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양의 돼지 갈비 위에 손브이를 한 사진)] [갈비 먹는 중!] [엄청 맛있어 (o´〰`o)]
[그래.]
나츠미는 한국에서의 휴가를 잘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점심시간에 온 라인 메시지에 이미 식사를 마친 나는 정나미 없는 답변을 돌려주고 말았다. 좀 지나면 성류시에 오겠지, 이 녀석. 오면 무슨 이야기부터 하면 좋은 걸까. 몇 년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대면하는 건데. 그나저나 이 녀석, 확실히 많이 밝아졌네. 그 때의 펑펑 울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워질 정도다. 뭐, 좋은 변화다. 호시야마 나츠미로서 앞으로 탈없이 잘 지내도록. 그 녀석의 셀카로 설정된 프로필 사진을 흘깃 보며 나는 옅은 미소를 조용히 지었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식당에서 서로 돌아와 사무실로 복귀하기 전에 남은 점심시간동안 서장님에게서 허락을 받아 얻은 방 안에서 정자 모형을 조립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충분히 완성시킬 수 있다. 주변에 대한 건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계속 조립해나갔다. 중간에 나츠미로부터 [에에에에에], [왜 부러워하지 않는 거야아앗 (*´∩`*)]이라는 답변이 날아와서 거기에 [나한테 그런 거짓말 시키지마]라고 대꾸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아, 왠지 복도로 나가고 싶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주저하지는 않았다. 나는 영차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풀난방을 해놓고 있는 방과는 확실히 다른, 서늘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그 때 나는 내가 나오려고 한 이유를 알았다. 시원한 공기를 쐬고 싶어서. 하품을 하며 방문을 닫아 바로 옆의 벽에 등을 기대었다. 휴대폰의 화면을 끄고 경찰복 주머니에 넣었다. 아, 시원하다. 나른한 무표정인채 고개를 살짝 들며 그리 생각하였다.
마스크 쓰고 출근한지 사흘차. 이제는 이 생활이 슬슬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아, 안되는데. 이러다 계속 쓰고 다니면 그건 그거대로 좋지 않다고. 스타일이 전부 바뀔 거 아냐. 이런 젠장.
어쨌든 오늘도 검은 마스크에 얼굴을 반 가린 채 무난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랄까, 외근을 삼가고 자리에만 앉아 서류작업만 주구장창 하고 있는 것 뿐이었지만.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었고, 가져온 스프로 적당히 끼니를 떼운 나는 뻐근한 몸을 풀 겸 서내를 천천히 걸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
적당히 걸친 후드집엄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설렁설렁 걷는다. 바깥 추위와는 거리가 먼 실내를 천천히 걷다가 복도 벽에 기댄 사람을 발견했다. 덥수룩한 머리와 생기없는 얼굴이 인상적인 그는 분명 최근에 들어온. 아키모토 센하, 였을 것이다. 기억이 맞다면.
"...안녕."
마주친 마당에 그냥 지나가기도 뭣해서 가벼운 인사만 툭 건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것은 아니어서 그 뒤로 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셈이었다. 말이 있어도, 어떨진 모르지만.
나는 멍 때리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래, 지금처럼 멍 때리는 일. 가끔씩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 실제로도 멍을 때리는 건 뇌의 휴식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고, 뭐.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공기의 감각 외에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기분이다. 이러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면 망하는 거고, 아니면 다행인 것이다. 과연 결과는 어느쪽이 될지 결말을 보기도 전에 짧게 툭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고개를 내리고 광기를 감춘 거만하고도 온화한 자색 눈동자를 그쪽으로 옮겼다. 아, 과연. 팀원이다. 아롱범 팀의 데이터베이스를 떠올렸다. 후드집업을 입은채 마스크를 쓰고 이쪽을 바라보는 붉은 눈의 주인은,
"첸들러 씨인가요. 안녕하세요."
그렇게 대답하며 벽에서 등을 떼 제대로 섰다.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예전에 알파와 베타를 체포하던 날, 내가 던진 나이프의 폭발을 불의 소용돌이로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람을 일으킨 사람이다. 불현듯 그 때의 절경이 뇌리를 스쳐지나가 나는 일순 미소를 살짝 지었다. 아, 그래. 물론 절경이었지. 그 불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제가 누군지는 아시겠죠? 라고 덧붙이며 아키오토 센하라는 이름은 굳이 소개하지 않기로 하였다. 시선이 그녀의 마스크로 잠시 향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의미없는 가짜라고 한다면,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전부 의미없는 가짜라고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배신감을 느낄까? 절망을 느낄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허탈한 무언가를 느끼게 될까? 이 세상은 익스퍼를 숨기고 있다. 그렇기에 익스퍼가 아닌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들이 전부 허상이고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바로 지금 이렇게 옆에 누군가가 익스퍼일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익스퍼를 모르는 이들은 바로 옆에 있는 이가 신기한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
이 세상은 질서라는 이름 아래에서 수많은 것을 숨기고 모든 것을 거짓으로 뒤덮고 있다. 하다 못해 지금 내가 있는 이 곳. 성류시마저도 수많은 거짓으로 뒤덮여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제대로 아는 이는 나와 그 사람 뿐.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델타'. 내가 누구보다도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델타'. 그 사람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거짓을 숨기기 위해서 꽤 노력을 하지만 나는 그 노력조차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다.
리크리에이터. 사용해서는 안되는 힘을 그들은 사용하고 있다. 월드 리크리에이터의 힘을 사용해서. 자기들이 뭔데... 너희들이 뭔데...그 힘을 사용해? 그것을 볼 때마다 이가 빠드득 갈린다. 이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이 거짓된 이유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당신들은 그런 말을 하면 안되지. 허울좋은 거짓말이나 하는 이 세계. 그리고 이 도시. 모든 것이 가짜이고 거짓 투성이다.
그렇기에 R.R.F는 일어섰다. 모든 거짓을 없애고,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서. 해방자의 송곳니는 그 무엇보다도 날카롭다. 그 과정에서 따르는 희생 따위, 알바 아니다.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한 숭고한 희생을 기억은 해주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멈출 생각은 없다.
모든 것은 월드 리크리에이터를 손에 넣어야만 이룰 수 있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지금 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이 거짓으로 이뤄진 이 도시와 이 세계. 그것은 만들어진 무대인 연극 무대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만들어진 거짓된 무대. 연극 무대를 우리가 이용해서 끊임없이 우리들의 각본대로 배우들을 움직이게 하겠다고... 그렇다면 반드시 그 무대의 진짜 관리자들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려고 하겠지. 리크리에이터를 이용해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더욱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월드 리크리에터. 세계를 개변할 수 있는 기적의 힘.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어야만 했다. 그 어떤 희생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 어떤 소리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무대 위에서 억제력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표범... 아니, 아롱범이 몇 마리가 짓밟힌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더 이상 그저 유희거리로 지켜볼 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짓밟아서 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그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이 세상을 뒤덮은 거짓이 사라지는 모습을... 그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인사를 건네고 잠시 비뚜름히 서 있으니 단조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부르는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눈썹을 움찔했지만, 그 외에는 여타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성은 듣기 거북하니까 이름 쪽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역시 그냥 넘기기는 뭣해서 한마디 했다. 살짝 갈라져 나온 목소리에 크흠, 헛기침을 하고 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보랏빛 눈이 꽤 인상적인 모습이다. 그 눈을 보고 떠올렸다. 알파&베타 케이스 때 그와 내 익스파가 합쳐져서 어마어마한 뱐향을 일으켰었지. 아, 그때가 참 좋았는데.
누군지 아느냔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감기냐는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비슷한 거."
병이라면 병이고 체질이라면 체질이겠지. 아리송한 말을 덧붙이며 눈을 깜빡인 나는 잠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또다시 툭 말했다.
"그 때, 덕분에 좋은 구경 했어.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한번 해보지 않겠어?"
그 때라는 건 화염 소용돌이를 일으켰던 그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고서야 알아듣겠지. 그 전제하에 말하곤 어떠냐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사실 하윤이가 리크리에이터를 들을 때마다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고 말해서... 자장가 같은 곡을 기억하는 이유는 보통 부모나 가족이 불러주는 걸 기억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것에 집중하다보니 엄마설로 생각하고 있지만요...(그리고 장렬히 틀리고....(흐ㅡ릿)
말끝을 살짝 흘리면서 첸들러 씨를 조용히 응시하였다.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성은 듣기 거북하니 이름쪽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단다. 흐음, 이라며 능청맞은 무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손해 볼 것도 없고. 그러죠, 울프 씨."
성을 부르는 게 더 익숙한 자신이었지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이어서 내가 던진 질문에 비슷한 거라고 그녀는 대답하였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병이면 병이고 체질이면 체질이라는 모호한 말인데, 대충 지병인가 속으로 어림짐작해보았다. 겉으로는 "그런가요. 힘들겠네요" 라고 대충 받아넘겼다. 상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다른 화젯거리를 툭 꺼내왔다. 좋은 구경이라. 그 때의 불꽃을 말하는 거겠지.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다시 해보자고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뒤틀린 미소를 옅게 지으면서 시치미를 뚝 떼었다.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사람 잘못 찾으신 모양인데요?"
물론 일순간이었지만. 기분 나쁘게 입 근처에 손을 올리고 히죽거렸다. 그 절경이 이번에는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그 때의 그 불보다는 작았지만.
"...아아, 절경이었죠. 당신도 그게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네요."
말하고는 웃음을 작게 터뜨린다. 조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조금 후에 웃음소리는 그쳤다. 하지만 그 섬뜩한 미소는 여전히 입가에 머금은채로,
"그래요. 언젠가 다시 해보죠."
라고 수락하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아아, 또다. 차갑게 표정을 지웠다. 그러고는 입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