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참 끈질기게도 반복되는 악몽이었다. 꿈을 꾸고 가슴을 죄이는 느낌에 식은땀 투성이가 되어 일어나기를 벌써 몇번째였는지. 가장 괴로운 것은 아연은 이 악몽의 원인이 무엇인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시국에 대한 두려움도, 대립에 대한 불안감도 아니었다. 조금 더 개인적이고 깊이 숨겨진 뿌리가 매일의 잠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은 꼭, 무슨 일이 있어도 수면제를 받아야겠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아연은 익숙한 듯 공터를 찾는 것이었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나면 다시 잠이 올 거야.
'아.'
아연은 숨을 잡아채고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 밤 이어진 밤산책에서 자신 이외의 사람을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달이 밝아 언뜻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연은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야. 아니, 어쩌면 수업 중 마주쳤을 지 모르지만 그는 좀처럼 생각해 내지 못했다. 아연은 제자리에 굳어버린다.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적인지 아군인지 역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하필이면.
"...누구시죠."
상대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길 바라면서, 또한 자신이 누구의 손을 붙잡았는지를 모르길 바라면서 아연은 간신히 입을 떼어놓는다.
의지가 무엇이냐고 묻는 당신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했으나, 어쩐지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 의지라, 사전적인 뜻으로는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지. 하지만 네가 이걸 물어본 건 아닐테고. 글쎄.. 그 의지는 네가 앞으로 찾아야 하지 않겠어? "
우리와 함께하면서 말야. 길은 열려있다고. 그리 덧붙이는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았으나, 이어지는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사그라들었겠지. 제인은 공허한 당신의 눈을 쉬지않고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 ..그보다 싸우다 죽으라니, 너무 매정하신걸. 하나밖에 없는 아드님이 아깝지도 않으신가? 나 같으면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텐데. "
차라리 도망치더라도 살아오라고 하면 했지. 라고 덧붙이는 말은 어떻게 보면 허례허식과도 같은 빈말일 뿐이지만, 다르게 보면 여태 뱉었던 그 많은 문장들 중에서도 단연 진심이 함뿍 담겨 있는 한 마디일 것이다. 곧잘 볼을 찌르고 있던 손가락을 슬쩍 떼어내는가 싶으면, 그대로 다섯 손가락을 쭉 펴서 당신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는다. 공허한 미소가 마음에 들지만은 않았다.
" 무엇을 바라는지는 아까 분명히 말했는걸? '우리' 쪽으로 오라고. "
제인은 당신의 얼굴에 올리고 있는 손의 반대쪽 손으로 제 지팡이를 그러쥐더니, 당신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향해 "디핀도." 하고 주문을 외웠다. 당신의 손목이 베여도 상관이 없다는 건지 조심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행동이었으나, 운 좋게도 당신의 손목만은 제인의 주문을 무사히 피해갔다. 끉어진 밧줄은 바닥을 향해 힘 없이 떨어진다.
" 모르겠다면 가르쳐줄게. "
호야.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건넨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진중했더랬다. 그래봤자 곧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와선 당신의 얼굴에 올려진 손을 떼어냈지만.
타올라라.타올라라.전-부 불타버려라. 형체를 가진 것은 지옥불 속에서 그 형체를 잃을지어니. 밝게.더 밝게.더 환하게.더 강하게. 츠카사 형한테 위로를 받고,레지스탕스쪽 인원을 진이 형과 함께 급습해서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었지만,그것만으로 분이 풀릴 도윤이 아니었다. 복수할 상대에게 직접 그랬다면 아마 지금쯤 기분이 좋아져서...파이어 스톰이나 쓰고 있었겠지 뭐. 아무튼 아직은,화가 풀리지 않았다.
"..하아,도대체가 그때는 뭐가 문제였던 거냐고!"
봄바르다 막시마.인센디오.레라시오.마법을 퍼부은 자리는 이미 새까맣게 타버려서는 흉측함 그 자체였다. 슬슬 분을 삭일때도 되지 않았나?싶겠지만,이래뵈도 도윤은 뒤끝이 장난아닌 아이였다.한번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었던 상대에게는 그 수치심을 똑같이.그대로 다시 고스란히 되돌려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이었다. 절대로 잊지 않겠어.그 둘. 한바탕 소란이 이어지고서,도윤은 머음을 조금 안정시킬 겸 조금 돌아다니기로 했다. 예전부터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돌멩이를,저 멀리 차버렸다. 쳇,어딜 감히 앞을 가로막고 있어.저 돌멩이도 전에 알루미늄 캔하고 똑같은 녀석이구만?
이런, 또 다시 악몽일까. 도통 편안하게 잘 수 없는 요즘, 갑자기 잠에서 깨버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굉음. 규칙적으로, 그리고 굉장히 큰 세기로 들려오는 굉음이 날 깨운 것 같았다. 저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마 악몽을 꾸게 한 원인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저 소음공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여정을 나섰다.
한참을 돌아다녔을까, 점점 잦아드는 소음에, 소음을 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찾기 어려워지는 시점이었다.
"어, 도윤 선배..? 안녕하ㅅ..."
저 멀리서 도윤 선배가 보이는 듯 하여 인사를 건네려고 한 순간, 도윤 선배는 날 보지 못했는지 길가에 있는 돌멩이를 뻥 찼다. 그리고 꽤나 작지 않아 맞으면 조금 아플 것 같은 그 돌맹이는, 정확히 내 정강이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맞았을 때의 고통은 빈사 상태에 버금가는 고통일 것이다. 그러므로, 늦지 않게 저 돌멩이를 부숴버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