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심】: 작은 새가 느긋하게 우는 마을은 참치 인터넷 어장 규칙을 준수합니다. 오후 8시~12시동안 noup 콘솔 사용을 권장드리며, 그 외에는 자유롭게 사용해주세요! 더불어서 2019년 7월 14일 기준으로 생긴 정치/사회 이슈 규칙을 준수합니다.」
「 1. 나메와 대리 AA를 허용하며,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토론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 2. 하지만 불판을 내려고 하거나 그럴 기미가 보일 시 (어장주의 주관적 판단), 하이드 & 밴 조치.」 「 3. 느긋함을 지향하고, 상대를 대하는 예의와 매너를 갖추는 선에서 자유를 지향합니다.」
「 4. 상어아가미에 물릴만한 주제는 주의하고, 상대방을 배척하는 친목질에 주의해주세요.」 「 5. 기분 나쁘게 하거나 받지않고, 상처를 입히거나 상처 받지않도록 즐겁게, 느긋하게 즐겨주세요!」 「 6. 타 잡담판의 일은 타 잡담판에서 일어난 곳에서 해결할 것.가지고 와도 받지 않습니다.」
「 7. [고어 및 혐오 소재]를 올리고자 할 때는 코토리나 혹은 참치들의 양해를 구해주세요.」 「 8. 마을은 다목적판이기에, 마을에서 창작하거나, 하지않거나는, 참치들의 자유입니다! 」 「 9. 거듭해서 참치 여러분들이 '마을에 머무를 때'는 느긋하고 편하고 즐겁게 즐겨주세요! 」
"저거 명백하게 초절정을 넘어선 경지잖아, 다죽어가던 혈교주가 자기 피로 창만들더니 자라나라 머리머리가 됐잖아. 투창 한 번으로 저 문어를 증발시켰잖아." "사흉이었던걸 스승님이 주워와서 키우라고 남겼는데 진도 움직이질 않느니 괴이 판정은 아니고, 아니아니 왜 그 시절 본능이랑 공존하는데?"
객의 등불이 도술처럼 환각계 이능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설명에 적힌대로 현실조작에 가깝심다. 장소명이 사용할 때는 괴이들에게 호감적 소통능력을 보장하기 쉽게 만들고 혜연이 사용할 때는 혼돈도 혼란스럽게 만들 대규모 환상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음.(예시는 유튜브를 참고)
제자백가 설정을 건드릴 때, 얘내들이 딱히 어디를 지정해서 토론을 여는게 아니라, 그냥 그때마다 토론장소를 바꿨습니다. 원역사에서도 세상 자체가 혼란스럽기도 했고, 실제로는 막 흰옷을 입은 선비들이 고명한 학자들이랑 토론을 나누는 광경이 아니라 중국 전체를 유랑하면서 학자들이 군주와 몇몇 선비들과 이야기에 나누는 수준에 가까웠기에.. 만물객당은 그런 의미에서 아예 과장 좀 하면 최초로 신분관계없이, 오직 지식과 지혜를 나누기 위한 토론회라고 할 수 있지 싶으요.
문단에 적혀진 아는 지혜만큼 바꿀 수 있다는건 예에전 어반판타지에서 조작 계열의 수준높은 사용을 원한다면 박사급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기억이 있어서 그렇게 기입했음. 인지와 명망에 비례한다는건 일본 판타지에서 으레 설명하는 '인지도'개념에 가깝고 걍 '의지랑 자아만'있어도 정밀성이 늘어나는건 현실조작을 '살려라!' '죽어라!' '반짝여라!' 라는 단어에도 반응하는 양판소에 나오는 편의주의적 개념을 인용한 것
메타적으로는 장 가문이 혜연의 직계혈통이 맞심다. 선조 스토리 쓰다보니 저따가 연애스토리 같은걸 집어넣을 여력이 안되서(이야기 구성상 후손 세대 집어넣기도 힘들고) 후사를 어떻게 남겼는지 일부러 상상의 여지 정도로만 남겼을 뿐; 그거랑 별개로 진실적으로 등불 정신을 잇는 애들이 등불마을과 등불촌에 있냐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없다'라고 말하겠지만은..
네? 그러면 노래는 누가 계승했냐고요? 이후 메이킹 할 참치들과 제 몫으로 남겨둔지라 코토리 어장주 마음대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원래는 천지도덕가를 기원전 최초의 악보! 라는 타이틀이 달릴 예정이였으나 이미 기원전 악보는 세이킬로스의 비문이라고 해서 기원전 2세기~1세기 사이에서 만들어진게 있습니다. 물론 제자백가 활동시기를 생각하면 천지도덕가가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것일수도 있으니 진짜 최초의 악보 위치가 바뀔 수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코토리 어장주에게(ry
그리고.. 봉인된 저장고를 풀었을 때 다이스를 굴리셨던데, 저기서 너무 짧은(1~2) 년도가 나왔으면 +2 정도 더 해달라고 했을 것 사유 : 하필 황허홍수 당시 아직 문화대혁명 말기라서 저게 안전하게 풀릴려면 적어도 문화대혁명이 완전히 끝나는 1976년 이후가 제일 안전해서요..
anchor>1597048405>753를 발견했음(태조 이성계가 요정을 임신시킴) ↓ 그러니까 신의왕후가 요정이였다고?.. 조선 왕조 전주이씨가 싹다 요정 혈통 가졌다고?; ↓ (숙종 왕비에 관한 이야기를 삭제하는 중) ↓ anchor>1597048405>756와 anchor>1597049083>737를 다시 읽어봄(왕비는 요정 혈통을 가진 애가 맞음, 요정 혼혈은 왕조랑 별개로 잘살다가 떠났다고함) ↓ 잠깐 그럼 임신시킨 요정은 누구야?? 신덕왕후였나?? 에이 몰라...(다시 복구)
(영조가 전쟁을 일으키던 당시 대청의 황제가 웅정제 였다는 사실에 뒷목 잡는 중)몽골 팔기 완성되기도 전에 대청 때려잡았네 이거.. 러시아 제국에게 조져지겠다 몽골은; 표르트 2세 원역사에서 천연두 탓에 아무 업적없이 죽었는데 여긴 업적 하나라도 남기겠네 축하해(영혼빠짐)
천지도덕가(天地道德歌)는 혜연이 제자백가의 가르침을 노랫말로 엮어서 전파한 것이다. 천지도덕가의 가사는 아래와 같으며 지금은 중화권의 전통음악으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 중화 전역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가르침을 울려퍼지게 하여라,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가며 자연과 조화(調和)를 이루고, 규칙과 질서 아래,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것임을 약속하며, 명확한 논리와 질서정연한 평화(平和)를 세울 것임을 선언한다. ──────────━━━━━━━━━━──────────━━━━━━━━━━───── 요수, 요물, 요괴, 괴이, 괴물 등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평화롭고, 영물, 영웅, 충신, 난세, 치세 등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평범해진, 「약속된 날」이 찾아오리. ──이 노래를 듣는 후손들아, 잘 살아가렴. ━━━━━━━━━━──────────━━━━━━━━━━──────────━━━━━
천지도덕가(天地道德歌)는 혜연이 제자백가의 가르침을 노랫말로 엮어서 전파한 것이다. 천지도덕가의 가사는 아래와 같으며 지금은 중화권의 전통음악으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 중화 전역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가르침을 울려퍼지게 하여라,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가며 자연과 조화(調和)를 이루고, 규칙과 질서 아래,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것임을 약속하며, 명확한 논리와 질서정연한 평화(平和)를 세울 것임을 선언한다. ──────────━━━━━━━━━━──────────━━━━━━━━━━───── 요수, 요물, 요괴, 괴이, 괴물 등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평화롭고, 영물, 영웅, 충신, 난세, 치세 등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평범해진, 「약속된 날」이 찾아오리. ──이 노래를 듣는 후손들아, 잘 살아가렴. ━━━━━━━━━━──────────━━━━━━━━━━──────────━━━━━
대명은 쇠락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치세가 떠오르리라고 믿었던 만력제 시기, 그는 어릴적 엄한 교육과 지도로 대명의 재상, 장거정의 조력하에 대명의 새로운 태평성대를 띄웠습니다.
허나,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장거정의 사망 이후, 만력제는 만병질환이 걸린 탓인지, 장거정이 저질렀던 부정의 흔적이 충격적이였던건지 몰라도, 만력제는 병의 이유로 업무수행을 거부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우이겠거니 넘어가는 신하가 많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만력제의 태업은 끝이 날 기미가 안보였고, 그렇게 발생한 권력의 공백은 지속적인 혼란의 발생을 부추겼습니다.
그 외에도 만력제를 포함, 대명에는 지속적으로 제살을 깍아먹는 짓을 반복하는 암군의 연속적인 등장으로 인해 서서히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북로남왜로 통칭되는 몽골족과 왜구의 반복되는 침범으로 국력이 날이 갈수록 약해져 여진족에 대한 경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경술의 변 전투로 국면이 전환, 대명의 군사력이 바닥을 치고 말았고, 조선 역시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여진족의 전투력에 대해 버거워했습니다. 그들이 결국 후금이라는 국가까지 세우면서 위협은 날이 갈수록 가시화되어 갔습니다.
다른 곳에서 조선 왕조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시와 음악을 선호하던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분노했고, 조정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게 만들고, 궁궐에는 사치스러운 향락이 지속되었습니다. 기여코 실록에도 손을 대버린 연산군은 중종반정과 함께 폐위되어 쫒겨나고 말았습니다.
아무 저항없이 죄를 인정하고 끌려간 그의 모습을 뒤로, 이후에 오른 왕들은 두번의 사화와 함께 연산군이 저지른 문제에 대한 수습만으로 바쁜 생활을 보냈습니다. 또한 날이 갈수록 기세가 강해진 신하들은 왕을 '따위'로 취급하며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수많은 암투가 벌어졌죠.
결국 이는 명종까지 이어져 다음에 이을 왕을 위해서라도 정말 끝없는 노력 끝에 연산군의 후속 문제를 대부분 처리하고 여민휴식과 함께 조선의 내치를 훌륭하게 가꾸는데 성공하여, 그의 다음대인 선조에게 목릉성세를 이룰 기반을 건네주는데 성공합니다.
조선이 폭정으로 인한 후유증을 수습하는 동안,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천하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합니다. 일본을 통일하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일본국의 안정을 위해 전국시대 통일에 도움을 줬던 대부분의 군사력을 육지로 투사하는 계획을 입안했고, 이는 조선을 침공하는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이미 일본에 대해 전쟁 후유증을 감안, 통신사의 소식을 비교대조하여 '그들이 미치지 않는 한, 올 일이 없을 것' 이라는 전망을 듣고 지속적인 회복에 집중했으나, 모든 예상을 깨버리고 히데요시는 침공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조선은 정말 뜻밖의 침공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으며, 당시 해안방어를 맡던 원균이 이들의 대군을 보고 함대 대부분을 버리고 육지로 부리나케 달아났습니다. 당대에서 보낼 엄두조차 함부로 낼 수 없는 대원정군이 대규모로 조선에 상륙하고 말았으며 이는 개전초기 조선의 항구와 육로가 점거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맙니다.
침공을 맞이했던 때, 당대의 왕은 선조였으며, 그는 총명한 자로 궁궐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특히 타고난 강골은 자존심까지 타고난 것인지, 무엇하나 쉽게 흘리는 법 없이 강대했습니다. 다만, 그가 적자로 선정되는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명종의 잦은 혼수상태와 어린 나이의 즉위라는 상황이 혼재하여 많은 자들이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수렴청정이 1년만에 끝난 다음 날, 그는 바로 친정을 개시했고, 수많은 우려를 돌파하고 그것이 기우임을 증명하며, '조선의 목릉성세'이룩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치세를 이룩한 선조는 급박한 침공 소식에도 당황하지 않고, 앞선 여진족의 침공에서 활약한 장군을 적극적으로 승진시켜 최고 지휘관 대우를 하는데 서슴치 않았고, 의심조차 없을 선조의 황금길에는 임진왜란에서 전국시대의 전투 경험으로 단련하고, 조총이라는 기술력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단 한치도 물러설 기미를 주지 않았습니다.
전조조차 없는 습격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조선 팔도의 일부 구역은 왜군에게 점령당했으나, 상관없습니다.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에게 저항한 홍장군 곽재우, 아녀자의 몸으로 신동이라 불린 재상 류성룡,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의 바다를 틀어막아 왜군의 침입을 절대적으로 허용치 않았던 충무공 이순신까지. 그 외 수많은 인재들이 선조를 보필하고 보좌했으며, 끊어지지 않는 조선군의 사기, 이어지는 대명군의 참전, 계속 이어지는 패퇴 소식으로 위험해지는 일본국의 정세는 히데요시에게 경기를 일으킬만한 상황이였습니다.
히데요시는 강화협정을 제안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재정비 시간을 벌려고 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져 육지에 먼저 상륙했던 왜군은 패배를 직감해 조선과 대명에게 투항하거나 항왜로 투신했습니다.
결국 노량해전을 전후로 일본국의 수군 역량이 완전히 박살났고, 이는 일본국의 영역인 구주와 대마도에 조선군과 대명군이 소모없이 상륙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이 기여코 본국의 수도까지 침범할 위기에 처해지자, 히데요시는 자신을 지지하는 마지막 가신들과 친위대를 손수 이끌어 이순신과 일기토를 벌였고, 히데요시가 전국시대 당대, 자신을 원숭이라 비난한 자들을 짓밣고자 했던 악착같은 집념과 일념으로 이순신을 몰아갔으나, 끝내 그의 목이 참수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친위대의 사기가 박살남과 동시에 도주를 택하며, 왜군은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좀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일본국은 이어지는 연패에 도요토미의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가 많았으며, 특히 그 사이에서 혼노지의 변과 도요토미의 천하통일에서 기도비닉으로 힘을 기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히데요시가 연속적인 패퇴로 이성을 잃어가는 시점에서 그는 반 도요토미 파벌을 결집시켰으며, 또한 구주결전에서 히데요시를 따르던 가신과 친위대가 전원 참전함으로서 이에야스는 완전히 일본국을 집어삼키는데 성공합니다.
헌데, 히데요시는 결국 목이 날라가 참수당했으며, 그의 가신과 친위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흩어졌습니다. 즉, 구주결전 이후 들어올 조선군과 대명군을 막을 역량이 없었음을 말하며, 이에야스는 다시한번 쓴 맛을 집어삼키고 조선과 대명에게 삼자대면을 제시하고, 지속된 전쟁으로 전쟁 피로도가 급상한 두 국가는 요청에 수락해 조선의 대변하는 이순신, 대명을 대변하는 이여송과 함께 일본국의 새로운 정이대장군(쇼군)으로 참가하여 구주와 대마도에 대한 할양권을 넘기는 댓가로 히데요시의 침공과 시작된 전쟁의 끝을 맺는데 성공합니다.
일본국은 이미 패배를 직감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국의 군사 역량을 완전히 박살냈으며 그덕에 새로 들어선 에도 막부의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의 난을 전투없이 완결짓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동시에 조선과 대명에겐 자신은 도요토미와 관계없고 새로운 정권으로서 두 국가 앞에서 굽혔으나 일본국에서는 조선과 대명의 복수심을 자극해 일본국의 여론과 가신들을 하나로 뭉쳐 다시금 자신들이 재기할 때까지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음을 되새기며 조용히 내치와 역량을 길렀습니다.
그렇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을 맞이하며, 모두가 일상으로 복귀했습니다. 대명군은 곧 자신들의 국가로 복귀하였으며, 조선군 역시 무기를 내려놓고 선비로 돌아가는 자, 새로이 조선의 영토로 영입된 구주를 수호하기 위해 조선국을 떠나 정착하는 자, 선조의 목릉성세에 기여하기 위해 관직에 들어간 자 등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후 대명의 한 해적의 죽음과 일어난 대항해시대 속에서 조선은 기나긴 전쟁이 끝난 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후유증을 쉽게 극복할 수 있었으며, 당시에 들어오는 서역의 교역품과 넓어진 세상의 관철은 조선에게 좋은 영향을 줬습니다.
일본국을 상대로 승전한 댓가로 대마도와 구주의 영토 할양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이때 같이 귀화한 몇몇 일본인 장인과 항일왜구는 조선의 공예와 기술을 한단계 앞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비록 왜란에 휩쓸려 조선이 누릴 수 있는 대항해시대는 약 8~10년 정도 밖에 안됬지만 선조의 목릉성세와 함께 조선의 치세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밝게 빛났습니다.
다만, 모든 것에는 끝이 존재하는법, 선조가 만족스러운 친정을 마치고 목릉성세의 끝맺음과 함께 광해군이 조선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광해군은 선조가 기깔나게 펼친 치세와 달리, 되려 자신의 자존심으로 향후 왕으로 책봉될 세자의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또한 자신의 자식에겐 관대한 대우를 보여주는 선조의 처우와 계속 아버지의 업적을 칭송하며 자신을 압박하는 신하들에 의해 좋지않은 성장환경을 가지고 조선의 왕으로서 책봉되었습니다.
자신은 세자시절,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고자, 임진왜란에서 적극적인 전투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계속 아버지와 수많은 인재 사이의 그림자에 가려졌으며 자신을 계속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주변의 형제들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선조의 관대한 자식처사에 의해 방치되었고, 나중에는 온갖 괴팍한 행위와 행패를 부리고 다녔으며, 왜란 때도 형제들의 악명이 조선과 일본, 대명에도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는 나중에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그들을 모두 궁궐에서 내쫒았습니다. 귀양이든 독살이든 조용히 살진 못했죠.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은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며, 자신의 업적 증명, 왕권 강화의 명목으로 궁궐 건설을 명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행위라면 어떤 일이든 손에 대기 시작했으며, 대항해시대에도 적극적인 간섭을 가했습니다.
이는 결국 부작용으로 돌아와 손을 대는 것보다 못한 유지보수의 상태와 백성들의 기력을 한없이 소모시켜 선왕이 남긴 유산이 유명무실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일어날 정묘호란까지 계속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행위의 심화로 광해군의 심신은 지쳐가고 메말라갔습니다. 적과 아군을 구분치 못했고, 이성적 판단에 메몰된 나머지, 하지 말아야 할 행위의 구분에도 장애가 발생했습니다.
광해군 즉위 시점 중, 중원에서는 명말청초의 풍경이 한창이였습니다. 대명은 암군의 연속적인 등장으로 기반이 박살났으며, 또한 그렇게 발생한 권력의 공백기에는 다시 권력을 얻고 날뛰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제일 심각한 사안은 대명의 군사역량이 완전히 박살났음을 증명하는 경술의 변 이후 날마다 커져가는 후금이였습니다. 이전이라면 일개 여진족에 불과할 그들이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사태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고 또한 대항해시대의 혜택을 대명과 조선만이 맛본 것이 아니듯, 이들 역시 성장 동력에 박차를 가했으며, 왜란이 끝난 이후 후금은 더이상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한 후금은 대명에게 선전포고를 가해 전쟁의 개전을 알렸으며, 대명은 그 이전부터 내려오는 원한의 연쇄와 수많은 외세의 압박으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북원 역시 강대했던 역사를 자랑하던 이전과 다르게 후금의 압도에 앞다퉈 투항하는 인원이 많아지고 복속을 거부하던 자를 마지막으로 무릎꿇게 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그들을 완전히 복속시킵니다.
사르후 전투는 대명의 풍전등화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여실히 증명하며, 당시 광해군이 통치하고 있었던 왕조 시기, 조선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도록 군사 파병을 실시했고, 조선군은 최대한 대명을 원호하고자 했으나 대명이 신생국보다 못한 수준의 군대와 암군의 등장으로 완전히 소모된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없었습니다.
결국 대명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이겨보지 못한채로 질질 끌리며 후금의 기상 아래, 무릎을 꿇고맙니다.
후금이 한창 대명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당시의 조선은 광해군의 연이은 무능한 행위와 이로 이어지는 백성의 불만, 대항해시대 때 적극활약하며 계속 운영중이였던 항만의 관리실패로 인한 폐쇄, 무리한 재정 소모로 인한 강한 세율로 고난의 행군을 겪고 있었습니다.
대명의 지원요청은 여러번 조선에 닿았고, 모든 관리와 대신들 모두 만력제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적극적인 구호와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때, 왜란이 끝난지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았고, 제 아무리 대항해시대 덕에 국가를 정상궤도로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한들, 백성에게 가해진 전쟁의 피해는 쉽사리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광해군은 대명의 상태가 정상을 아님을 직감했죠.
사르후 전투에서 그들이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은 행운이 아닙니다. 파병군마저 자신들의 목숨을 겨우 건져올렸는데 대명군이 그렇게 처참하게 패배했다면, 조선의 파병군은 거기서 전멸할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에게 있어서 심각한 결정이였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있어서 만력제의 은혜는 결코 국가간의 은정으로 넘겨야 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대명은 그들의 모든 것을 조선에게 건넸고, 조선은 마땅한 유교의 법도에 따라 이를 갚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대명은 그동안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던 국가입니다. 또한 후금이라 칭한 이들은 여진족, 평소같으면 군횃발로 짓밟아야 할 자들입니다. 이들과 대명을 저울에 놓는다는 것은 모욕이였습니다.
사르후 전투 때도 파병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던 광해군은 만력제 명의의 서한이 오고나서야 겨우 군을 보냈으며 지친 심신으로 신하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내부적 불만은 계속 쌓여만 간 상황 속에서 이 결정이 분화구가 되어 조정을 뒤집어버렸고, 그동안 광해군이 저지른 무능함과 대명배반을 명분으로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내쫒는 인조반정이 발생합니다.
광해군은 결국 자신의 형제들이 그랬듯 궁궐에서 쫒겨났으며, 새로이 즉위한 왕, 인조는 친명배금의 기치를 천명하며 대명의 지원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 역시, 조선에게 우호적인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결정을 확인한 후금은 광해군의 폐위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후방에서 장난치는 조선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 조선 침공을 결심합니다.
대명군을 박살내고, 북원을 복속시킨 군사력이 과장된 것이 아니듯, 후금군은 조선을 완전히 휩쓸며 파죽지세로 수도로 진격했습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단지 후금군은 계속 전진하고, 조선군은 계속 패전을 거듭하며, 그나마 지원으로 온 대명군은 도움조차 되질 않거나, 전투에 참여조차 하질 않았습니다.
후금은 그와중에도 조선을 계속 압박하기 위해 강화요청을 계속 보냈고, 이미 친명배금의 기치를 내세운 조선은 해당 요청에 응해줄 수도 없습니다.
결국 압도적인 기동력으로 조선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 직전, 조선은 결국 강화요청에 응했고, 후금은 한창의 전쟁 도중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의 전쟁이였으므로, 문제의 요인이 잠잠해진 것을 확인한 후에 물러갔습니다. 정작, 후금은 조선에게 받아온 강화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했지만요.
강화에 응하고 난 뒤의 조선은 사실상의 패전의 분위기와 후금군에게 순순히 수도를 내줄뻔 했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으며 이미 광해군의 무능한 행위로 인한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후금군이 휩쓸고 간 경로의 시설과 건물들은 모두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후 후금과 맺은 정묘화약 이후 조선 왕조는 친명배금 명분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후일 대청으로 명해지는 후금측과 화친을 하자는 주화파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는 측의 척화파가 조정을 혼란케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천명이 결국 대명과 조선의 손에 떠나갔음을 증명하는 것은 이후 병자호란의 발생이였습니다.
후금은 결국 대명을 완전히 무릎꿇게 하여 천명을 자신들의 손에 넣는데 성공했고, 대명의 멸망은 그 이후였으나 중원의 영토를 완전히 손에 넣는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이후 후금은 칭제건원을 선포하며, 국명을 대청으로 바꾸고 중원의 천명이 자신들의 손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조선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은 후일의 역습을 위해 이번에도 허리를 굽히며 인정하였습니다.
대청은 이전 정묘화약의 내용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였고, 조선이 계속 저리 뻗대는 이상, 이전과 마찬가지로 후방을 빼둘 수는 없었습니다. 대명을 아직 남겨두고 지금의 상황에는 더더욱 말입니다.
조선과 대명의 처우에 대해 논의하던 중, 1620년부터 극심해진 기근으로 인해 청은 조선과 대명의 처우에 관해 더이상 시간을 둘 수 없는 상황으로 급변하자, 빠른 결심으로 돌변, 조선을 굴복시켜 상국 인정과 군신관계 정립, 후방 안전을 확보하고, 대명을 완전히 복속시킴으로서 중원 통일에 박차를 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쟁의 공통적인 목표로는 세수 확보 및 식량 약탈도 겸했지요.
그렇게, 병자호란이 개전되었습니다.
대청은 이전에도 보여줬던 신속한 기동군의 전개로 조선을 다시금 포위상황에 몰아넣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이전 정묘호란의 결과에 대해 절치부심하며 어떻게든 성의 수비를 위시한 수성전략에 집중했습니다.
이전의 왜란에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임한 선조의 뜻을 본받으며 인조 역시 최선을 다해 대청군의 진격을 막아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선조가 아니였습니다. 이전의 광해군도 그러했듯이 자신의 능력은 선조나, 심지어 광해군의 영역 조차 제대로 닿질 못하는 것이였습니다. 그 외 재능이 있더라도, 그는 병법에 유식하지 않았지요. 결국, 조선군의 지연전 실패와 초기 방어전에도 패배하며 인조는 결국 궁궐을 버리고 피신하는 굴욕을 맛봤습니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당할 굴욕에 비하면 약한 것이였습니다.
남한산성의 피신 이후 조선군은 계속해서 대청군의 발목을 잡아봤지만 말발굽에 짓밣혀지고, 돌격에 찢겨나갔습니다. 이전의 왜란에서 활약한 의병들과 대항해시대와 선조의 유산으로 어떻게든 부족한 보급을 충족시키며 싸움을 이어나갔으나, 이미 전황은 대청군에게 완벽하게 기울어졌습니다.
모든 상황이 조선에게 불리하며, 대청군은 이미 앞선 침공으로 대 조선 방침을 확실하게 준비시켜둔 것이 그들에게 너무 유리한 상황을 제공해줬습니다.
이 당시의 조선의 무능함 역시 같이 조명되었습니다. 광해군의 헛발짓거리와 인조반정 이후 발생한 이괄의 난 등, 조선은 제살을 깎아먹는 행동을 반복했고, 저 멀리 나가있는 이순신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연락망은 광해군 통치 시기의 유지보수 역량 저하와 함께 인조반정 이후로 복구조차 안되어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광해군의 집권 이후 항만의 관리가 소홀해져 연이은 폐쇄로 인한 국력 손실은 물론, 이전의 왜란에서 활약한 장군들이 연세로 인한 은퇴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인조 본인은 병법에 수월하지 못했습니다. 그 외에도 광해군의 소극적 태도와 인조 집권 이후 조선의 연이은 패전으로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이 갈수록 모호해져 주화파와 척화파의 분열은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을 상대한 대청의 속전속결 전략은 조선에게 지나칠 정도로 효과적인 전략이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연속적인 전투 속에서도 병사들이 쉽게 지치지 않을 수준에서 전선을 생성하고 있었고, 현지에서 협력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보다 더 빨리 현장의 소식을 받을 수 있다는 맹점이 존재했습니다.
결국, 강화도 방어전에서 믿고있었던 조선 수군마저 대청의 밀물 썰물을 이용한 전략을 통해 무력화하고 강화도에서 배수진을 형성한 최후의 조선군마저 참패시키자, 인조는 패배을 직감하고 대청에 항복문서를 보냈습니다.
조선이 끝내, 자신들이 오랑캐로 여겼던 자들에게 패배하고, 수많은 실책과 실수에서 끝나지 않던 치세의 순간이 완전히 끝을 맞이하는 순간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