 정도이니까. 덧붓이며 고개를 돌려보인 사우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소탈한 웃음이 옅게 퍼져 있었다.
아라의 바다를 더는 못 보는 수가 생긴다니. 어찌 이리도 협박까지 귀여울까. 령은 결국 큭큭과 끽끽의 중간쯤 되는 소리를 내며 한바탕 웃어버렸다. 아 너무 귀여워. 수백, 수천년을 산 신이 이렇게 귀여워서야 되겠는가? 령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하, 진정하자. 진정. 정말로 아라의 바다를 못 보게 되는 건 슬프니까. 그렇지만 이 아이가 귀여운 걸 어떡하라구.
"미... 미안. 네가 너무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나와."
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답을 하였다. 아직도 입가에 웃음기가 가지 않았다. 령은 아라로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신하고 친해지고 싶어! 령은 그리 생각하고 다시 표정을 무표정으로 돌려놓았다.
앞으로 오래 살다보면 그 세월이 금방 차버린다라... 일리있는 말이었다. 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같이 오래 사는 신에게 세월의 흐름은 별 것도 아닌 법이었다. 게다가 고위신이냐 아니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 나이나 얼마동안 있었다는 사실이 무쓸모하게 변하는 것은 더더욱. 령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정말 그런 것일까?
"네 말이 맞아, 사우. 하지만 한 곳에서 그렇게나 오래 정착한 것도 대단한 일인 걸? 나는 오랫동안 떠돌아다녔거든."
인간계든 신계든 관계없이 말이지. 령이 눈을 내리깐다. 검은 눈동자가 유독 더욱 어두워보였다.
주위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모를 법도 했다. 정신은 애꿎은 곳에 가있었으니 제 주변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 살고 있었더라. 다만 잡생각도 잠시, 제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작은 발걸음을 내딛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제 발목까지 쌓인 눈을 푹푹 밟아내며, 새하얀 도화지에 발도장을 찍듯 선명한 자취를 냄겨냈다.
" 사실 이 북쪽 언덕은 밤에 별을 보기 좋은 곳이에요. 정말 아름답거든요. "
흘리듯 나지막히 말을 마쳐낸 그녀는 어느 곳으로 가면 좋을까ㅡ 라는 고민을 머릿 속으로 굴려내기 시작했다. 이 미리내 지역을 한 바퀴 도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만. 눈이 쌓인 그 모습으로도 절경인 곳이었기에 어느곳을 가던 나쁘진 않을 것같았다. 얼음이 얼어 스케이트를 타는 곳으로 가볼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 ...스케이트 좋아하세요? "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진 그녀는 여전히 그 작은 발을 열심히 휘두르며 길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이쯤되면 발이 좀 시려워질 만도 하건만, 어째 그리 씩씩하게 발걸음을 떼내는 지도 의문이었다. 연분홍빛 머리칼 위로는 작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아, 꼭 벚꽃 잎 위로 눈이 쌓인 것만 같더라. 그녀는 고개를 한 번 푹 숙여내 제 목소리에 얼굴을 묻어내곤, 다시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어냈다.
" 가리는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의 지역이죠? 가보고 싶었어요. 천성이 나무이다보니, 한 곳에만 있는 걸 좋아해 미리내를 벗어나본 적이 없어서요. "
아, 따뜻한 코코아가 생각나는 날씨. 그녀가 느릿히 새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제 입을 다물어냈다.
이제는 졌다. 령의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하자 사우는 노려보고, 아까의 한숨을 또 푹 내쉬는 것으로만 반응을 다하였다. 정확히는 추스리는 것이었다. 노를 너무 드러내서 그렇게 득을 보는 경우는 없는 쪽이 다수였다.
사우가 웃음기와 함께 건넨 말에는 이내 령의 대답이 위에 얹히어졌다. 이제 그 위에 또다른 대답을 올려놓을 차례인데, 잠깐. 같은 바다를 바라보는 중인 흑조 신의 저 검고 칠흑 같은 눈동자는 원래 저렇게 깊이를 알 수 없으리만치, 바다의 푸른빛도 반사하지 않은 채 아득하였던가? 사우의 눈꺼풀이 빠르게 감겼다 떠졌으나, 끝에 가서 뱀신은 그에 관해 무겁게 여기지 않기로 하였다.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에 가까운 거야. 대단할 것 없다니까 자꾸."
사우는 공중에서 내려와 모랫바닥에 무릎을 세운 앉은 자세를 툭하고 취하였다. 다리는 썩 털털한 자세인데 반해 소매는 또 버릇처럼 가지런히 모으더란다. "오래 떠돌아다녔다라~ 역마살인가?"라며 사우는 장난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