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무녀에게 무녀야. 무얼 원하니? 라고 아이들이 물었을 때. 죽고 싶어. 라고 그녀는 대답했었지요. 그런 서문이 있었죠. 그런데.. 전 무녀처럼 보이지 않는 괴물이었지만, 한 사람의 존재 뒤에 매달린 채로 살아가는 비참한 것이었지만, 저는 살고 싶었어요. 다만 내가 살아가기 위해선, 그것이.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빼앗는 것이라고 해도요.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강아지를 기르고 싶어했던 너는 드물게 아버지께 졸랐고 흔쾌히 허락해준 그는 그 다음 날 귀여운 강아지를 데리고 왔고 너는 그 아이에게 멜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아꼈지. 그리고 그 아이는 얼마 지난 뒤에 자동차에 치어 끔찍한 몰골로 죽어버렸단다. 당신은 그걸 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나는 그걸 오히려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황량하고 황량해서 잡초마저 말라비틀어지는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던 황무지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고요하게 체념할 수 있으리라 맹세한 마음을 끝없이 가라앉혀도 그 공허함이 메워지지 않는 블루홀을 나는 압니다. 그것은. 그것은 제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못내 포기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어찌 주장조차도 못한 이유는 저 자신이 이미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먼지로 폭삭 화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잠들 수 없는 밤들이 수없이 지나가기에, 나는 시간을 너무나도 느릿느릿하게 느꼈습니다. 눈을 감았기에 그 시간들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이 그저 들어오는 소리와, 손끝에 스치는 부드러운 이불자락에 의지하고 만약 무엇이라면의 상상으로 긴긴 밤을 외로이 지새야 했답니다. 그 마음은 텅 비었고, 있던 것도 불타 재로 부서졌고 그 고통은 증오로 전가되어 나는 내가 있을 수 있는 이유인 너를 사랑하면서도 어째서 내가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며 너를 증오하였습니다. 그 증오심이 너에게도 피해를 주어버렸지만 저는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것을 배울 수 없었고, 나는 당신의 안에 있을 뿐이기에 아무도 몰랐던 존재였으니까요.
그리고 모든 것은 17살 즈음에 반전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죽음은 컸어요. 나 또한 그 분들이 돌아가신 것에 크나큰 슬픔을 희미하게나마 느꼈는데. 너는 오죽했을까요. 그러나 너는 나에게 전가된 슬픔으로 인해 슬픈 것 이전의 그 격렬한 감정으로 인해 푸석한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채.. 나의 세상에 접하였습니다. 미안해요. 기억은 잘 나지 않아요. 내가 너무나도 극심한 분노이자 거의 최초의 감정에 사로잡힌 탓이었을까요. 너는 그렇게 깊고 깊은 절망의 바다 속으로 빠져들었고 나는 새카맣고 흘러내리며 지독하리만치 댜러워보이던 괴물의 손이 아닌, 가질 수 없었던 몸의 손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꿈이 없는 잠을 잘 수 있었답니다. 본래 꿈을 모르던 존재라 꿈이 없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십몇년동안의 삶의 피로가 꿈이 없어야 흩어질지 모를 일이었기에 그러하였나요? 추측은 무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기만 할 뿐 꿈도, 미래도 없이 그저 살아있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나. 그대로였다면 그저 며칠 동안의 유예 후엔 더 이상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을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나의 꿈이 아닌 당신의 꿈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어요. 그리하여 저는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체류하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꿈을 이루고 스카웃이 되었을 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무언가 마음이 동하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이제는 스카웃되기 전의 제 자신이 아득히 멀어져가는 것만 같아요. 그것은 곱디 고운 작별이었을까요. 아니면 눈물의 이별이었을까요.
그렇게 구분하지 못하는 나날이 지나갔고, 저는. 제 잿빛 삶을 포함해 모든 것을 극적으로 변해버리게 만든 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주빛 머리카락이 눈에 먼저 들어왔는지, 아니면 눈이 먼저 들어왔는지. 일자로 다물린 입매가 먼저 들어왔는지 구분되지 않았어요. 아니. 헤세드라는 사람 자체에 순간적이고도 처음 맞이하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을 온전히 인정한 것은 언제였던 걸까요? 아니요 언제라고 일방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거예요. 영영 비가 오지 않던, 않는 마음에 비가 내려버렸던 것이었어요. 그럼으로써 나는 온전한 삶을 순간이나마 경험했어요. 너무나도 짧았지만요. 그래서 나는 내가 이리도 삶의 색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세상은, 이다지도 아름다웠군요.
그러하기에 나는, 그제서야 꿈을 꾼다라는 걸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진정으로 이해해버리고 만 거예요. 그를 좋아하고 싶고, 받아들여지고 싶고, 그러한 감정의 표현법을 나는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기에 좋아한다나. 한자를 배워서 은애한다. 정도가 한걔엿던 것이었어요.
그 감정은 참으로 비참하고도 반짝거렸기에. 너무나도 갖고 싶어서, 욕심이 생겨서, 파편이나마 붙잡고 싶었지만. 그 마음은 앓음으로 꾸짖어졌더라죠. 나에겐 어울리지 아니하다는 듯. 나에겐 과분하다는 듯. 만남이 이어지면서 아닐까. 맞을까. 고민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좋아한다는 말에 눈물이 가득 고였던 걸지도 몰라요. 그 갈 곳 없던 감정은 영영 검을 것만 같던 감정의 바다의 색을 에메랄드 빛으로 되돌렸고, 무채색이 번져가던 나의 삶을 유채색으로 되돌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모래시계 속의 모래처럼 나의 위로 사륵거리며 떨어져 나를 충만하게 만들었었지요. 그것은 헬렌 켈러가 물을 느낀 것처럼 세상이 변하는 것이었어요. 정말로 좋아한다. 라는 것을 내가 공감하고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귀히 여기게 될 것이란 걸 어린 나에게 일러준다면 믿지 아니할 거예요.
크리스마스날의 그 데이트에서 내가 당신과 함께하며 느낀 그 행복감은 처음이었어요. 도취되는 그 기분. 좋아하고 사랑하고 은애한다란 말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그 기분. 내가 삶을 온전히 가지게 해준 당신. 내 삶에 당신이 없다면 어찌될 지 두려워지는 잃을 게 있게 된 내가 낯설면서도 반가웠어요..
그래서 전 청산할 용기를 조금이나마 얻었었습니다. 고향에 둔 잿빛들, 먼지가 소복히 쌓여 있을 물건들, 나의 과거이자 언니의 과거와 마주할 수 있을 것이었어요. 다만, 그 용기 한자락으로 행하려 하던 일은 안타깝께도 나의 잿빛의 잔재에 먹혀버린 이로 인해 실행될 수 없게 되었어요. 약의 몽롱함에 취해 나는 당신을 불렀고, 어리석게도 포기하려 하였지요. 알고 있어요. 나의 정신은 참으로 모자란 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끝없이 깊은 무저갱 속으로 추락하며, 심연의 품에 안기며 나는 포근함을 느꼈답니다.
꿈 속의 꿈은 너무나도 달콤했어요. 쓰라린 것은 전부 삼켜내고 달콤한 것만 먹어야 되는 그것은 결국엔 나를 파멸로 이끌 것을 외면하게 만들었답니다. 내가 삶을 이어온 것을 전부 부정하게 만드는 그 힘은 나를 천천히 좀먹어갔고 부서질 듯이 나의 의식은 부평초마냥 흔들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결코 잊지는 못했어요. 심연은 내게 그건 한낱 꿈일 뿐이라 말하였지만.. 의심은 분명 있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내 앞에 나타난 당신을 보고 정말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습니다. 당신은 꿈 따위가 아니었어요. 심연조차 그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언니는 나에게 말했더죠.. 그래요. 내게 말했어요. 마지막 작별 인사는 눈물이 흘러내리며 부드러운 말을 흐느꼈고 동시에 머리를 울리는 듯 쌉싸름했고,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당신과 함께 빠져나왔습니다. 나를 껴안아주었지요? 그 때, 전 따스함에 언제고 부서질 것만 같았답니다. 그렇지만 그 부서짐은 부정적이지 않았어요. 나는 가치가 있었나요? 란 질문에, 그 날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 100이라는 숫자의 날이 되었습니다.
나는 서툴러요. 배우지 못했고, 잿빛 삶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려오는 감정에 욕심을 내버렸어요.
붙잡고 싶다. 보고 싶다. 조금 더 나아가서 당신과 함께..
100일이란 시간은 내 짧을 인생에 비하여도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긴 시간에서 나는 배웠답니다. 이 짧은 말을 내뱉기가 그리도 어려웠더죠.
사랑해요. 정말로. 이 담담한 말 한 마디에 담긴 건 제 생애 전부인 것 같아요. 란 생각을 하며 그녀는 슬픈 듯 기쁜 듯. 그 모든 북받친 감정으로 웃었습니다.
타미엘 T. 네헤모트는 처음으로 제 부족함을 이해했고, 그대를 사랑함으로써 온전해졌습니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부상, 또는 더한 부상이 숱하게 있었다. 그럼에도 사지 멀쩡히 움직이는 것이 저에게는 몇 없는 재주였으니...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려다 따라오라는듯 먼저 걸음을 옮기기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허나 더 이상의 거절은 아집에 지나지 않기에 순순히 월하의 뒤를 따라 붙었다.
"월하 아씨는 다정한 분이시군요..."
천한 쇤네에게도 이런 온정을 베푸실 줄은. 본래 조선 땅에서 노비란 소돼지나 마찬가지일 뿐이렸다. 철저히 물건으로써 사드려지고 팔리고 가치가 없으면 쉽게 쉽게 버려지는, 그런 저에게 인간과 똑같이 대우해주고 인심을 배푼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가.
굳이 권주의 이름을 한자로 치환하면 權朱가 되겠네요... 애초에 성씨가 이름이 되버린것이니. 근데 붉을 주라니 안 어울리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