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괴롭힘당한 적은 없겠지. 유심히 그녀를 지켜 보다가 우선은 넘어 가 보기로 한다. 혹시라도 누가 시이를 괴롭히려 든다면 미리미리 잘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솔직히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찔렸다. 이미 아나이스는 일거리를 내버려둔 채 종종 쉬기도 했고, 도망도 많이 쳤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제 행동에 정당성을 얻은 기분이였다. 앞으로 더 열심히 떠넘겨야겠다. 벌써부터 다른 이들의 원망 서린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더 열심히 쉴 테니. 네 말은 잘 들어야지."
꽤나 기분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어깨를 주물러주는 그녀의 행동에 작게 눈웃음짓는다. 다친 팔은 좀 아파왔지만 이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팔 때문에 안마받는 걸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은 없지, 당연히."
일을 떠넘기는 걸 빼고도 다른 짓을 벌이면 그만이니까. 어디까지나 사실을 얘기한 것이기는 했다. 조금 말을 숨겨버리기는 했지만.
"안마를 받았으니 난 뭘 해줘야 할 지 모르겠네. 지금 줄 수 있는 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손을 뻗어 안마를 하던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입맞춘다.
"기뻐서야? 우리한테는 아냐. 우리 종족은 그걸 아픈 걸로 판단해. 감기나, 뭐 그런거 말이야"
멍멍. 짖으며 그녀를 쳐다보던 늑대는 아리나의 손이 허공을 맴돌자 꼬리를 움직여 그녀의 손을 향해 가져다 댄다.
"잘못 없는거야? 헤헤. 다행이야."
기쁜 듯이 눈꼬리를 휘며 꼬리를 살랑이던 늑대는 아리나가 긍정하는 것마냥 좋다고 말하자.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며 그녀를 쳐다본다.
"........후회할꺼야."
폴짝. 그녀의 위에서 뛰어내린 늑대는 6~7걸음 떨어진 곳까지 터벅터벅 걸어간 뒤 인간의 형상에서 늑대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꾼다. 바뀐 모습은 어린 늑대의 그것이 아닌, 아리나와 거의 맞먹을 크기의 거대한 늑대. 눈을 감고 꼬리로 앞발을 감싸며 앉아 있던 늑대는 은빛 눈을 반쯤 뜨며 지그시 그녀를 쳐다본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내뱉으며 힐끔 거울을 곁눈질 해보았다. 저 놈은 거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건가? 무슨 종족이지?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거울 안에서 살고있는 종족은 한 번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일단 거울 속의 저 남자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 존재자체에 흥미가 끌리는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하는게 인지상정이라는 남자의 말에 찡그린한 얼굴로 희미하게 고개를 내젓고는 이번엔 조금 깊게, 거울 안을 들여다 보았다. 예법에 맞춰 정갈한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 아주 조금은 기분이 풀린듯 찡그린 표정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꾸었다.
"네 놈의 이름따윈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이 몸이 네 놈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없을테니까. 엘라리스 타뷸라 루나티아, 귀족정이다."
본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내 흥미를 끌었단 사실이 기특하게 느껴져 나 역시 간단하게 내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지나가던 거울이라니. 본래부터 거울로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마법으로 인해 탄생한 물건인가. 호기심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기한건 저 남자가 있는 공간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바뀐다는 것이다. 화려한 침실이 비춰지더니, 어느새 평범한 거울처럼 내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고, 이내 다시끔 저 남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조금 놀란듯 흥미로운 눈길로 거울을 바라보며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네 놈은 흥미롭다. 일단 이 몸의 흥미를 끌었단 것은 칭찬해주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해야할 것이 있다. 네게 흥미를 느낀건 사실이지만, 난 네 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끔 인상을 찡그린채 그의 말대로 거울 속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엔 어떤 행동으로 날 재밌게 해줄 생각이지? 고작 거울 따위에 흥미를 느낀다는 생각에 문득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제와서 그런건 어찌되든 상관 없었다.
기대하지 않고 허공에 내민 손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자 아리나는 어쩔줄 몰라하며 에일린의 털을 쓰다듬었다. 아리나는 처음으로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폭★☆발 했다.
”후회? 아리나는 후회하지 않아!“
꽤나 자신만만하게 답한 아리나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늑대가 자신의 폼에서 떨어져 나가자 느껴지는 허전함에 아리나는 몇 번 자신의 몸을 톡톡 쳤다. 사실은 이게다 꿈이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면 정말 자신이 미쳐버려서 망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리나가 자신의 몸에서 다시 에일린에게 향했을때에는 거대한 늑대가 있었다. 거대한, 늑대. 아리나는 현실감 없는 관경에 잠시 눈을 끔뻑거렸다. 이내 그녀의 무표정은 극적으로 바뀌는 것이었는데.
”멋져!“
에일린이 걱정하던 것과 다르게 밝은 표정으로 바뀐 것이다. 아리나는 겁도 없이 이 듬직하고 늠름한 늑대의 주위를 돌고 있었다.
소년은 부모님의 이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아버지를 닮았단 이유만으로 쏟아지는 폭력과 때때로 찾아와 미안하다며 우는 어머니가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소년에겐 득보다 실이 더 크기는 하겠지. 그렇지만 응당 사람이라면 사람의 불행, 특히 친지의 불행엔 공감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소년은 이럴 수는 없다며 울부짖는 어머니를 보는 동안 자신을 매우는 통쾌감과 기묘한 고양감, 그에 비교하면 아주 보잘 것 없는 연민에 크게 당황했다.
"시몬, 시몬아! 내 불쌍한 아가!!"
봄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꽃이 여름의 저림과 함께 져버렸다. 독화의 향기는 지독했기 때문에 저택의 어떤 사람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안녕하셔요"
그러나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피어나기 마련이다. 어떤 여자는 시몬을 무시했다. 다음 여자는 시몬을 보면 언제 절 내쫓을까 두려워 시몬을 피하기에만 급급했다.다다음 여자는 어린 혈기를 이용하고자 의붓아들의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렸다. 하나같이 독화들, 겉모습은 아름다울지언정 향기가 지독해 코를 찔렀다.
"전 아리아드나 이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눈이 맑고 맑간 뺨이 보드라워 보이는 여자였다. 당장 앞에 놓인 고깃덩이조차 썰지 못해 찬찬히 알려줘야 하는 꼴이 어디에서 아버지의 구미를 당겼는지 눈에 선하다. 올라오는 구역질에 시몬이 냅킨으로 제 입을 닦았다. 어색하게 제 눈치를 보는 새어머니, 스물두 살쯤 된 아리아드네 씨가 시몬의 만들어진 웃음에 그제서야 살포시 미소를 지어냈다.
"시몬 아셰드입니다."
곧 이 저택에서 사라질 이다. 지금이야 아낀다고 해도 얼마 안 가 돈 몇 푼 손에 쥐여주고 내쫓을 제 아비를 알았다. 저 자리는 곧 다른 누군가로 채워지겠지. 저 맑고 어여쁜 낯짝을 쳐다볼 수 없어진 시몬이 접시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 어미의 상실이 채워지기도 전 저 같은 것이 집구석으로 기어들어야 죄송하다던 이가. 거짓을 속삭이는 제 아비에 속은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정략으로 맺어진 여자가 박정하게도 제 자식에게 정 하나 안 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하는 이가 이 저택에서 버틸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시몬이라고 불러주세요."
멍청한 시몬 아셰드. 시몬은 사랑스러운 이를 가여워하지 않는 법은 알아도, 가여운 이를 사랑스러워하지 않는 방법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