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님께 여쭤보니 빈 방이 얼마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긴 전 학년이 일주일동안 여행오게 되었으니 사람이 보통 북적이는 게 아니리라 짐작은 했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2층에 큰 방이 남아있다는 말을 듣고 냉큼 그 방으로 결정했다. 담이가 큰 방을 원했으니까, 그래도 어찌저찌 큰 방이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네가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키를 받은 뒤 매점으로 가 조용히 너를 불렀다. 담아, 잠깐만.
"있대. 2층에. 사람 많아서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
방이 있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네게 키를 보였다. 일단 방은 한 시름 놨고, 다음은 세면용품인가. 클렌징폼이야 아무거나 써도 상관없으니 작은 여행용품세트와 여분의 수건 몇장을 사기로 했다. 대부분 온천에 비치되었을테니 큰 수건은 만일을 대비해 딱 하나만. 과자같은건 씻은 뒤에 사도 늦지 않겠지. 한아름 봉투에 담아들곤 네게 손을 내밀었다. 산 거 이리 줘, 내가 들고 올라갈게.
//>>685 괜찮습니다ㅇ__ㅇ!!! 저도 이제야 집에 와가지구 쫌 곰손되버렸거든요ㅠ____ㅠ... 후 그보다 소담이가 너무 귀엽네요 저 잠만 심쿵하고오겠습니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오늘부터 1주일간 여명으로 자유롭게 놀러가도 된다는 공지가 떨어졌다. 얼마전 이런 저런 사건이 일어난 탓에 학원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는데. 학생들의 기분이라도 풀어주려는 것일까. 갓 입학한 신입생들은 여명으로의 여행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썩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평소 여명에 자주 들리는 편도 아니었으며 여명에서 별 다른 재미조차 찾지 못했다. 가끔 간식이 떨어졌을때 넥타르 과자상점에 들러 간식을 보충하러 가는 정도? 그래서 이번에도 여명에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요즘따라 너무나 따분하게 느껴지는 학교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간만에 들려보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여명에서 시간을 보내는건 무척 심심한 일이다. 내 심심함을 덜어내기 위하여 유채헌과 기숙사 휴게실에서 만나 함께 여명에 가자고 미리 약속을 잡아놓았다. 교복을 입고 가도 상관은 없었지만 간만에 사복을 입고 외출하고 싶었기에 새로운 마음으로 옷장을 열어보았다. 평소 사복을 입을때면 항상 남성용 기모노를 고수해왔다. 다만 오늘은 기분전환을 하고싶어 평범한 사복을 택하기로 결정. 잘 다려진 검은색 와이셔츠에 검은 슬렉스를 맞춰 입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버건디색 오버코트를 셔츠 위에 걸쳤다.
"미미쨩 제발 좀 닥쳐줘."
뭐가 불만인지 내 패밀리어인 뱁새 미미쨩이 하염없이 지저귄다. 배고플까봐 모이도 제대로 줬는데. 왜 저러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랜만에 바깥 바람이라도 쐐게 해주고 싶어 미미쨩도 함께 데려갈 생각을 하고있었지만 내 심기를 건드린 대가로 하루종일 새장 안에 넣어두기로 했다. 새장에 갇힌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더욱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를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아씨오, 노예."
노예면 노예답게 미리 나와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게 정상아닌가? 마음에 드는게 하나도 없다. 코트 안주머니 넣어둔 지팡이를 꺼내어 재미삼아 아씨오 마법을 외쳐보았지만 역시 통하지 않는다.
"아씨오, 유채헌."
가능할리가 없지. 제발 사람한테도 통하게 누군가 아씨오 마법을 상향시켜줬으면 좋겠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유채헌이 나타나면 날 기다리게 만든 벌로 엄청 괴롭혀줄 생각이다.
이거 그거 같은데. 정치인들의 비리를 막기 위해 유명 아이돌의 열애설을 터트리는. 1학년이었다면 여명에 가도 된다는 소식에 흥미를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4학년이 된 지금까지 기뻐할 정도로 유채헌이 여명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출입이 금지된 학년이라면 몰라도 유채헌은 이미 작년부터 출입이 허가된 상태였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기숙사도 조용할 테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약속이 잡혀서. 준비를 끝내고 옷장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코트를 고르니 가을에나 입을 법한 얇은 코트였다. 여명에 눈이 쌓였다고 했나. 그렇다고 해도 유채헌의 옷장에는 패딩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중에서 보온을 보장할 만한 옷이 없었다. 유채헌은 결국 처음 잡은 코트를 입었다. 추우면 마법이라도 사용할 심상이었다.
침대 가운데를 차지하고 누운 나나를 보고 헛웃음을 지은 채헌이 나나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나나가 채헌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하여간 이름을 지을 때 나나가 아니라 상전으로 지었어야 했다. 평소에 채헌이 나갈 때는 별 관심도 없었으면서 여명을 갈 때가 되니 애교를 부렸다. 간식이나 사오라는 뜻이었다. 사실 어떻게 부르든 원할 때만 대답을 하니 이름에는 의미가 없었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나나와 놀아주는 것을 그만 둔 채헌이 책상 위에 둔 향수를 들어 손목에 두어번 뿌렸다. 신발까지 마저 갈아 신은 채헌이 방을 나서 느긋한 발걸음으로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 가니 사기노미야는 벌써 내려온 듯 아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를 향해 걸어가 사기노미야의 앞에 섰다.
"노예 왔다."
아, 시종이었나. 허리를 살짝 숙여 내려다보니 앞머리가 계속 볼을 찔렀다. 귀찮아서 머리를 묶는 대신 대강 손질만 하고 왔는데 영 거슬렸다.
세연주: 주당 900갈레온... 2주만 모아도 트리위저드 상금보다 거의 2배로군.. 게다가 세연은 오늘 여명에 처음 가고.. 음. 이것이 막대한 자금력..? 세연: 그정도로 써도 바닷물에서 한 컵 뜬 정도도 안 되는걸요. 하기야. 그것도 있는데다가. 사라진 분파들의(만들어진 시기나 그들 자신이 하고 있던 사업들을 생각하면..) 막대한 재산을 환수한 것도 있으니..정말 현무에 전원 파이어볼트+옵션 빵빵하게 넣어주는 것도 고려해봐도 좋을지도요.. 세연주: 근데 그거 들고 다니는 것도 고역이지 않아..? 세연: 잔돈을 안 받으면 되는걸요. 세연주: 잔돈이라도 주세요.
짜증나. 작게 중얼거리며 꼬았던 다리를 풀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유채헌을 마주본채 똑바로서 노예로써 태도가 잘못되어 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역시 평소엔 약속시간을 제대로 맞추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3일 노예가 생긴 기념으로 특별히 시간을 맞춰줬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추호도 몰랐다. 지각한 벌을 줄까 했지만, 휴게실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기에 심드렁히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충분하고 여명에 도착한 이후 벌을 내려도 늦지 않다.
"가서 뭘 할 생각이야? 노예면 노예답게 미리 일정표 정도는 짜왔겠지?"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의미없는 발걸음을 옮기는건 사양이다. 안 그래도 요즘 날이 추워졌는데. 추운날 야외에서 오랜 시간을 걸어다니는건 딱 질색. 그래도 감기에 걸리는건 나쁘지 않다. 더 아픈척 하며 병동에서 시간을 떼울 수 있었으니까. 일단 넥타르 과자상점에 들러 간식거리를 구입한 뒤, 나머지 일정은 전반적으로 그녀에게 맞길 생각이다. 휴게실 문앞에서 슬쩍 고개를 돌려 유채헌을 쳐다보았다.
"넌 맨날 똑같은 향수만 뿌려? 향이 늘 같은데."
익숙한 잔향에 갑자기 궁금증이 들어 질문해보았다. 유채헌과 함께 있을때면 항상 같은 향기가 멤도는 걸로 봐선, 사용하는 제품이 고정돼 있는게 확실하다.
원래대로라면 양 손에 빼곡히 안아들고 올 생각이었지만 둘 다 봉투에 담아왔기도 했고, 무엇보다 네가 오른손을 잡았으니 됐다. 담이 손 따뜻하네, 오른손에 눈길을 주며 작게 속삭인 뒤 키를 네게 건넸다. 213호, 213호.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곳이 아니기에 조금 더 걸어야 했다. 키는 네 손에 들려있었기에 문을 여는 건 네게 맡겼다.
"여기구나. "
문을 열고 처음 들어간 건 나였고, 문을 닫는 것 역시 나였다. 네가 들어간 걸 본 뒤에야 방문을 잠궜다. 대실한 방의 내부는 꽤 만족스러웠다. 창 밖이 워낙 절경이기도 했고, 방이 넓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놀란 부분은 침대 사이즈. 사람 2명은 무슨 3명도 더 누울수 있을법한 크기다. 2명만 누워도 충분한데 너무 큰 방을 고른 게 아닐까, 어쩐지 빌릴때 돈이 꽤 나오더라. 이정도까지는 필요없다 싶었으나 네 미소를 보고 그런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네가 좋아하니 그걸로 됐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고른 것 같지, "
나도 좋은 거 같아. 나직이 덧붙이곤 탁자에 목욕용품들을 내려놓고 코트를 옷걸이에 걸었다. 코트 이리줘 내가 걸게. 빨리 짐을 두고 온천에 내려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너무 시간을 뺏겨봤자 좋지 않다, 그건 담근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어제 NO의견 NO인권을 외치던 게 누구였더라. 대답을 내놓고 머릿속으로 여명에 있는 가게들을 떠올려냈다. 넥타르, 귀곡산장, 술집, 술집, 술집… 찻집? 아무래도 학생들이 많다보니 검사가 빡셀 것 같아 여명에 있는 술집은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한 번 가면 기숙사 점수와 채헌의 평판이 깎여나갈 건 확실했다. 둘 다 채헌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 귀곡산장. 채헌도 소문으로만 듣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유명한 장소였다.
"귀곡산장 갈래? 선택지상 술집도 있긴 있는데."
동화학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괴담을 꽤 읽었는데, 들어 온 이후에는 귀신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한창 이상한 음료가 유행할 때 채헌은 유령에게 용돈을 받기까지 했다. 그래도 귀곡산장은 유령들조차 가기를 꺼려하는 정도라니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술집은… 솔직히 반쯤 농담이었고.
"어, 계속 같은 거 써."
충동적으로 백화점에 갔을 때 산 향수 치고 마음에 들어 오래 쓰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향이 진하게 남아 향수 냄새로 채헌이 휴게실에 있었을 것이라며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사실 향수 설명만 들으면 클래식한 것을 추구하는 남성을 위한 향수였다. 그걸 읽은 채헌은 향수에 성별을 따지는 멍청한 놈들이라며 무시하고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