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데 있어서 이해라는 건 보통 정도예요. 공감이 더 중요하지요." 그리고 전 공감 같은 건 쓰레기통에 던져넣은지 오래고요. 라고 중얼거리고는 화를 내라는 약간 데시벨이 높아진 지애의 말을 들으며 눈을 깜박였습니다.
"왜 화를 내야 하나요?" 화 같은 걸 내어보았자. 적만 만들 뿐이예요. 나즈막히 말하는 세연은 별다른 감정 없는 유리알같은 눈으로 지애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연은 감정을 안에 쌓는 타입이었다. 분노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사랑이 살의로 둔갑하고, 살의엔 으레 분노가 따라오는 법이지만.. 조금 다르려나? 어찌 되었건 그녀는 분파에 잠깐 다녀오기 전까지 그걸 보고 배웠으니까.
"반항. 발악. 안 해봤겠어요?" "흉만 없을 뿐이예요." 반항이니 발악이니 하는 것은...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예전에. 신역을 지키는 것을 하기 싫다고 했던 적 있었는데. 어땠던가? 기억하지 않으려던 게 생각났습니다. 더 이상은 관ㅇ.. 그런 말을 포함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거의 강제적이다 싶을 정도로 안쪽에서 무언가 끓던 것은 순간 싸늘히 식어버렸고. 입은 다물렸습니다. 아니야. 그건 식은 것이 아니라 침잠한 거지. 언젠가 용량을 감당하지 못해 터져버린다면.. 그런 속삭임을 무시하고 세연은 입을 열었습니다.
누가 말했었던가. 자해는 그 고통으로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하는 거라던가? 하하. 죽어라고 하는데 그것을 피하려고 먼저 죽어봤자 그게 그거지. 예전엔 걷힐 기미만 보이면 바로 뽑아서 바쳤다는데. 판도라의 항아리엔 재앙으로서 희망이 있었다고 했던가?
"그들은 나를 의식의 나룻배에 던져버릴거예요. 아마... 던져질 즈음에는 약에 취해서 제정신은 아닐 것 같네요." "도망쳐 봤자. 마법계에도, 머글계에도 손을 넓게 뻗고 있지요." 돈도 많고, 수단도 많고, 협상에 쓸 약점도 많지요. 내가 도망치면 정보에만도 몇천 갈레온에, 상처없이 잡아오면 몇십만 갈레온도 물쓰듯 쓸 수 있는 그들은.. 어떤 수단이라도 쓰겠죠. 그리고 모두가 물리적으로 정말로 잃어버리겠지요. 느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어차피 잃어버릴 거라면 먼저 멀리하는게 맞아요. 라고 덧붙인 뒤
"....필요하다면.. 이 장면과 대화에 대한 기억 정도는 최고이사의 아들에게 부탁드려서, 오블리비아테로 덮어드릴 수 있어요." 페널티를 감수한 거라서 그런지 더 어지러워졌다. 분명 다시 편지가 오겠지요. 아니면 그나 그녀가 직접 올지도 모릅니다. 어때요. 확실히 미련은 떼어내야 하는 것을 아니까. 비틀거리며 느리게 벽에 등을 기대려 합니다.
처음 보는 유령이 아연을 지그시 응시합니다. 마치 저승사자를 연상케 하는 복장입니다. 새까만 소복, 새까만 갓을 쓴 유령은 그렇게 가만히 응시하는 듯 싶습니다. 학원의 유령일까요, 아니면ㅡ 다른 어딘가에서 들어온 유령일까요?
' ....... '
유령은 백호 기숙사에서 무지개를 토하던 진을 가만히 보다가 아연에게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아직 눈이 쌓여있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손가락으로 한 쪽 구석에서 가만히 술을 마시는 유키마츠 교수를 가리켰습니다. 일단, 가서 파볼까요?
나무 아래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상자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그것이 유키마츠 교수님의 물건일지도 몰라요, 한자로 '雪松' 이라고 적혀 있엇으니까요. 일단, 가져가볼까요?
' 엇! 그ㅡ거! '
아연의 손에 들린 상자를 발견한 유키마츠 교수가 방긋 웃으며 제 몸을 길게 늘려서 머리를 헝클이듯이 쓰다듬었습니다.
' 착한 어린 마법사구나! '
주작인거니? 하고 고개를 기울인 유키마츠 교수는 흰 유카타 소매로 입을 가리곤 배시시 웃으셨습니다. 네, 엄청 취했군요. 그는 한참 배시시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나한테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을 찾아줬으니, 주작 기숙사에 점수 100점 추가!! '
!!! 축하합니다!!! 주작 기숙사에 점수가 100점 추가되었습니다!!! !!!!!
//정산이 매우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아연주;ㅁ; 일단 저는 야식 먹고올게요!! 모두 어서오시고 나중에 만나요!!!
왜 화를 내야 하나, 자기라고 반항을 안 해 봤냐는 세연의 말에 쏘아줄 대꾸가 있었지만, 이어지는 세연의 말에 입을 다물고, 눈을 깜박거린다. 머리를 빠르게 굴린다.
신역이니, 베일이니,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라 흘려들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나 극명하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혈육을 산제물로 삼는거야. 역사 속에 사라진-그리고 그런 의식은 사라져야 마땅하다-고대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일이 21세기에 일어난다고, 그 사람들의 손아귀는 너무 넓어서 벗어날 수 없다고, 세연은 말하고 있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믿기로 했다. 믿어줘야만 했다. 믿어줄 사람이 필요할테다. 자신이 그랬듯이.
마법사 사회는,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머글들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숨어들며 형성되었다. 처음 설계될 때부터, 비밀 사회를 목표로 했으니, 그 특성상 닫힌 사회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 처음 시조들의 의도가 순수했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는 법칙이였다. 음지에서, 습하게 쌓여만 가는 악습. 인맥과 권력과 재력이 있는 자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에 반하는 사람은 묵살되는 곳. 그 곰팡내 나는 공간에 빛을 비출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 추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기적이어서 나서지 않았다.
이세연은, 세연 자신의 자해습관에 대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마어마한 일에 자신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였다.
세연아, 난 네가 좋든 싫든 널 도울 거야.
이 많은 생각이 찰나에 머리를 스쳐가지만,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는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가 원한다면 더이상 간섭하지 않을게."
라고, 진심과는 영 반하는 대꾸를 할 뿐이다.
오블리비아테를 걸어줄 수 있다는 제안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절한다. 정신이란 건 모든 사람이 소중하게 여겨야 할 자산이다. 그런 것을 타인이 마법으로 아무렇게 가지고 놀 수 있도록 건네주다니.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