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한다. 아니, 애원한다. 어깨에 기대어오는 상냥한 충돌이 신체의 무수한 상처들로 인해 고통이라는 형태로써 전해져온다. 그럼에도 그녀의 진심어린 간청이 똑똑히 들려왔다. 레이첼은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서도 몇 안되는 인연이다.이정도라면.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나의 고집되고 무식한 신념따위 접어두고, 저 인간을 먹으러가도...
"...비비안."
혈액이 흥건한 손으로 나직이 읊어낸 그 이름의 주인을 끌어안았다. 마음을 다 잡아야했다.
"바보 같은 여자. 나도 너 만큼만 바보 같았다면 좋았을텐데. 마음 편히 저쪽의 시체를 탐하러 간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확실히 나는 환상종이다. 마소를 얻지 못하여 죽어가는 불쌍한 환상종. 나 스스로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이 저주를 받아 들이는 날, 나는 결심한거다. 절대 날 이렇게 만든 이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겠다고. 그 길을 부정한 자로서 증명 해보이겠다고. 인간을 먹지 않고도 살아남아 보이겠다고."
레이첼이 비비안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내어 눈과 눈을 마주쳐 응시했다. 부상으로 인해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도 결의가 깃든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비비안. 난 죽지 않는다. 네가 내 곁에 있는 만큼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환상종의 길을 걷는것을 택했듯, 나는 이쪽 길을 택했다. 그것이 삐뚤어진 길이라고 해도 나는 그곳을 걸어야만 했다. 이 뱀파이어가 그걸 믿어주었으면 했다.
거울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색은 금빛, 놀라울 만큼 화려하고, 빛이 난다. 보석이 절제 없이 박혀 있다. 판다고 해도 산다고 해도 가격이 몇 자리수를 넘어갈지 모를 이 거울은, 드는 사람 하나 없음에도 자유롭게 움직인다. 거울 안에는 사람이 있다. 열댓살 정도 되었을까 싶은, 아름다운 금발의 소년이다. 거울 한 구석에 박혀 있는 루비가 떠오르는 붉은 눈을 빛내며 거울 바깥을 보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주변에 사람은 없다. 인적도 드물고, 어두운 곳이다. 더불어 위험한 곳이다.
일단 한 번 만나보고 총을 쏴야지. 속으로는 이런 살벌한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전혀 무해할 것 같은 웃음을 짓고 있다. 에일린이 갑자기 고래를 내밀고 멍이라고 짓자 아리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 돼, 진정해 심장. 얼마나 열심히 마음속으로 심장을 채찍질하고 있던가, 팔에 느껴지는 온기에 다시 눈을 뜨고 에일린을 바라본다. 고개를 끄덕이는 에일린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헨리에게 근력으로 일방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난 아리나야. 넌 이름이 뭐야?”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아리나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에일린을 빤히 바라보고있었다. 그 때였다. 에일린이 자신의 손에 킁킁커렸다.
“어... 일종의 자기 방어라고 해야 하나.”
아리나는 조심히 자신의 손을 들어 에일린을 다라 킁킁거렸다. 옅은 화약 냄새가 났다. 좋아, 다음부터는 온몸에 꿀을 바르고 와야겠다. 아리나는 말도 안 되는 다짐을 했다. 다시 자신의 꿀을 할짝이는 에일리을 지긋이 바라보던 아리나가 질문을 던졌다.
>>531 상대가 자신의 본체를 보면 싫어할 것 같아서죠. 거의 사람만한 거대한 늑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쫒아다니는 꼴이니, 어떻게든 상대와 비슷한 형태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네발짐승이 자신을 좋아한다. 보다는 늑대 귀와 꼬리가 달린 남성이 자신을 좋아한다. 가 그나마 나으니까요.
에드윈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꽃을 자주 줍니다. 거울 속에 있는 저택, 그 정원에서 피어난 꽃이라 살아있는 건 아니지만, 에드윈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과거 사랑했던 사람이 기뻐했던 일입니다. 꽃을 준다거나, 예쁘다고 해준다거나, 대화를 자주 건다거나.
>>532 개체마다 마소 회복량이나 거기에 느끼는 손실감각도 다르다고도 하니까~ 레이첼의 경우엔 그게 극심한 편이고, 프라이머리를 사용하면 마소가 빠져나가니까 고통 받게끔 설계되어 있는거지~ 전투를 하면 굳이 초장부터 프라이머리 안 쓰고 칼이랑 같이 깔짝거리는 이유가 바로 이 것!
아리나는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데릭을 노려보았다. 사실 이런 말 많이 들어봐서 더 이상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왔을 뿐. 아, 또 목소리가 들린다. 아리나는 웅웅거리는 머리를 몇 번 긁고 데릭을 바라보았다.
“음? 너 팔 다쳤어? 다쳤는데 왜 등산을 와, 이상한 놈이네.”
관찰력이 조금만 있다면 금방 알 사실일텐데 아리나는 몰랐던 모양이다. 얼마나 남에게 무관심한 건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뒤로 이어지는 말은 데릭의 신경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정작 아리나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데릭의 이름을 듣고 아리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이단심문관중 한명이었겠지.
“그래? 우리 자주 만나겠네. 그때 만나면 이거 한번 더하자?”
아리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쪽 눈으로 윙크를 했다. 참으로 소름 돋는 관경이었다. 아리나는 내려가는 데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