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이 와인을 즉시 따르지 않고 냄새를 맡는 모습에 의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문제라도 있는건가? 연고 모르는 인간이 들고 있던 술이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테다.
"상한 물건이라면 두어라. 있던 것을 가져올테니."
노파심에 레이첼은 그렇게 말했지만 비비안은 이미 보틀을 기울여 잔에 따르고 있었다. 그런 걱정이 날아갈 정도로 그 폼은 꽤나 능숙하다. 그것을 넘어 진홍빛인 술의 색깔과 그녀의 분위기가 오히려 꽤 잘 어울리기까지 한다. 비비안은 묘한 구석에서 품위있는 부분이 있었다. 레이첼은 여전히 못미더운 모양이었지만 한시름 놓자고 생각했는지 의자에 몸을 편히 놓이고 자신에게 내진 잔을 들어올렸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틀리다. 너희 환상종들이 사람을 먹는 것... 물론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도 이 세상의 섭리이지. 죽는 자가 있으면 사는 자도 있다. 나는 이 일대의 숲을 지키는 자. 그 밖의 영역에는 간섭하지 않는거다."
자루에 시체를 담는 그가 탓하듯이. 어찌보면 호소하듯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숲 지킴이는 인간을 배제하거나 돌려보낸다. 아무 힘 없는 아이가 숲으로 흘러 들어온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레이첼은 그 전부를 상처 입혀서라도 마을로 귀환시키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 운 나쁜 아이는 이렇게, 그의 말과 같이 혼백이 평생을 이 땅에서 떠돌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환상종이, 감히 무어라 말을 해주어야 할까. 사과? 질책? 아니면 공감? 레이첼은 이미 그 끝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자신의 안에 내린지 오래였다. '마소는 뭐지?' 그 말에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뜬 것도 그런 이유이다.
"새삼스럽군. 네 땅에서 그러하듯, 보레아스에서 사람이 죽는것도, 먹히는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설령 아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첼의 대검이 빠르게 움직인다. 아무도 없는 울창한 숲에 인간과 환상종 둘이 있다. 인간은 마소로 가득한 존재라 한다. 멈출 기미 조차 없이 호선을 그리는 도신. 베인다. 그런 생각이 들기 직전이었다.
"이곳은 금연이다."
바람이 덮쳐왔다. 갓붙힌 담뱃불 따위는 가볍게 꺼버릴 정도로 세찬 바람이. 레오닉의 눈 앞에 자로 잰듯 우뚝 멈춰 선 칼 끝은 미동조차도 하지 않았고, 이내 레이첼은 그것을 거둬들이고 말했다.
레이첼은 조용히 중얼거리듯 수긍했다. 이러나 저러나해도 어쨌든 자신도 환상종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사람이었던 자로서 그들과 완벽히 섞여 들어가는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먹지 않는 환상종. 그저 이 땅에선 우스운 말일 뿐이다. 팅- 유리잔이 서로 부딫히는 소리가 났고, 와인의 수면에는 파문이 인다. 지체없이 글라스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비비안을 보며 레이첼도 한모금 하려했으나, 와인이 입에 흘러 들어가기도 전에 그녀의 격한 반응에 동작을 멈췄다. 확실히 이 와인,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던 모양이지. 저 비비안이 저렇게까지 반응할 정도라면.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약함을 덮듯 허겁지겁 케이크를 집어먹는 그녀를 뒤로하고, 그녀와 자신의 잔을 챙겨서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이첼. 잠시 뒤 또 다른 와인 보틀과 글라스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다.
"호화스럽진 않지만 이건 제대로 된 술이다."
다시 식탁 위에 잔을 놓고서, 이번엔 그녀가 아닌 레이첼이 따른다. 비비안같은 품위있는 폼은 아니었지만 그 말대로 흐르는 와인에서는 방금보단 훨씬 좋은 향이 난다.
"정체도 모르는 것을 함부로 주워먹지 마라. 이런 주전부리 정도는 마련해줄테니."
둘의 글라스가 다시 진홍빛 액체로 가득했고, 은은한 전등의 빛을 담고 넘실거리는 그것이 이번엔 정말 풍미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하는것 처럼 보였다.
우에에.. 비비안은 단것으로도 가시지 않은 입안의 끔찍한 신맛을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아이고 셔라. 여전히 표정은 찡그려졌지만 케이크를 먹는 손길만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안주가 아니라 정말로 입안의 신맛을 없애려고 입안에 쑤셔넣는 거였지만. 세병이나 되는 와인병들을 바라보다가 비비안은 레이첼이 자신의 잔과 본인의 잔을 가져가는 그 순간에 다시 조용히 가방에 넣어서 꽁꽁 싸매버렸다.
레이첼이 가지고 온 와인에서 나는 근사한 향에, 비비안은 베시시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고 잔을 들었다. 확실히 근사한 향이다. 아까의 와인과는 확연히 다른. 비비안은 몇번 잔을 돌려 냄새를 맡고 건배를 하려던 비비안이 혀를 베 하고 내민다.
"함부로 주워먹지 말라니요. 그럼 사람도 함부로 주워먹으면 안되겠네요?"
레이첼님은 너~무 고지식하다니까 ! 비비안은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건배를 제의하는 레이첼의 행동에는 맞받아쳤다. 건배! 글라스 잔들끼리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들리고 레이첼은 얌전히 와인잔을 우아하게 입술에 가져다대고 한모금 깔끔하게 마셨다. 입안에서 몇번 굴린 뒤 꿀꺽. 비비안의 표정이 방금전과는 달리 화색이 감돌았다. 맛있어! 꺄! 방금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