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의 눈동자. 기괴한 이야기에 이어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고 생각하자 마자 아리아는 찻잔을 엎지르며 그녀에게서 천천히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암시- 그녀의 시선이 더욱 공허해지고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엎질러진 차를 손수건으로 닦고있었다.
"어머, 제가 실수를.."
방랑자에게 사과를 하며 뒷정리를 시작한 아리아였으나 자리를 일어난 그녀의 뒷편에 들려오는 방랑자의 이야기는 그녀를 더욱 신경쓰이게 만들었다. 힘을 추구하다가 파멸에 이른다.
'저는 알폰스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요-'
[오직 피와 철 만이 인류부흥에 성공적인 열쇠가 되는 겁니다-] [잔혹하더라도 당신 같은 환상종이 하나라도 줄어든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아리아! 저 환상종을 죽이세요! 지금 당장 죽이십쇼!]
그가 가진 환상종에 대한 증오는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지금은 줄어들었지만서도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화약고 같은 것 이다. 입술을 깨물며 그 사실을 외면하려고 하지만 그런 그녀를 방랑자는 비웃을 뿐이다.
"비극적이네요- 무서운 이야기 다음에는 비극적인 이야기인가요? 음- 혹시 이런 이야기는 없었나요? 인형에 관한 이야기.."
"흔들렸구나. 다행이네요. ......당신을 이렇게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게 나 뿐이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나의 가벼운 행동에 흔들려버리는 그 모습도, 그렇게 시선을 피하려고 하는 그 모습도, 솔직히 말하는 것에 익숙치 않다는 그 모습도 그 모든 것이 좋다. 그 모든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나 뿐이길 바래. 그 모든 모습을 볼 수 있는 권리는, 내가 독점하고 싶어요. 그걸 독점하기 위한 값으로 나의 사랑을 줄테니 그 모습을 보여주세요.
"...네? ......잠깐, 그러니까. 음... 나도요. ...나도 당신이 내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고 싶어요. 교황이 누군가와 연애중이라더라, 하며 나돌아다니는 소문 같은 것들... 하나쯤은 있을텐데, 그런 게 사실이었다고 입증되어버려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당히 우리 사이를 말하고 다닐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요, 아나이스. 아무도 날 갖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걱정 말아요. 이미 날 가질 수 있는 건 아나이스 뿐인걸요? 응, 이건 정말 사실이에요. 약속할 수 있어요. 아니, 맹세할 수 있어요."
그 전의 망설이는 듯이 입술이 살짝살짝 떨리며 움직이던 걸 못 본 체 무시할 수 없어 작게 웃어버리곤, 그렇게 말한다. 아아 귀엽다. 너무나 좋고, 또 즐거워. 이 시간을 이렇게 귀여운 당신과 함께 하다니.
"엑, 아... 맞다. 그랬지. 응, 그러면 부탁해도 될까요? ......아무래도 손 한 쪽을 못 쓰게 되어버렸으니까."
한쪽 팔을 당신의 허리에 두르고 있어서 더 붙어 있을 수는 있어졌지만... 그래도 혼자 먹지 못하게 되는 건 조금 곤란할지도. 그래도 다행이다, 끈적한 쪽의 손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쪽이라서.
가식떠는 끼가없이 앞선 상황을 수습한 방랑자는 뒷 이야기는 물론 앞선 이야기의 연장선상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마을에 분 역병을 퍼뜨린건 어떤 이단심문관. 하지만, 그는 사실 혼돈인 자신에게 힘을 추구하기 위해 받은것을 바탕으로 그 마을에 실험을 했다고라고만 알고있었다. 결국엔 그 스스로도 그 병에 이르러 죽고 말았지만. 완성품은 아니였다. 최근에서야 완성하는데 성공했으니까. 그저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미지의 시선으로 추적해봤지만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파멸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다만 그 산물로서 눈앞의 기계장치 소녀와 까마귀 남자가 새롭게 이야기를 써나갔다는 점은 혼돈에게도 뜻밖의 미지였기에 좋아할수밖에 없었다. 이렇기에 배우는 선정해두는게 좋은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색에 잠겼다. 과연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인형일까. 어쩌면 그를 방해하는건 다름아닌 자신이 아닐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말을 아낄려고 했다. 그러나-
"하지만, 이야기가 맞물린다고 했었죠 여행자님?.. 저는 지금당장 일어나는 비극이라 하여도 그것을 극복한다면 분명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가 맞물려서 안좋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누군가가 다른 이야기를 또 맞물려준다면 기필코 언젠가는 좋은 이야기가 되주겠죠? .. 조금 낙관적일려나요?"
그러니까 언젠가 무너져가는 알폰스의 곁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계속 맞물린다면 틀림없이 언젠가는 좋은 이야기가 될 것 이다- 그렇게 믿기에 인형은 오늘도 계속 그자리를 지킨다
"붉은 날개의 인형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았다는건 진행중이라는 걸까요? 재미있네요 흥미있어요 그런 이야기.."
그거야 당연한 것이였다. 이렇게까지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이를 빼면 달리 또 누가 있겠는가. 애초에 그녀를 제외하고는 깊숙히 감추어 둔 속내조차 내비친 적도 없었다.
"당연히 널 누구에게도 줄 생각은 없어. 절대로."
시이의 확답을 들으면 한층 더 마음이 안정되었다.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연애 감정과 더불어, 소유욕이라고도 칭할 수 있는 감정이 속마음을 비집고 빠져나오고 말았던 것이였다. 더불어 안심했다. 적어도 아나이스 혼자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와서 완벽하게 알 수 있었기에.
"내가 온전히 신용하고, 사랑하고, 소유욕이 들고, 특별히 여기는 건 시이 너 뿐이니까."
처음 말문을 트는 것이 어려웠을 뿐, 아나이스는 제 속내를 거리낌없이 내뱉는다.
"이 아이스크림이 그렇게나 맛있었나."
아까 전엔 익숙하지 않다고 거절했음에도 지금은 흔쾌히 그러라는 것이 묘하게 신경쓰였으나, 결국 원하는 일을 달성했다는 그 쾌감에 순순히 넘어가기로 한다. 어쨌든 먹여줄 수 있다는 것엔 상당히 만족스러웠으니까.
그래도 괜히 한 번 아이스크림을 째려 보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숟가락으로 시이의 아이스크림을 퍼서 먹여주려 든다.
"사실은 바닷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냥 강변을 따라 걷고 싶었다. 언젠가 날이 따뜻해지면 같이 해변가로 놀러가지 않을래? 아나이스는 시이에게 은근히 제안했다.
"시이가 말한 대로 그냥 연애 사실이 다 퍼진다면 이렇게 몰래 나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런 식의 데이트도 꽤나 즐거우니까, 한동안은 즐기고 싶었다. 저 멀리, 빛이 반사되어 여러 색으로 물든 강가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사람인지는 알았으니, 슬슬 마무리나 지어보자고 방랑자는 말투를 바꾼다. 그게 원래 말투였다는 듯. 인식이 확달라졌다.
"이야기가 맞물린다는 건 결국 이야기의 배우가 된다는 것. 언젠가 좋은 이야기가 된다라. 그런 가짓수는 144,000분의 1정도인가. 안타깝지만, 남자가 완성되더라도 내가 특이점을 잡는한은 행복한 이야기라는 건 성립되기 힘들어. 안타깝게됬네. 무대장치를 꾸미는건 말이야. 자신들이 써나간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변할수있거든. 그러니까 행복한 이야기인가. 물론 가능성은 앞서 말했던것처럼 있지만, 희박해. 나는 그저 합당하게 너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너는 절망이라는 결론에 도착할지도."
믿음을 부숨으로서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어차피 잊어버릴 이야기라면 한번쯤 관찰해두고 싶던것이기에, 혼돈은 그대로 본디 인격을 드러내었다.
"머지않아, 이 노토스에는 거대한 바람이 불게 설계되있거든. 글쎄. 그 난관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성립할수있을까? 성립하든 하지않던 상관없어. 그저 태양과 새벽이 나를 관측하는 시점이 온다면 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희 배우들이 이 그랑기뇰을 잘 움직여주는 만큼, 그들은 나를 의식하게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