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이는 그렇게 말하곤 울먹이더니 나이프의 끝으로 제 몸을 들이대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나이프를 휘둘러 옆구리를 얕게 베려 했다. 중절모를 벗어 던져놓는 그 태도도, 뱀파이어답게 뾰족한 이빨도, 그 노을빛 눈동자도 무서웠다. 그래서 자기방어기제라도 되는 양 나이프를 좀 더 세게 잡고선 그 끝을 비비안에게 제대로 향했다.
"슬픈 것도, 억울한 것도 아니에요. 무서운 것 뿐이니까...!"
시이는 그렇게 말하곤 결국 찌르진 못하겠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이프를 땅바닥에 꽂습니다. 바닥에 꽂자 그 나이프가 그녀의 키와 비교해도 꽤 크다는 것이 보입니다.
즐거우니까 이러겠죠! 깔깔, 비비안은 소리를 높혀 웃으면서 나이프가 자신의 옆구리를 얕게 베어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시이의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이프가 얕게 스쳐간 옆구리는, 드레스가 살짝 찢어졌지만 그 안의 상처에서 검은 안개가 천천히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양 나이프를 세게 쥐고 다시 자신에게 나이프의 끝을 겨누는 시이의 행동에 비비안이 쿡쿡, 하고 마치 귀부인처럼 웃어보였다.
"어쩜, 이렇게 여릴까! 이단 심문관께서 이렇게 여려도 되는건가요? 당신은 왜 그러죠?"
눈물을 흘리는 시이를 이해못하겠다는 듯, 비비안은 급격하게 흥미가 떨어진 차갑고 냉정한 표정을 잠깐 지었다. 이내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흩어지며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지만. 나이프가 꽤 크네요! 그녀는 바닥에 꽂힌 시이의 나이프를 바라보며 쓸때없이 감탄하기도 했다.
다리를 꼬고 손 안의 와인을 섞듯이 살살 흔드는 레이첼이 말했다. 질책하거나 책임을 묻는 말은 아니었다. 과거가 어쨌던간에 지금은 그녀와 자신 둘 다 환상종이고, 비비안은 특히나 뱀파이어다. 사람을 사냥하고 피를 갈구하는 것은 당연한것을 넘어 생사를 결정한다. 마치 사람의 의식주다. 레이첼도 그것을 잘 알고있다. 단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자신의 상식으로선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말을 마치고 잔을 기울이던 레이첼이 문득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때도 꼭 이런 때였지."
비비안이 자신과 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즉, 노토스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지러진 달이 높게 뜬 밤이었을테다. 서로 술 잔을 기울이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쯤. 얼굴이 상기된 비비안이 잔뜩 깔깔거리면서 이야기하고, 거기에 흐름을 타듯 제 처참한 과거를 논했다. 마치 서로가 알고있는 오래된 동화를 읊어주듯이. 딱 이렇게 마주 앉아 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제에가 한때는 사람이였다는 걸! 비비안은 레이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무언가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는 듯이 와인잔을 든 채 장갑을 낀 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얇은 재질이여서 그런지 소리는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질책하는 것도,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였지만 레이첼은 비비안이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올리게했다. 오, 맙소사. 레이첼님 바보. 생각과는 달리 비비안은 베시시, 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에상에! 레이첼님! 벌써부터 과거를 떠올릴만큼 나이를 먹은거에요! 맙소사!"
자꾸 늙은이같은 소리를 하면 떼찌떼찌할거에요~? 비비안은 그때처럼 행동했다. 그래, 제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웃었다. 장난스럽고 과장스럽게. 처참하다면 처참하고, 평이하다면 평이한. 인간을 포기했던 과거.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 죽었던 기억. 오래된 이야기책, 먼지가 잔뜩 묻은 그 표지를 털어내고 흥얼거리듯이 그녀는 과거를 읊었고 레이첼과 맞장구를 치듯 처참한 과거를 읊었다. 글쎄.
"그으래서, 후회하나요?"
비비안은 와인잔의 표면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겨, 찡 하는 맑고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면서 물었다. 저어는 후회하지 않아요! 세상에, 시마. 너는 거짓말쟁이야. 속에서 스스로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