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당황한건진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물을 의미도 없었다. 두어번 나른하게 눈을 비비고 잠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여유롭게 시선을 올리던 중 시선이 마주친 눈을 예쁘게 휘어보였다. 그래.헤이타라는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겠지. 지레짐작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태도가 내 예상에 확신을 주었다. 역시 둘은 남매였구나. 그리 생각하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자꾸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어쩔 수 없이 헤이타를 건드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직접적으로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혈육인 이상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인연일 것이다. 타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건드리는 것 만큼 재밌는 일은 없지만 아끼는 장난감이 더욱 망가지는 건 싫었다. 그러니까 헤이타에 대한건 잠시 보류.
"응, 사이카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 난 우리 사이카에게는 관대한 편이잖아? 이번만 넘어가줄게?"
하지만 다음은 없어. 웃는 낯을 지우고 차갑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앞으론 말을 무시하지 말고 항상 방긋 방긋 예쁘게 웃는 표정을 보여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이다. 나 자신도 내가 그녀에게 무얼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시시때때로 생각이 바뀌는 터라 그 기준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다가도,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 말에 순순히 따르기를 원하면서도 가끔은 무덤덤하게 반항해주었으면 좋겠다. 한 가지 확실한건 일반적인 타인을 대하듯 그녀를 대하고 싶진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난 그녀에게만큼은 관대했으니까.
"네가 그걸 원한다면 당연히 용서해줄게. 하지만 미리 벌을 줘야겠지?"
난 비참하기 싫거든. 진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용서따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대신 벌을 줄 거야. 손목에 묶어두었던 얇은 비단끈을 풀어냈다. 조금 더 가까이 밀착해 벚꽃이 수놓아진 그것을 그녀의 목에 부드럽게 둘러주었다. 이걸로 넌 내가 이 학교를 나가기 전까지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좋든 싫든 내게 시달리게 될 거야. 그게 내가 주는 벌이야.
어제 알타이르 학생도 추종자였죠. 눈 앞의 도윤 학생도 추종자란 사실에 유키마츠 교수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응답했습니다. 박수라는 밝은 목소리와 참으로 대조되는 목소리로군요.
' 아. .... 아? '
연약한 자신이 아파한다는 도윤의 외침에 저도 모르게 손의 힘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팔을 뿌리친 것을 잡지 못했던 겁니다.
' 무슨... ! '
교수님은 제게 날아오는 불길에 팔 한 쪽을 다시금 희생했습니다. 유카타의 소매 한 쪽이 펄럭이고, 지팡이를 쥔 손은 멀쩡합니다. 한 쪽 팔을 얼리긴 했어도 불안정합니다. 별 수 없죠, 그대로 물이 되는 걸 가만히 보던 그는 지팡이를 쥐었습니다. 불길은 뜨겁고, 설녀에게만큼 맹렬한 공격이 되는 것은 없죠. 물이 뚝뚝, 떨어져서 웅덩이를 만듭니다.
이걸로, 유키마츠는 가장 자랑하던 쪽 팔을 일단 잃었군요.ㅡ요괴여서 큰 치명상은 아닐지도 모릅니다ㅡ 유키마츠 교수가 지팡이를 손톱으로 긁듯 갉작였습니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히이라기 지팡이에서 무언가가 투둑, 떨어졌습니다.
' 잡종... 이라.... '
그르렁거림을 넘어서서 목에서 나오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기괴한 목소리가 유키마츠 입에서 새어나옵니다. 그렇죠, 그는 인간인 척을 하는 요괴였으니까요. 어떻게 할건가요, 유키마츠 교수? 검을 휘두를 겁니까?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다홍색의 섬광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뒤늦게 몸을 피하지만, 절개마법이 정확히 어깨에 명중하고 만다. 날카로운 고통이 상처부위에서 쏘아져 올라온다.
아프다. 아프다기보다도, 불쾌함이 엄습해온다. 있어서는 안 될, 부자연스러운 것이 자신의 몸에 작용했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다.
어렸을 적에는 이 거부감을 훨씬 날카롭게 느끼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1학년 때 마법 운용에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도, 결국에는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둔해져서, 이런 것도 할 줄 알지.
"Evanesco." .dice 1 2. = 1
바닥에 쌓여 있는 지팡이 더미에 소멸 마법을 건다. 에바네스코. O.W.L.과정에서 배우는 가장 복잡한 주문중 하나다. 성공률은 낮다.
만화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어깨에 입은 상처는 상처 축에도 못 들지만,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다. 어깨 근처에는 경동맥이 지나가고, 또 신경 다발이 뭉쳐 있다. 싸움에서 위험하지 않은 상처는 없다,고, 이 모든 걸 어렸을 적 누군가에게 배웠었다. 더군다나 이 상처는 마법에 의해서인지, 지혈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빨리 끝내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에, 말하자면 무리수를 둔 셈이다.
소년은, 다홍색의 섬광이 지애의 어깨를 베면서 지나가는 것을 무감각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느릿하게, 제 지팡이가 아닌 타인의 지팡이로 한 것치고는 깔끔하게 먹혀들어갔다. 애초에 소년은 치명상을 입힐 생각으로 마법을 쏜 게 아니니까. 그럼에도, 겉이 모조리 망가져서 부서진 조각들을 긁고 모아서 만들어놓은 겉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소년은 지애에게 심한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역력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에바네스코. 그러니까, 소년은 느릿하게 깜빡이며 바닥에 쌓여있던 지팡이가 소멸하는 것을 바라봤다. O.W.L. 그렇군. 소년은, 상대가 자신보다 선배임을 인지했다. 느릿하게 깜빡이던 서늘하리만치 공허한 눈동자가 지애를 향했고 소년은 쨍하니 울리는 환청에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면서 결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소매의 단추를 풀었다. 걷어올리는 손길이 느렸고, 무심하다. 반듯하게 걷어올린 그곳에는 과연, '그' 의 추종자임을 알려주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당-연하죠!왠지,이쪽이 재밌을거 같잖아요?게다가 전 원래부터 순혈이었다구요!추종자 측에 붙는게 훨씬 유리한거 아닌가요?게다가...게다가 나는 그쪽 녀석들한테 큰 굴욕마저 당했어.그런데도 추종자의 편에 서지 않겠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구요!아하핫,근데 교수님 목소리가 많-이 안좋아 보이시네요!괜찮으심까-?"
꺄하하핫.하고 웃으며 제 허리에 손을 척 얹었다. 여전히 평상시와 다름없이 밝은 텐션이었다.자신이 추종자라는 걸 알고 이를 갈며 답하는 교수님과는 확연히 정반대인 모습으로. 그리고 자기 마법이 명중하자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하하하핫,어때요?저 이 정도면 많이 성장했죠!"
이거 너무 성장해서 교수님마저 이겨버리는 거 아니려나~하고 장난스럽게 덧붙여 말하고는 새어나오는 기괴한 목소리에 잠깐 주춤 하더니만 곧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요,잡종들.머글의 피가 섞인 벌레들!하등한 종족!당신들을 그거 말고 더 뭐라고 표현해야 하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장해제 마법에,다시금 그때 그 일을 떠올렸다. .....싫어,이번에도 그렇게 허무하게 질순 없다고.절대로 그때처럼 되지 않을거야.절대로.절대... 웃음기를 살짝 지우고,약간의 진지함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