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나란히 발을 맞추며 그 모습을 지켜본다. 너는 웃다가, 신나게 말하다가, 생각하다가, 툴툴거리다가,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한다. 다양한 모습들,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질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눈을 마주쳤다. 깊고 맑은 검정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웃었다.
응하듯 눈을 접어내며 볼에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어떤 반응이든 마냥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더란다.
요컨대, 자신은 너를 사랑했다 해야지.
*
ㅡ이 앞의 곶 어딘가에 절이 있죠. 그곳에는 옛날에, 보타락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고 해요.
ㅡ보타락 신앙?
ㅡ에에, 보타락 도해, 알고 있습니까.
들은 적은 있다.
*
탁. 초침, 이어 분침, 마침내 시침이 자정을 알렸다.
10년 전 만난 이와 사랑한지 100일.
그런 날이 왔다고, 이 순간 왔다고. 퍽 깔끔하게 떨어지는 숫자가 마음에 들어서 슬며시 미소 지어보다가, 익숙한 그늘로 덮어버린다. 그만 솔직해지자.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지 몰랐다, 실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한 것도 애석하게도 당연한 일이더란다. 야속하지. 도움을 구하기 위해 위를 올려다봐도 보이는 것은 단색의 밋밋한 천장 뿐, 그것을 옆으로 치우고 파란 하늘을 바라본다고 한들 무엇이 크게 달라질련지. 비관적인 감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평소에 언제 그렇게 낙관적이었냐마는.
아, 우울하다.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마자 안 돼, 눈을 감고 눈꺼풀 위로 손가락을 올려 누르고 다시 눈을 떠 천장을 눈동자 가득히 담았다. 비단 천장이라 해도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그 위로 있는 것이라곤 그저 파랗기만 한 하늘이라 해도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그러니 밝아지자. 밝은 생각을 하자. 오늘은 또 특별해서 행복한 날이 아닌가? 너를 떠올렸다. 이쪽을 바라보던 네가 얼굴 위로 피우던 그 꽃다운 미소를 떠올렸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랑스러웠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울 그런 너의 모습들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유혜야."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지금 이 자리에 없지마는 너의 이름을 공기 중으로 내보낸 후 여운을 맛보았다. 그 여운조차도 자신에게는 벅차기만 하더라. 잃고 싶지 않다. 눈꺼풀을 누르던 손이 다시 얼굴로 올라와 완전히 덮어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잃고 싶지 않다. 허나 현실이란 가혹하면서도 다정하고, 또 가혹하기만 한 그런 존재였다. 바란 적 없는 것을 바라게 하고, 그것을 반복한다. 그래, 그 멀고 먼 존재와 마주치게 된지 십 년이고 손을 맞잡은지는 어느새 백 일인데 여전히도 잃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친다. 멀다.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다. 마치 어느 신화처럼. 누군가가 믿은 적이 있을 신앙처럼. 이상이란 그런 거니까. 닿았지만 아직 닿지 못했다. 어쩌면 닿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다고 믿은 걸지도 모른다. 그야, 신앙이니까. 신앙은 언제나 그렇다.
하면 자신은 어쩌면 좋은 건가. 전혀 모르겠다. 답을 줘. 누군가 답을 줘. 소리없이, 돌아오는 소리도 없을 외침을 남기며 침대에 앉은 몸을 웅크렸다. 가만히 얼굴 위의 손을 거두고 세상에 처음 나온 아기처럼 천천히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변한 건 없다. 방이다. 자신이 지내던 방. 방금도 있었던 방. 그 뿐이다. 세상과 통하는 곳이라곤 하나의 문과 하나의 창문일 뿐인데, 이곳에서 그 세상의 현실을 논하며 이상을 좇고 있었다니. 실소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고, 손으로 반대쪽 팔을 매만졌다. 크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아, 어쩌면 또다시 환각 속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가련하게도.
무뎌진 감각, 비현실 같은 현실 속에서 웃으려고 하였다.
웃고, 또 웃고. 웃어서...? 대관절 무얼 원해서. 딱하게도.
그래도, 그래도 웃자.
*
ㅡ저 바다 건너편에는 말이죠, 관음님이 계시는 보타락 정토가 있다는 거죠. 그것을 믿는 인간은 산 채로 관처럼 생긴 작은 배를 올라타고 정토까지 건너가는 겁니다. 염불을 외우면서.
ㅡ어떻게 되는 겁니까. 올라타면.
ㅡ대개는 죽겠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말했다.
*
그건 거무푸레한 하늘에 그 옛적 봤던 환영이었네 푸른 꽃
얼마 전의 일, 붉은 황혼의 아침이 찾아오기도 전에.
퍽, 딱딱한 소리 그리고 강한 충격이 머리에 느껴졌지만 조금 놀랐을 뿐 큰 통증으론 다가오지 못했다. 역시 무뎌진 탓이다. 그저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 생각하고 있노라면 강하게 주먹을 쥐어 부르르 떠는 자신의 한쪽 손을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었다. 허, 이게 무슨 일이야.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다는 것 아닌가. 가령 이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라도 했을지, 슬그머니 주먹을 풀어보려하면 반항없이 순순히 힘을 뺀다. 아니, 사실 반항하리라고 기대한 적은 없지만서도.
이윽고 시선은 앞으로ㅡ 무의식 중이었다. 주욱 뻗어나가는 시선의 끝은 조금 열린 사무실 문을 지나 창문을 지나 바닥을 지나 책상에 닿아 의자로 옮겨가, 그리고 마침내 닿아서.
"......"
그래. 몹시도 가슴에 사무치던 모습에서 시선은 멈추어버렸더랜다. 몸 옆으로 늘어져 있었던 손이 다시금 주먹을 쥐고, 그것이 어쩐 일이냐니, 어쩌면 은연중에 자신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보았던 그 밝은 빛은 너무도 밝아서, 너무나도 밝아서,
내내 어둠만을 바라보던 이여, 탁하디 어슴푸레한 어설픈 빛으로 그 밝은 빛과 노닐 생각은 마라. 그것이 죄악인 줄 모른 체 하는 건가? 아아, 그렇지. 여지껏 보아온 것이라곤 어둠 뿐인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어둠을 두려워하는 주제에. 어디 보자, 미친 사람이 둘이구나. 아니, 하나인가. 수많은 실이 연결된 사람 하나. 실의 끝은, 또다른 사람이 거머쥐고 있구나. 이런, 아직은 약하지.
아. 설핏, 공포심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무엇을 향한? 주먹을 쥐고 있지 않던 다른 손이 창백히 질린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이내 차가운 기억은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모습을 감추어버린다. 뒤늦게 찾으러 들어도 잡히지 않아, 보이지도 않아ㅡ아니, 찾을 이유가 없는데 왜 찾으러 드는 건가? 실소를 지으며, 안개를 향해 조소를 지으며, 그리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감각은 변함없이 무디기만 하다. 무디고 무디고, 무디기만 해서.
우러르던 빛을 다시 바라보면, 도저히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도 전의 일, 아직 비를 맞지 못하고. 그저 혼자 남고 싶지 않아 그 빛을 좇던 모양이다. 계속.
*
ㅡ자살 같은 겁니다.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겠죠. 하지만 열심히 믿고 있다 보면 정토에 갈 거라고 말이죠. 도해를 하러 출발하는 배가 있으면, 모두들 「대단하다. 감사한다. 부럽다」라고 숭배했던 모양이예요.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예요, 라고 그는 숨은 미소를 머금고,
ㅡ요즘은 죽으면 곧 정토로 간다고들 하는 것 같으니까.
약간 비아냥 같았다. 하지만 입하고는 정반대로 옆 얼굴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달밤인 탓일까.
*
자나깨나 그 향기 잊을 수 없어 저 푸른 꽃 찾아서
황혼이 내려앉는다. 네가 끌어안는다. 그 따뜻함을 마주안으면서 속내론 흠칫, 자신이 너무 차갑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혹여나 그 온기를 모두 빼앗아가 버리는 게 아닐까, 그로 인해 차가워져버리는 게 아닐까. 너로 하여금 자신과 같은 차가움을 지니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이대로 더 이상 그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면 어찌하나 하는 두려움. 그렇게나 나약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자신인 줄, 알고나 있을까. 실의 끝을 거머쥔 이가 미소를 지으면서 한 걸음 성큼 내딛었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거다.
"...아."
손 안에서 돌리던 연필이 툭 떨어졌다. 멍한 외마디를 흘리고 다시 주워든 연필을 버릇처럼 한 바퀴 더 돌린 뒤 끝을 종이로 다시 향했다. 종이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의 그림이 펼쳐져 있다. 점을 가벼이 찍는 것 같더니 어느 방향으로 쭉 긋는다. 방향을 틀어 또다시 선, 굳이 끝을 맺지 않아도 절로 면이 만들어지고 그곳에 없더라도 있는 것처럼 명암이 절로 연상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손재주가 좋은 자신의 특기 중 하나였다. 유려한 필치로 머리카락을 묘사해낸다. 이어 옷에 잡힌 주름을 손보고, 또 연필을 돌리더니 이번에는 실수로 떨어뜨리지 않고 의도하여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가지런히 기울인 다리 위로 두 손을 모아 앉아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를 띄운채 어딘가 아련한 시선으로 위를 바라보는 여성.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짧은 공백을 채우고, 아까의 회색의 연필을 대신하여 이제 종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건 색채로 적셔진 붓이었다. 하얗다에 가까운 살구빛으로 피부를 칠할 것이다. 연홍빛으로 어여쁜 미소를 칠할 것이다. 깊은 검은빛으로 눈동자를 칠할 것이다. 부드러운 보랏빛으로 머릿결을 칠할 것이다. 화사하고 따뜻한 빛으로 옷을 칠할 것이다.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너의 가장 행복한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떠올리고 그리고 있노라면 자신도 절로 행복해졌다. 다시는 그 미소가 지워지고 슬픔의 눈물이 자리를 대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림은 그것이 가능했다. 욕심을 부리며 처음 연필을 잡았고, 색을 입히면서도 그 욕심을 상기시킨다. 그 미소는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
주문 제작이었다. 제 아무리 손재주가 있다고 한들 보석까지 다루는 건 현실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손안에서 은은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장신구를 소중하게 꼭 감싸쥐었다.
네게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좋아하였고, 그래서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 앞에서 평범하게 보이고 싶어 과거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언제서부턴가 네 앞에선 다른 구실을 또 하나 찾았다. 기어이 속마음을 고백하던 날에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는가. 좋아하였고, 그래서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미움 받을까 두려워하며.
너는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고 있을까. 너를 이곳으로 불렀다. 너는 이곳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줄 알고 있을까. 아마 이곳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마침 주위는 한적했고, 날씨는 기분 좋게 완벽했고, 하늘에는 슬슬 따뜻한 황혼이 화려하고 조용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 사이로 유유히 모습을 드러낸 네게 진부하기만 한 인삿말을 건네버린다. 그럼에도 웃음을 보이는 너에게 욕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지 않을 수가. 지나간 세월동안 거짓이란 사실을 숨긴채 웃어보였지만 지금의 미소는 솔직하기 그지없었다. 욕심이 나지 않을 수가.
"잠깐만 뒤돌아봐."
앞서 선물한 그림을 쥔 네게 낮은 목소리로 부탁한 뒤 다음 선물을 직접 목에 둘러주었다. 계속 생각해왔는데 아름다운 나비가 네게 무척이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푸르스름하니 보랏빛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나비. 금속 사이로 채워진 자색의 보석은 네가 머리카락을 물들인 색인 탓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색인 탓도 있었다.
다시 이쪽을 돌아본 네 가슴팍 위로 늘어뜨린 작은 나비의 목걸이가 너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예쁘다."
또다시 진부한 소리. 하지만 솔직한 소리였다. 부드러이 끌어안은 너는 여전히 따뜻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전히 따뜻해서.
"십 년이랑 백 일동안 고마워."
너무 고마워. 반복하며 눈을 느릿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약속은 계속 지킬게."
고백하던 날 둘이서 한 약속. 끝까지 네 옆에서, 떠나지 않을 테니까. 너도 자신을 떠나지 않으니 사실 혼자 남을까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었는데. 나약한 자신은. 아니. 눈을 살포시 감았다.
"정말로 고마워."
*
ㅡ하지만 이런 만월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도해하려고 생각했던 사람의 기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검은 수평선을 향해, 곶에서부터 똑바로 펼쳐져 있는 빛의 길.
ㅡ저 길 끝에, 정토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요.
*
10년 전 만난 이와 사랑한지 100일.
그래, 과연 특별하고 행복한 날이었다. 두려움과 불안한을 떨쳐내더니 자연스레 웃었다. 무뎌진 감각, 무뎌진 현실 속에서. 무딘 손으로 푸른 꽃을 하나 쥐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이 지금도 밝다. 무딘 현실 속.
절 부르는 목소리. 어두워지던 은색의 눈동자가 밝아지며 절 향한다. 옅게 웃은 채 고갤 끄덕인다. 그래요. 나에요. 이어지는 말은 속으로 중얼인다. 말이 없으니, 어두운 공원에 바람 소리만 울린다. 한참을 물그레 바라보단, 정적을 깨트리며 들려오는 말에 가늘게 눈을 감아낸다. 고갤 젓고서는 어깨에 얹었던 손을 뒤로 넘겨 잡아낸다. 다시금 같이 그를 가벼이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