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과 동시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누구라도 아는 사람을 눈앞에서 마주쳤을 때 무시하고 지나치지 않는다. 상대도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에 놀람의 기색을 잠시 담아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한 씨."
나도 고개를 까닥였다.
"며칠만이네요."
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이 아가씨ㅡ나츠미와 대화를 나누려면 나는 항상 전에 한참 물든 듯 싶으면서도 아득하기만 한 과거의 기억 속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이 일상적으로 쓰던 일본어를 꺼내 입에 올려야 했다. 며칠 전 센하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는 사실 수 년만에 사용하는 일본어라서 자신이 없었는데ㅡ특히 발음이 걱정되었다!ㅡ 예상외로 혀가 술술 굴러가서 본인에게 놀라버렸다. 와, 나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네, 자부하며.
성류시가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니고, 또한 그녀가 묵는 여관은 내가 독립한 집과 가까웠기에 어쩌다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이른 아침에 그럴 줄은 몰랐다. 이봐, 지금 오전 7시도 안 됐다고. 일단 나는 오늘 얕은 잠 속에서 허덕이다 별안간 좋은 구절이 떠올라 워드 프로세서를 마주한 뒤 잠깐 상쾌한 아침 바람을 쐐기 위해 나온 거다. 소설가의 지극히 흔한 일상이다. 안부인사처럼 나누던 웃음에 얹어 그 사실을 밝히자 나츠미는 손뼉을 가볍게 쳤다.
"우연이네요! 저도 바람을 쐐러 나온 거거든요."
그 정도가 놀랄 정도의 우연일까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결국 몇 초 뒤에 나도 진심으로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우연이네요."
나왔던 말을 따라해버렸다. 이런. 나츠미는 아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즐거웠는지 생글생글 웃음을 지어내기만 하였다. 그 뒤로 생각보다 오래 잡담을 한 것 같다.
갑자기 마법사의 세계로 던져졌을때의 기억이 재생되는 것은 무엇이였을까. '내가 헤세드가 아닐지도 모른다.' 라는 기묘한 말도 갑자기 상기된다. 저한테 젤리빈을 건내주었던 남자와, 눈 앞에 있는 남자를 매치해보려고 한다. 확연히 분위기가 달랐었다. 말투에서, 특유의 태도에서. 아니 동일인물인지 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헤세드 선배, 혹시... 아, 아닙니다."
아니... 그저 심각한 억측이였다. 드라마를 너무 본 것 아니야? 과대망상이라 치부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한들,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다.
"...꼭, 다녀와보세요. 정신적인 문제는 방치해두면 위험하니까요."
유야무야 걱정을 하며 넘겨버린다. ...언급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은가? 하는 염려는 샌드위치와 함께 꾸역꾸역 넘겨버리기로 하고.
호시야마 나츠미. 활달한 성격에 언제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올리고 다니는 이 여성을 처음 만나게 되었던 것은 센하를 통해서였다. 그 때도 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는데, 그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어쩐지 낯익어서 당시에 나를 잠시 의아하게 만들었었다. 실례스럽게도 잠깐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어 혼자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확실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눈매였다. 으음, 낮게 신음까지 내며 고민을 이어가는데.
'아, 혹시 제 눈매에 대한 건가요?'
나츠미가 대뜸 그렇게 말하며 제 눈가에 손가락을 얹었다. 눈치도 빨랐다.
'아마 센하의 눈매랑 비슷할 거예요.'
아, 확실히 그랬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도달할 수 없었던 사실을 그 한 마디로 깨달은 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내 또다른 의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단 건...둘이...? 갈피를 못 잡고 말을 흐리고 마는데 나츠미와 센하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그게 사실은ㅡ' '제정신이냐, 나츠미.'
센하가 나츠미의 말을 단호하게 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꽤나 공격적인 태도였다. 왜지?
'아, 아니, 센하. 소꿉친구 분이라면서...이 정도는...'
나츠미는 안절부절 못했다.
'이 정도?'
센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면 저런 공격적인 모습은 그 때 조금 오랜만이어서 나도 당황하였다. 센하는 거친 태도로 나츠미를 가로막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였다. 그러더니 냉소적으로 말하던 것이다.
'그냥 동생이었어. 그게 다야.'
유난히 과거의 이야기처럼만 들렸다고 기억한다.
"한 씨?"
나츠미의 목소리에 의해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그만 어색하게 하하, 웃어보이고 말았다.
"죄송해요.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느라." "소설가의 직업병이려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요?"
열 세넷쯤 되어보이는 아역배우...처럼 보이는 20대 중반의 초동안. 본래는 연영과를 다니던 학생이었고, 홍대 나 가로수길을 본거질로 활동하는 판토마임 팀에 속해있었지만, 소위 말하는 길거리 캐스팅을 당해 익스레이버 배우진에 합류했다. 특히 어린 아이같은 페이스에서 나오는 어른의 감정이라는 조합이 생각보다 시너지가 강해서 시청자들 사이에서 호평이었다고. 여담으로. 본명과 배역이 똑같은 이름이었다고 하며, 익스레이버 출연진들중 한명과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고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시청률이 높았던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어 데뷔에 성공했다. 이후 꾸준히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추며 국내에서도 이름을 대면 알아줄 정도로 유망한 배우가 되었다. 한류 드라마 열풍으로 인해 그가 등장한 작품이 수출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기본적으로 캐릭터나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연기 스팩트럼이 넓은 배우로 알려져있다. 신인 시절의 그를 이름있는 배우로 끌어올린 병약한 도련님 역할부터, 높은 시청률을 갱신했을 적의 냉혈한 검사역할까지, 작품을 건너 갈때마다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갭이 큰 편. 그러나 이도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여 나오는 작품마다 연기의 완성도가 들쑥날쑥 한 편이였다. 어떤 배역은 완벽히 동화되었다는 평을 받았고, 또다른 배역에서는 반대로 해석을 잘못하여 붕 떠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런 그도 [특수 수사대 익스레이버]라는 색다른 장르에 뛰어들며 배운 점이 많았다고 한다. '권 주'라는 배역은 제법 색다른 도전이였다고 하고, 그 도전은 성공적이였다.
그는 '권 주'라는 배역을 연기할 적에 갭이 극심한 성격 때문에 이입하는 것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서 그의 과거를 미리 받아 본 감상으로 그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중점적으로 신경쓰며 연기하는 것은 외강내유적 성향.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연기했다고 한다.
'권 주'의 배우가 이 연기자 였다는 것을 알면 놀라는 이들이 제법 많은 편이다. 밝은 색의 특수 렌즈로 눈 색을 바꾼 탓에 인상이 사나워졌고, 배우 본인도 눈빛 연기에 신경을 제법 쏟았다고. 덕분에 눈빛만으로도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이 존재한다.
렌즈를 뺀 눈은 평범한 흑갈색 눈이다. 렌즈를 빼고 표정을 바꾸기만 해도 매서운 이미지가 덜어지고 청순한 미청년으로 변한다. 사실 데뷔 적부터 외모만으로 톱스타 반열에 들었다는 비아냥 아닌 비아냥이 존재했었으나. 그간의 작품활동과, 현재 [익스레이버]의 경력을 쌓으며 그러한 평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지 오래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해져서 오만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측과는 달리, 겸손하고 상냥한 성격. 자신보다 커리어가 얕은 배우나 스태프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촬영장 분위기를 띄우는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메라가 돌아갈 적에는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돌변한다. 그만큼, 배역에 대한 몰입도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