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랬..었죠.." 흔들거리는 듯 헤세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왠지 신뢰가 가요. 이 기분은 무엇인가요? 너무나도 희미한 듯 먼 꿈 같은 것이 진실이라 하는 것은 묘하게 그녀를 동하게 만들었습니다. 후에 생각해보면 그녀가 정말로 최초로 느낀 사랑이었으니 그런 것이었을까요?
"나.. 같은 걸 기다린 건가요..?" 인형같던 얼굴에 살짝 생기가 돌기는 했지만 금새 사라졌습니다. 그가 그녀를 껴안은 탓도 있겠지요.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끝없이 멀어지고,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는 헤세드를 향해 화사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던 것 같아요.
-이상하구나. 이 몸이 그대에게(이 말을 할 때의 모습은 흰자가 새카맣게 잠깐 물든 듯한 적대적인 눈빛이었다)이것을 돌려줄 연유는 하등 없다고 보고 있단다. 그리고 나와 같지 않는다면 사랑은 결국 식어버릴 테지. 미래의 상처같은 걸 예방하는 아주 좋은 일이란다. 헤세드의 으르렁대는 목소리에도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다만 약간 연극톤이었다) 정말 다른 일이라는 듯 말을 이었습니다.
-다만... 이 몸은 꽤나 인내심이 강하지만. 네게도 그것-너 혼자서 이 무의식과 공간을 빠져나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란다. 어차피 바깥의 저것도 곧 완전히 부서질 터이니. 라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했습니다. 품 안의 타미엘이 약간 불편한 듯 꿈지럭거리자 말할 필요도 없단다. 너는 그저 장식품처럼 예쁘게만 있으면 될 뿐이란다. 안 그러니? 라고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그 말에 눈을 내리깔며 타미엘은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심플한 듯 고급스러운 정사각형의 박스는 제가 모르는 회사의 제품이였다. 박스를 장식하려던 건지 조금 어설프게 묶인 분홍빛 리본이 눈에 띈다. 발신인이 누군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리본과 박스 사이에 끼워져 있는 조그만 쪽지를 펼쳤다.
[용기가 없어서 미안해.]
한문장으로 이루워진 심플한 쪽지. 이 '용기'라는건 어떤 의미인지. 조금 추정할 수 있을수도 있었지만. 아니아니, 그런 의미가 아닐지도.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하기가 두려우려나. 어째선지 그 짧은 문장 속 진심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특히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해요.]
그 옆에 놓여있던 하얀 리본 상자의 쪽지도 열어보았다. 누구의 필체인지 알아보지 못해 여전히 두고간 이는 알 수 없음.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니 묘한 내용이였다.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까지 상냥한 말을 선물해준건지.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이 초콜릿을 보낸 누군가는 단지 저를 걱정해 주는 듯 했지만.
하지만 귀가 조금 뜨거워져서 황급히 차가운 손으로 귀를 감싼다. 이 상황이 난감했던걸까? 아니면... 기뻤던 걸까?
"난처하군요..."
조그마한 미소가 표정으로 올라오기 전에, 초콜릿 한조각을 입에 넣어 녹였다. 진득하게 녹아 사라지는 느낌이 혀를 감쌌다.
천유혜는 올곧은 인간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겪고 그 후의 삶도 순탄친 못했지만, 그녀는 올곧은 인간이었다. 저에게 자극적인 비련이 생길 때마다 그녀는 제 자신을 다독이며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나는 행복한 인간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스스로를 다독이고 불분명한 미래를 행복하게 꾸며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미 구렁텅이에 빠져 진흙이 잔뜩 묻어난 제 인생이 너무나도 불쌍해질 거 같아서. 불투명한 미래를 나아가기 싫어질 것 같아서. 무서웠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녀는 좋게라도 성품이 바르고 단정한 이라 칭하기 어려웠다.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언니가 죽은 지 채 일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집으로 돌아가면 저를 반기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손목을 그으며 난동을 쳤던 날 이후로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일은 없었지만 그녀를 한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관심을 걷어내버렸다.
그녀는 또다시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전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 나는 이런 인생을 살 운명인거야. 이제는 기대도 하지 마. 끝까지 불운하게 살다가 어느순간 비명횡사 하는 인생일테니. 순응하자. 더이상 좋은 미래를 바라지 말자. 17살이 생각하기에는 가히 가긍한 생각이었다.
더이상 행복한 미래와 한줄기 희망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녀 앞에 나타난 건, 고작 같은 나이의 남학생 하나였다.
*
“ 뭐야? “
앙칼진 목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다. 사건의 중심에는 역시나 잔뜩 화가난 듯 얼굴을 찡그린 천유혜와, 이름도 모를 남학생 하나가 땀을 뻘뻘이며 서있었다. 그 외인 열댓명의 아이들은 관중에 불과했다. 남학생은 난처한 듯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제가 쥐고 있던 하얀 종이를 들이밀고는 떠듬떠듬 제 말을 이어갔다.
“ 동아리, 들어오지 않겠냐고... “
퍽 준수한 외모의 남학생이었다. 피부는 나름 하얗고 깨끗했으며 이목구비는 선명했다. 속쌍꺼풀이 있는 약간 올라간 눈매에, 얼굴에는 미소가 끊임이 없었다. 으레 그렇듯 평범한 헤어스타일에 앞머리는 눈썹을 겨우 가릴 정도였기에 퍽 귀엽게 보이기도 했더란다. 키는 대략 178cm 정도로 또래 중에서도 큰 편이었던 그 남학생은 교복을 단정히 입고 친구와 선생님께 예쁨받던 그런 학생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쯧, 혀를 찼다. 이유는 그저 그녀의 잠을 방해했다는 이유였다. 하기야 집안에서는 혹여나 어머니를 경계하던 탓에 잔뜩 긴장을 하여 선잠을 자기 일쑤였으니 학교에서라도 잠을 자두어야 했던 그녀였는데, 자던 잠을 깨우니 신경질이 뻗칠 만도 했더란다. 그녀는 남학생의 손에 들린 종이를 쏘아보더니 그 시선을 거두고 남학생을 째릿, 노려본다.
“ 안 해. 그니까 좀 꺼져. “
그렇게 말하고는 책상 위에 엎어져버리는 그녀였다. 중간중간 그녀의 성질머리에 대해 비판 혹은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딱히 신경이 쓰이진 않더란다. 그저 그들이 들릴 정도로 욕지거리를 뱉어내면 그들의 목소리는 알아서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 그녀는 오늘도 짜증이 한껏 서린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 가입 해주면 안될까? 우리 부원이 모자라기도 하고. 선생님이 꼭 하나는 가입하랬거든. 나중에 탈퇴해도 뭐라고 안할게! “
정적이 흘렀다. 보통은 처음 말한 순간 그녀의 성질머리에 화가 나거나 기가 눌려 자리를 피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다시금 사람 좋은 미소로 그녀를 설득하는 남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툭툭 건들며 응? 싸인만 하면 돼! 라며 자꾸만 성가시게 건드려대는 그였다. 그 정성이 통하기라도 한걸까. 먹으로 물들인 듯 새카만 머리카락을 쥐뜯으며, 그녀가 일어났다.
“ 아이씨..., “
별 수 없었다. 선생님이 한 명당 하나의 동아리는 들라고 했다는 걸 보니. 선생님과 트러블이 생긴다는 건 꽤나 귀찮은 일이었으며 교우관계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 와중에도 좋은 대학은 가야겠다 싶어 공부 하나는 제대로 잡고 가던 그녀였는데, 그깟 동아리 때문에 제 완벽한 생활기록부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이 남학생은 저가 싸인을 하기 전까지는 자리를 피하지 않을 거 같더란다. 그렇게 서명칸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싸인을 끝마치며 그녀는 쿵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머리를 박으며 책상 위로 엎어졌다.
“ 고마워! 부활동은 다음 주부터야! 내 이름은 “ “ 야 시끄러워. 서명 했잖아. 니네 반으로 꺼져 좀. “
한껏 억누른 목소리였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까짓 동아리 안나가면 그만 아냐? 그녀는 정말 끝까지 억누른 목소리를 툭 내뱉어낸다.
“ 알았어, 근데 우리 같은반이야! “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께서는 한 사람당 한 동아리에 들어야 한다고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
“ 유혜야, 너 미술 해본 적 있어? “ “ 있겠냐? “
거참, 까칠한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동아리에는 얼굴도 비치지 않겠다던 그녀가 이 미술부 교실에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면, 또 다시 그 남학생의 끈질긴 권유 때문이었다. 한 번은 출석 해야한다고, 나오지 않는다면 동아리에서 잘리는 건 물론이고 우리 동아리도 사라진다고, 다른 동아리를 알아봐야 하는데 받아주는 곳도 없을 거라며 끈질기게 그녀를 설득해댄 끝에 겨우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일이었다. 당연히도, 그 과정 속에서 심한 욕을 대여섯 번이나 얻어 먹어야했지만.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굳이 타인에게 욕이란 욕을 다 먹어가면서 까지 저를 이 동아리에 끌고 와야 했는지. 그리고 왜 다른 부원들은—
“ 너가 유혜구나? 반가워! “ “ 얘기 많이 들었어. “
“ 아니 너희가 왜 내 얘기를... “
그녀의 시선이 남학생을 향했다. 필히 날카롭고 부정적인 눈빛이었건만 남학생을 그 마저 좋은지 방긋방긋 웃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제 앞에 나란히 앉은 남녀 둘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긴 그녀가 낮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동아리 개설의 최소 인원 4명. 그들은 유혜가 있기에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이 낡아빠진 학교에 미술부 하나가 없었던 거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들의 얼굴에 차마 그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 짜증 가득 한 감정을 내비치는 대신 제 뒷목을 몇 번이고 문지르며 숨을 고르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녀는 그들의 교복에 달린 녹색 명찰을 읽어냈다. 별 뜻은 없었다. 그저 이름 정도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근거로 그녀는 이미 반 친구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워냈다. 차례대로, ‘ 김현우 ‘ 와 ‘ 소 희 ‘. 마지막으로 제 옆에 앉은 남학생의 명찰을 읽으려 고개를 돌리자, 남학생이 방긋 미소를 짓는다.
여담으로 윤찬경은 설정이 초기안이랑 굉장히 달라진 캐릭터예요. 사실 초중고 모두 같이 다닌 친구로 설정했다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거의 다 갈아버린 수준... 전 사이트에서 찬경이를 뭐라고 언급했는 지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사알짝 걱정 되긴 하는데..., 괜찮겠죠!!! (무책임
사실상 유혜 멘탈을 아작내는 장본인...(눈피하기) 나머지 친구들도 나름 비중이 있어요! 나중에 다시 한 번 출연할겁니다...! 미술부에 들어간 이유는 어찌되던 밝혀졌네요! (꺄르륵) 사실 권주주와의 선관 전에도 이런 느낌의 전개를 생각해두긴 했는데 마침 권주와 선관에서 미술부...! 이거구나 싶어서 살을 붙였습니다 ^_^ (자랑아님)
제일 큰 걸 풀어놓고 놀다보니 얘 이야기 풀 생각을 못 하고 있던...(머언산) 대충 상중하로 구성해놓긴 했는데..., 꽤나 길어지겠네요... 。゚(゚´ω`゚)゚。 아마 상중하에 에필로그로 종결편까지? 있을 듯한... ((너무 길어))
제가 전에 지나가듯 22살 때의 사건으로 인간관계가 아작이 났다고 한 적 있잖아요. 그게 바로... (옆눈) 지금 좀 후회스러운게 너무 빨리 찬경의 죽음을 푼 거가...(쥬륵) 조금 늦게 풀 걸 그랬네요. 그래도 위키에는 그 때 독백을 안올려놔서 나름 차례대로 올리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