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실리아: 왜 좋아하게 되었냐, 고요. 글쎄... 딱 왜, 라는 게 없어서.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요소 때문, 에 좋아하게 되었다ㅡ 라거나 정확히 언제부터 좋아 했었다. 이런 건 아니라서요.. 사실 좀 모호하죠. 사실 그냥, 언제부턴가 시선이 한번씩 두번씩.. 더 가고 그랬던 건데. 솔직히 처음 만났, 을 때부터 시선이 유독 가긴 했었지만.. 아, 이러면 조금 가벼워 보일까. ...글쎄요. 역시 원인이 뭔지, 확실히는 모르겠네요. 짚이는 게 너무 많아.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서하 자체를 너무 좋아한다.. 는 거에요. 돌림 없고 꾸밈 없는 직설적인 말투도 좋고, 다정한 것도 좋고, 남이 숨기고 싶어하는 걸 굳이 파헤치지 않는 심플한 성격도 좋아요. 그러니까, 왜 좋아하게 되었나고 물으면 그냥 당신이라서. 라고 말할래.
문득, 지난번에 내가 저지른 짓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난 진짜 직진 말고는 생각 못하던, 소위 말해 좀 미쳐있었다고 하는 그런 상태였다. 왜인지는 알고있었다. 합수부가 종결되고 각자 서로 돌아간 후에도 생각이 났었다. 처음에는 동료가 아니면 괜찮은 동생, 정도였다. 나는 그때 시현이에게 빠져있었고, 그냥 언제 수고했다고 밥이나 살 생각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현이가 내 곁을 떠나고 난 공허함을 안고 살아왔다. 정말 개처럼 사건, 대출, 사건의 굴레속에서 쳇바퀴처럼 굴렀다.
지쳤었다. 지치고, 마음도 곪아터지고, 정말 망가지기 직전이었던 때, 나는 이 직장에 추천으로 들어왔다. 아롱범 팀. 좋은 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은 공허했다. 바뀐거라면 곪아터진곳에 딱지가 앉은 것 정도. 시현이의 무덤 앞에 가는 것 조차 공허하고 아무 생각없고 무감각해졌을 때, 다시 만났다. 합수부에서는 수사스타일의 차이로 으르렁대다가도 회식자리에서는 친한 누나동생같던 걔를. 못보던 새 다리를 잃었더랬다. 솔직히 말해, 이제서야 말하는거지만, 뒤늦게 가슴이 찔려왔다. 좀 더 빨리 얼굴보자할걸.
급했던 것 같다. 솔직히 느긋했다고 하면 그게 거짓말이다. 걔는 내 공허한 마음을 순식간에 자기로 채워나갔고, 그 색은 너무나도 화려하고 따뜻했다. 난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또 잃기는 싫었다. 구하지 못한 아이들, 최시현, 그 뒤에 네 이름이 들어갈 만약을 떠올리는게 너무 공포스러웠다. 사실은 너무나도 무거운 공포라늠 흑백의 덧칠이 싫었다. 아니, 사실 이미 딱지 앉은 마음엔 최시현 같은건 이미 없었다, 이미 상처로 끝나버린 게 이유려나. 넌 내 마음에 새로 난 상처였을까, 아니. 문신같은걸까? 새기기엔 아프지만, 새기고 나면 너무나도 선명하고 아름다울. 잃기 싫다는 그 감정을 던지고 난 뒤에 늦게 생각을 정리 해보니, 공포라는 앏디 얇은 흑백 덧칠 아래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색을 지닌 감정이 있었다. 그래, 어떻게 그 덧칠로 간단히 지우겠어. 너는 내 마음이라는 빈 캔버스를 칠해놓은 화려한 유화였다. 그저 공포만 있었다면 그냥 잊어달라 하고 친구같은 누나로 남을텐데, 그러기엔, 그렇게 넘기려는 마음 아랠 들여다보면 예쁘고 화려한, 하지만 따뜻한 색이 있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에 널 볼 용기가 안 났다. 어떻게 이런걸 함부로 말해. 너에게는 이 화사한 색이 상처가 될지도 모르는데.
"...전화, 해볼까."
전화번호부의 네 이름 앞에서 둥둥 망설이던 엄지 손가락은, 망설임을 반복하다 결국 통화버튼을 눌러버리려다 다시 멈춘다. 어쩌지... 그렇게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엄지는 3초간 통화하고 끊는, 소심한 형태로 끝이 났다.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린다. 오늘도 기력없는 허약한 몸을 이끌고 사무실 자기 자리에 앉아 무료한 눈빛으로 일을 하고 있는 유안이었다. 그 사이에 새로운 팀원ㅡ그러니까 후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그답게 뒤늦게 들었는데 딱히 환영인사를 해줄 생각도 기미도 그닥 없어보인다. 이것도 그답다. 아침시간, 졸음에서 진짜 간신히 깬 상태이다. 유안은 그러는데 도움을 준 커피가 담겼던 종이컵을 버리러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쓰레기통 쪽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종이컵을 넣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린다. 그랬는데 발이 삐끗해버렸다.
오늘은 익스레이버에서 첫 근무하는 날이다. 지은은 자신의 이름이 적혀진 자리에 앉아 주위를 살펴보았다. 앞으로 내가 일할 장소와 동료들을 눈에 하나하나 세기고 싶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10년 넘게 준비해온 내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지은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기댔다. 이 소소한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행복을 곱씹을 동안 옆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지은은 눈을 뜨고 목을 길게 뺐다.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쓰러져있는 유안을 발견했다.
“어, 저기. 괜찮으십니까?”
선배님이라 불러야 함이 맞겠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어려 보였다. 지은은 유안에게 차마 선배라 부르지 못하고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