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내가 언제까지고 너희 뒷바라지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제 무릎에 머리를 뉘인 채 늘어져 있는 제자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말했는데, 그때가 언제였을까. 제이의 말에 때마침 마당에서 자그마한 몸으로 무거운 목검을 들고 낑낑 훈련하던 제자 하나가 이해못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치만 스승님은 강하잖습니까. 그 말에 제이는 부드럽게 소리죽여 웃으며 말을 아끼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 그럼 너희가 다 클 때까지. 그때까지만. …어디서 이런 아이들을 데려와서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하는지, 원. 제이가 말없이 곰방대를 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찌되었든, 그는 무른 사람이었다.
*****
이 쥐새끼 같은 도둑놈! 몽둥이로 누군가를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콧노래를 흥얼이며 거리를 유유히 걸어가던 제이가 문득 그 소리에 걸음을 멈추더랬다.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한손에 감싸 내리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반쯤 돌렸다. 어깨에 걸친 도포가 바람결에 하늘거렸다. 누구도 도와줄 마음 없이 방관하고 있는 어느 한 곳에서, 몸집이 큰 주막 주인이 바닥에 쓰러진 아이 하나를 가마솥 음식에 사용하는 큰 주걱으로 두들겨 때리고 있었다. 아이는 무얼 그리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을까. 돌려주는 것이 차라리 덜 맞는 방법이거늘. 고집쟁이네. 저와는 상관 없는 일을 불구경이라도 하는 양 굴던 제이가 발걸음을 옮긴 것도 그 즈음이다.
다시금 높이 올라가 힘껏 허공을 내지르는 주걱을 무언가가 탁, 막는다.
"아이구, 무에 그리 화가났길래 애를 이리 잡는담."
부들부들 떨리는 주걱 밑에는 제이의 곰방대가 있었다. 제이? 주인이 제이의 옆모습을 알아보고 천천히 주걱을 치웠다. 이 쥐새끼같은 놈이 저번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장사하는 음식에 손을 대었다고! 도와줄 생각 말게나. 내 오늘 저 놈의 손버릇을 단단히 고쳐줄터이니! 팔까지 걷어올리며 다시금 다가오는 주인의 가슴을 이번엔 손등으로 막으며 제이가 방글 웃어보였다. 고개를 슬쩍 내젓는 모습이 그러지 말라는 모양이었다. 언제든 뿌리칠 수 있는 비실한 손목이었지만, 주인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손버릇은 내가 고쳐줄 것이니, 자네는 일이나 봐요."
이런 일에 괜히 힘빼서야 쓰나. 응? 주인의 마음을 달래는 투로 손등을 뒤집어 손바닥으로 가슴을 톡톡 두드려준다.
"자아, 아가. 일어나보련."
제이가 주인에게서 등을 돌려 쓰러진 소년을 향해 손을 뻗자, 아직까지도 힘이 남아있었는지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제이의 손을 쳐내며 허겁지겁 반대편으로 도망을 치더랬다.
"허어…. 쟤 좀 봐."
기껏 구해줬더니 고맙다는 인사도 안 하구.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이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헌데 겨우 저런 것 가지고는 며칠도 버티지 못할터인데. 제이가 한숨같은 숨을 느리게 내쉬며 다시금 곰방대를 물었다.
*****
그 날은 꽤나 추운 날이었다. 비교적 칼바람이 불었으니 춥다고 해도 되는 날씨였을 것이다. 소년을 다시 만난 것은 제이가 사박사박 잔디가 밟히는 소리를 귀로 전해 들으면서 산책을 나왔을 무렵이었다. 산책이라 해도 실상 길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 어느 때는 반대편 숲 근처까지 갔다 오기도 하고 어느 때는 근처만 돌기도 한다. 요컨대 언제나 가고 싶은 길로 가기 때문에 늘 산책 방향은 달랐다. 그러니까 이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다가오는 인기척에서는 익숙한 내음이 났다. 부딪힐 듯 스쳐 지나간 이와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제이는 몇 걸음 더 가고 나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것처럼 고개만 틀어 뒤쪽을 보았다. 소년은 이미 저만치서 걸어가고 있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제이는 이내 아예 몸을 돌려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걷지도 않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있던 소년은 제이가 다가온 것도 모르는 모양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 제이는 소매로 입가를 가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위화감을 깨달았다.
"얘." "……."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구나."
안색도 창백하고, 호흡도 거칠고. 이어진 제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년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척에 있는 제이를 확인하곤 답했다.
"멀쩡합니다." "……어딜 봐서?" "그저 날이 흐려 그리 보이는 거겠지요."
소년의 말에 제이는 저 구름 너머에 있는 하늘 위로 시선을 던졌다. 제이의 시선을 따라 소년의 눈길이 이동한다. 흰 비단 너머로 저 하늘이 보일 리 없건만 제이는 머리를 구름의 틈새를 살피듯 기울였다.
"전혀 흐린 날이 아닌데." "……혹시 보이십니까?" "아니, 한번 말해봤어."
단조롭고도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소년는 입을 다물었다.
"……." "……." "……아무튼 전 괜찮습니다."
자리를 떠나지 않는 제이를 피하듯 먼저 몸을 바로 세워 발을 떼어놓으려던 소년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거리면서 나무를 손으로 짚었다. 눈 앞이 어지러운지 다른 손으로는 눈가를 덮었다 떼어낸다. 신음 소리 하나 내뱉지 않았으나 몸 상태가 더욱 악화된 모양이었다. 소년은 몸을 가까스로 추스르면서 흘긋 제이를 보았다. 그리고 제이가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것마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 마치 원래부터 이곳에서 쉴 생각이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나무에 기대어 바닥에 앉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제이는 소년이 깊은 숨을 내뱉을 즈음에 이내 머리를 번쩍 들면서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 특별히 도와주지."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소년은 끝끝내 단호했다. 하지만 제이는 생각할 여지도 없이 곧바로 돌아온 소년의 거절에도 되려 아랑곳 않고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렇게 벌어져 있던 그와의 거리를 단번에 좁히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는다. 제 긴 소매를 죽죽 잡아 올려서 맨손을 그의 뺨에 가져다댄다. 미세하지만 흠칫하는 기색이 났다. 이어 손등을 뺨에 대었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어본 제이는 생각보다 열이 올라 있음에 작게 혀를 찼다.
"너는 의외로 아이 같은 구석이 있구나. 어른스럽지 못해. …앗, 애가 맞지 참." "……."
소년은 마지못해 제이에게 기댔다. 머리가 핑 돌아서 무의식적으로 제이의 옷깃을 잡았다가 화들짝 하고 자기도 놀라서 손을 뗀다. 입술을 물었다가 놓는 것을 반복하던 소년은 곧 다시 제이의 옷자락 끝부분을 잡아 당기면서 말했다.
"……그 날, 절 왜 구해주셨습니까?"
제이는 소년의 말의 의중을 잠시 파악하지 못했다. 알아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제이는 대답 대신 소년의 옆자리를 차지하면서 팔로 그를 휘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억지로 끌려와 강제로 눕혀지자 소년이 움찔했다. 그리고 소맷자락으로 소년의 눈을 가리듯 덮으며 말을 이었다.
"으응, 그건 네가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대답해주도록 하마."
지금은 조금이라도 쉬어야 하지 않겠니. 소년은 눈 앞이 깜깜해지자 손으로 제이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자리를 잡은 제이는 제 다리 위에 소년의 머리를 올려 놓고서 토닥였다.
"아가. 내 호의는 거절하지 않는 게 좋아. 흔치 않거든."
잠이라도 좀 자라는 것마냥 다독이는 손길은 마치 아파서 떼 쓰는 아이를 어르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교학상장敎學相長이었다.
- 제이病痍 : 병들고 상처입은 자.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던데. *해결사라지. 사사로운 잡일부터 그보다 위험한 일까지. *한량인이야. 어느 한곳에 가만히 있는 걸 못 봤다니까. *헌데 그 자, 눈이 안 보인다던데. 하여 항상 눈을 흰천으로 가리고 다니지 않던가? *도설포도청 사람들과 같이 있던 자 같은데…….
아니..새로고침을 하니까 보이는 이 2개의 연성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는 그냥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엄청난 짤의 기운이...!(동공지진) 아무튼 두 분 다 어서 오세요! 좋은 밤이에요!! 와아...와아...진짜...제이주..장난 아니다...독백 필력 이거 뭡니까?! 진짜 순간적으로 소설인 줄 알았는데...! 와아아...!!(동공대지진) 거기다가 브금 캐리...우와아... 그리고 아실리아주는..저건...분명히...(동공지진) 아니...저건 또 언제 그리신 거예요...?!
이 땅에서 대상인 이 지현을 모르는 상인이 있다면 첩자라 하는 말이 세간에 떠돌아다닐 정도로 이 지현이라는 이름 석자는 상인들 사이에서는 이름 높은 사람이다.
본디 이 지현은 부모가 양반이었으나, 지독한 돌림병에 어린 지현을 뺀 일가 전체가 몰살당하고 평민 가정에 입양되었다. 하나 다행인 것은, 지현은 저의 아비의 성향을 고이 물려받아 끈기와 집념이 유별난데다 어릴 적부터 셈에 능했으며, 훗날 대 상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헌데 이런 대상인도 요근래들어 하나씩 사업을 정리하고 후계를 교육하는 일에 집중하여서, 일각에서는 사모하는 이가 있어 정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도는데 진위는 알 수가 없다.
늦은 밤이었더라지. 기방의 한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떠나가지를 않았다더라. 술을 한 잔 따르지 않겠더냐, 네에, 나으리. 당연히 따라드려야겠지요. 하하, 요 계집. 어쩜 이리 예쁜지, 이리 오거라, 한 번 안아보자꾸나! 따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싶으니, 한 청년이 문을 덜컥 열자 붉은 머리를 지닌 청년의 한 손에는 술잔이, 다른 팔에는 저고리가 반쯤 벗겨진 기생이 안겨있었더란다. 기생은 화들짝 놀라 제 저고리를 여미곤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가렸고, 그런 모습을 본 남성의 표정이 경멸에 가까이 변했더란다.
"어찌 삼패만을 옆에 끼고 있는지. 한심하기 그지 없구나." "무례한 건 여전하시군요, 형님."
잔에 들린 술잔을 입술쪽으로 기울이며 청년은 표정을 구겼다. 술 맛이 떨어졌구나. 술잔을 내팽개치고 제 형, 정현을 올려다보는 표정이 참으로 볼만하였다지. 기생에게 물러나라 대충 손짓하자 기생은 황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고, 그는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일어섰다.
"왜." "왜, 라는 말이 잘도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여전한가 보구나.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셈인게냐." "죽을 때 까지. 조만간 죽겠지요." "죽음을 어찌 그리 가볍게 말한단말이냐. 지조없는 녀석!"
호통소리에 화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는 방에서 나가기 위해 정현의 옆으로 걸어가며 나지막히 읊조렸다.
"죽음을 경험하였으니 당연히 가벼운 것이 아닌지. 이 자가 나고자란 이후 역관에 어울리는 자가 아닌것 또한 알지 않던지. 형님은 의지라는 것이 있었다지만 나에겐 그 어느것도 없었지요. 이만 가시지요, 내 아무리 상것인 삼패들과 놀아난다 하여도 누구와는 달리 이곳의 예절은 지키니."
술 맛이 떨어졌다. 대문을 나섰다. 오자마자 저런 이야기를 하니, 제 아비가 무슨 말을 할지는 뻔하였다. 그래도 도술포도청이 어쩌고, 이수파가 어쩌고. 도술포도청이고 뭐고, 이수파고 뭐고, 전부 어찌 생각해도...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문득 한 아씨가 머리에서 스쳐지나가자 그는 혀를 차며 대문을 나섰다. 왜 하필 이 아씨가 떠오르는겐지! 하! 설마 이 내가 그 쬐만한 아씨를 사모하는겐가? 그럴리가! 술김에 그런 생각을 하는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