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패망흥기(敗亡興起)(19세기~20세기)일본의 위대한 인내-천황의 귀환-대조선의 몰락
이 중원의 천상결전에서 완전히 밀려난 일본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일본은 조선과 대명의 활약으로 완전히 몰락당했습니다.
당대 이전, 대원이 중원 요수 대부분을 토벌하고, 고려를 짓밣고, 대송을 무너트리며, 중원 뿐만이 아닌
그 주변과 일본까지 완전히 장악하려던 찰나, 대원에게 '신풍'(神風, 카미카제)이 들이닥쳐
원정군과 대원의 수군을 완전히 전멸시킵니다.
실로 천운이였습니다. 바닷가의 요수들이 도와줬을지, 일본의 수많은 신성들이 그들을 도와줬는지 모를 일입니다.
어쨋건, 이것으로 인해 대원은 해상역량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후에도 실시한
2차 원정 때도 신풍이 들이닥쳐 대원이 일본 원정을 포기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신풍이 조선의 원정 때도 들이닥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본토까지 침범당하고
전국시대를 통일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정이대장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에게 참수당했습니다.
일본의 새로운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입술에 흐르는 피를 머금고 조선과 대명의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대마도와 구주를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치욕의 시기였습니다.
자랑스러운 일본 수군은 전원 수장당했고, 전국시대를 향유하던 사무라이는 조선과 대명의 칼날 아래 쓸려나갔습니다.
그 이후 일본은 완전한 복수혈전에 돌입합니다.
중원의 역사에서 와신상담을 하던 오나라와 월나라의 심정이 이것이였을까요?
자신들도 와신상담의 이야기를 되세기며, 도쿠가와의 지도 아래에 내치와 체급 상승 시도를 수행합니다.
일본은 그전까지 제대로 된 열도의 통일국가가 아니었으며 전국시대 이후에도 몇몇 국가들은 일본의 영향력에서
빠져나간 상태였습니다. 그 탓에 직접적으로 휘둘리지 않은 에조 공화국과 류큐 왕국은 통합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겼고, 도쿠가와는 완전히 박살난 군의 재건과 조선과 마찬가지로 기반이 초토화된 일본국의 내정에 집중하여
열도 대륙의 통일을 향해 견실히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쓰러지고 대명이 멸망하고 대청이 세워지자 그들에게 아부하였고,
조선이 성조의 치세에 힘입어 대청을 무너트려 청으로 격하시키고 대조선을 세웠을 때도 아부하였고,
이따금 재건된 수군을 통해 서역과 교류하던 그들에게도 아부하였습니다.
단 몇번의 권토중래를 위해 그들은 마치 겉보기엔 고립되어 있는 듯한 움직임으로
최대한 기회를 엿봤습니다.
그리고 이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서방은 산업혁명을 천명하여 그들의 국가권력, 생산력의 효율이 감히 어떤 국가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이후 벌어지는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생산력이 더이상 자국을 감당치 못하고 외부로 나가 식민지를 생성했던 시기의
각 국가간의 식민지 경쟁에 따른 두 제국의 강력한 대전략전을 뜻합니다.
이 대전략전에서 일본은 대영제국의 눈에 띄는데 성공했고,
대영제국은 일본을 자신들의 대전사로 길러 동양에서의 패권 장악을 위한 패로 성장시켰습니다.
비록 대전사로 길러지는데 많은 비용을 일본이 적지않게 지불하여 빚더미에 앉았으나,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내, 영일동맹과 미합중국과의 교역을 타결함으로서 그들의 준비에는 박차를 가했습니다.
강력한 서양의 문물을 들이고, 국가 생산력을 혁신적으로 늘리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형성하는
명치유신(메이지유신)도 큰 문제없이 도입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개혁시킨 일본국은 이내 류큐 왕국과 에조 공화국의 통합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대통합에 합류하게
만들었고, 곧 열도통일을 완성하여 이것을 천황중심의 중앙집권으로 일본제국을 이륙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일본은 영국에게 군사지원 요청을 받고 파병을 나가거나 조선이 가끔 대마도와 구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을 때, 간접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밑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시간대를 이전으로 돌려, 대청과 조선의 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전 왕조와 황제는 그나마
어려울 때 서로 응하거나, 군신관계를 어느정도 지속하고 있었으나, 한창 경신대기근 때 조선 왕조가
투사할 수 있는 힘이 매우 적었던 시기를 이용하여 국경을 대청 마음대로 지정해놓은 백두산정계비의 문제가
그들의 각 왕조와 황조시기, 성조 통치시기와 웅정제의 통치시기 때 다시 제기된 것입니다.
이 문제의 골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것 만을 증명하며 상호간의 반목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조선과 대청은 전쟁을 결심합니다.
성조는 그간 설움과 앙갚음을 위해 출병을 결심했습니다. 동시에 천자의 자격 역시 얻기 위해서.
옹정제 역시, 조선의 오만함이 극에 달했다며 강희제의 치세 때 길러온 군사를 통해 조선의 침공에 대항하였습니다.
일본은 당시에도 계속 비닉을 유지하며 군수물자를 팔아치워 이득을 보는 행위에 집중했습니다.
이들의 분쟁은 결국 조선의 승리로 끝마무리를 지었으며, 대청은 천자의 자격을 상실함과 동시에
청으로 격하되었고, 조선은 대청을 완전한 굴복으로 몰아넣음으로서 천자전쟁을 끝마쳤습니다.
그러나, 두 국가간의 벌인 전쟁의 영향이 만만치 않았던터라, 오히려 방관하고 있었던 일본과 그 외 세력들이
이 전쟁에서 큰 이득을 보왔습니다. 러시아 제국은 몽골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고, 복수를 위해서라면
대청의 패전으로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몽골을 좀 '쑤시는 것' 정도는 손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여기서 두둑하게 챙긴 재물을 계속 국가의 부국강병에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칭제건원한 대조선국에게 일본은 여전히 허리부러질 듯이 굽혀가며 비닉을 유지하고,
이번엔 병자호란 때와 반대로 청에게 영향력을 투사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차츰 늘려갔습니다.
이것이 꽃피우는 날은 바로 명치유신이 제자리를 잡고 일본이 통일국가를 완성할 때였습니다.
이때의 청은 여전히 패배한 후유증이 국가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대조선은 순조의 즉위와 함께 갑작스런 쇠퇴기를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기회를 갖춘다는 말이였습니다.
곧 청은 아편전쟁을 위시한 열강의 침탈과 침공을 받았고, 청의 강건성세는 진작에 성조에 의해 끌어내려진지
오래건만, 결국 큰 저항조차 못한채 열강들의 '나눠먹기'가 시작되었고 청의 몰락은 시작되었습니다.
대조선 역시 순조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세도정치로 인해 대조선 몰락의 첫걸음을 나아갔습니다.
일본은 이미 통일국가를 수렴하고 곧 일본제국의 이륙을 목전에 둔 상황, 그동안 유지해왔던 모든 비닉을 깨버리고
다시 중원으로 '천황의 귀환'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역의 다른국가들이
써먹는 수법을 이용하여 윤요호를 출격시켜 대조선을 도발하였고, 이 도발에 그대로 반응해버린 대조선을
'자기방위'를 명분으로 도발에 응한 성채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강제로 대조선을 회담장에
끌려오게 만들어 자신들의 유리한 협약을 체결시키게 함으로서 대조선 치욕의 날, 경솔국치까지 발돋움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조선은 이미 세도정치로 조정이 분열되어있는 상황, 그나마 남아있던 인물들이 일본의 조약에 관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위험한 약조 내용을 빼버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초전이였으니, 곧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그 이전부터 미국과의 했던 교류를 확대함으로서
점차 힘을 늘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대조선을 잠시 웅크리게 한데 성공했으니 대마도와 구주 지방에도
영향력을 투사해야겠죠?
일본은 첫 승리를 자축하며 곧 청에게도 손을 뻗었습니다.
청은 청으로 격하되기 이전, 대조선의 상국이였으며, 조선이 천자전쟁의 승리를 차지하자
중원의 주도권을 잃음과 동시에 날마다 몰락기를 걷던 중원의 통일 왕국이였습니다.
간도를 포함, 연해주의 영토는 조선이 가져갔고, 현대에서 몽골이 있는 영토는 러시아 제국이 날름가져갔죠.
자신들도 여기서 조선에게 약간의 지원을 해줌으로서 이득을 땡길 수 있었습니다.
중원의 천하관이 깨져버린 청나라는 이후 강역을 회복하기 위해 건륭제가 다시금 수차례의 원정에 회복은 됬지만
되려 이후의 후유증을 전혀 극복하지 못해 점점 난세의 늪에 빠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일본국은 아무리 청과 대조선의 관계가 나쁘다고 한들, 대조선을 침공하기전, 이들을 손보지 않으면
청나라에서 기회를 노린 자들에 의해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을 원천차단 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선전포고를 가합니다.
이후 발생한 청일전쟁은 안그래도 자신들이 천하에서 끌려나왔다는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한 중원인들을
완전한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게하여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있던 중화사상을 문자그대로 박살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렇게 박살난 청은 곧 의화단의 난과 온갖 세력의 난립으로 몇 십년 내로 멸망을 맞이했습니다.
대조선은 이미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했습니다. 군신관계를 역으로 정립해버린 청은 일본에게 맥없이 박살나고
청의 함대가 완전히 수장당했습니다. 딱히 자신들이라고 다르진 않았습니다. 청의 함대가 저리 박살난 것을 보고
현 일본국의 군함과 지금 갖추고 있는 조선의 군함으로는 대적할 수 없음을 직감했고, 그나마 육군으로
대항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이를 벌릴 수 없었습니다.
순조 때 시작된 세도정치의 난립으로 군은 점점 축소되었고, 그나마도 앞서 겪어본 '제너럴 셔먼호 사건'
과 '병인양요', '신미양요'로 인해 근대화를 거친 군대와 거치지 않은 군대의 차이는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결국 청일전쟁 때, 청이 저리 박살나는 동안 대조선은 최대한 일본군이 상륙거점에서 나오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전공이였으며, 청은 일본의 항복서한에 싸인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대조선의 영향력이 더이상
청에도 못미치고, 대마도와 구주는 물론 다른 지방에도 닿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일본은 대조선에 투사하는
영향력을 점차 늘리기 시작해 후일 이뤄지는 경솔국치의 인사들을 양성합니다.
일본국은 비록 같은 국가는 아니었지만, 대명 때의 치욕을 갚은 것을 축하하며 그 다음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다음 상대는 러시아 제국이였습니다. 원래라면 자신을 후원해주는 대영제국의 요청에 맞춰서 대조선을
러시아가 낼름 먹을 수 없도록 견제를 하는 것이 주 역할이였지만, 대조선의 황후, 한 여우년에 의해서
계획이 틀어지고 맙니다.
민황후, 그녀는 대조선국의 위기에 대해 외세를 오히려 더 많이 끌어들여 각국의 수많은 이해 관계속에
묶이게 함으로서 대조선국을 지탱하는 대전략을 내세운 인물입니다. 상당히 어리석은 생각이였지만.
일본국은 그녀를 암살할 계획까지 세워놨지만, 대조선과 직접적으로 충돌할 일이 생긴다면,
필연적으로 러시아의 개입이 생깁니다. 복수는 이뤄지겠지만, 일본군과 일본국의 상태는 만신창이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였습니다.
결국 일본국은 러시아 제국을 치워버리기로 결정합니다. 대영제국의 요청에 어느정도 응하면서
다른 국가의 러시아 견제에 대해 지원도 같이 받을 수 있었으니깐요.
대국적 논의가 결정된 몇 일 후, 러시아 제국은 일본국으로부터 선전포고문을 받게됨과 동시에 기습을 받습니다.
문자그대로 파죽지세로 치고드는 일본군의 기세에 러시아 제국은 기습공격으로 혼비백산한채 일본국에 의해 유린당했고,
자신들이 자랑스러워 했던 함대는 타 국가의 견제에 의해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으며,
곧 자신들에게도 국가 존속의 위기, 차르가 민중을 상대로 총탄 발사를 명령하여 혁명이 터지게 된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국을 밀어낼 반격 병력의 편성에 불구하고 그들은 항복서한에 사인합니다.
그렇게 다른 열강과 청, 대조선의 예상과 다르게 러시아 제국의 우세라 말했던 모든 이들의 생각을 박살내며
일본국은 승전을 거둬냈습니다.
연속된 전쟁, 점점 쌓이는 빚, 생각이상으로 거셌던 러시아 군의 저항.
일본군의 피해가 생각이상으로 누적됬지만 상관없습니다. 이제 조선의 여우 녀석이 끌어들인
모든 지원군을 거둬내고 우세를 점했으니, 이제 대조선을 무릎 꿇일 일이 남았습니다.
일본의 오랜 치욕이자 몇번을 치룬 권토중래 끝에 맞이할 이 전쟁은 일본이 그토록 염원하는 것이였습니다.
곧 이들에게 복수하는 자들의 지지를 모아 대조선에 선전포고문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시점을 돌려 대조선의 상황으로 돌아가봅시다.
대조선은 성조-장조-정조로 이어지는 삼여제의 해동성세(海東盛世)의 시기에도 불구하고 모든 영광과 희망이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정조 시기부터 이따금식 금이 갔던 탕평론 정책이 점점 그 빛을 잃어갔으며, 그 이후 삼대의 황실이 단명해버린 바람에
황권은 완전히 공중분해되었습니다. 또 다시 신하와 대신들의 권력이 강해졌고, 그들이 무책임하게 휘두르는 권력은
곧 '세도정치'의 발현으로 가시화되었고, 안그래도 대조선에게 남아있는 과업의 해결을 더더욱 늦췄습니다.
정조 이후 즉위한 황제, 순조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홍경래의 난과 산발적인 기근발생으로 안그래도
짧은 세자 생활과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해버린 나머지 성조의 계비, 정순황후의 수렴청정을 받고
짧지 않은 수렴청정 시간을 거친 후 그에게 겪을 사건으로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인성황제, 순조는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찾기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적지 않은 시간 내로 들이닥치는 위기와
자신에게 물려준 권력의 부담감을 견디지 못해 지속적인 만성두통에 시달려야 했으며 결국 심신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고
강건했던 옥체가 쓰러지며 조정에서 황제의 영향력이 완전히 증발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인물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순조가 쓰러지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되지만,
그 역시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것인지, 순조 이전의 선제에게 물려받은 질병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 역시
짧은 수렴청정 기간으로 사망합니다. 결국 순조 역시 아들의 뒤를 따라 승하하며 황실의 적자들이
너무나도 짧은 시간내로 친정을 끝마쳤습니다.
이후에 오른 헌종역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순조부터 본격적으로 점화되기 시작한 삼정의 문란과
심각하게 약해진 왕권 사이에서 세도가와 권신들에게 저항하다 그 역시 짧은 친정을 마치고 승하합니다.
효문황제, 헌종은 순조와 비교하여 너무 적은 나이때 즉위했고, 제대로 된 수렴청정 시간도,
학문을 이수할 시간조차 받지 못했으며, 질병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며 황조의 적자조차 못남긴 채,
이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결국 그렇게 황실의 삼대(三代)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 탓에
다음 황실의 후계자는 세도정치로 하여금 권력을 잡은 세도가와 권신의 몫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자로 태어나 평범하게 나무꾼을 하던 원범은 갑작스럽게 집에 들이닥친 신하들의 인도를
받으며 그들의 알 수 없는 속내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황제에 오릅니다.
즉위한 조선 왕조의 6대 황제, 강유황제 철종은 당연히 교육은 물론 황제의 업무와 어떤 접점도 없었던 탓에
그는 수렴청정 기간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학업에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꼭두각시에 가까웠던 황제나 다름 없었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건 별로 없었고
황실의 손에서 완전히 떠난 또 다른 예송논쟁과 임술민란, 삼정의 문란 문제가 더더욱 불거워져
결국 그 마저 짧은 친정을 마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전, 자신이 입던 황룡포를 내던지고 다시 나무꾼 복장을 입은채로 조선의 영물과
대신, 신하들 사이에서 짚으로 만든 깔개를 펼치고 무릎 꿇고 앉아 대조선을 보신(普信)해달라며 절규하던
일화는 백성들 사이에서 간간히 도는 이야기였으며, 민심이 대조선을 외면했다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이 다음 황제에 오른 황제는 광무황제, 고종이였습니다.
그 역시 철종과 마찬가지로 꼭두각시 임금이나 다름 없었으며, 이후 흥선군 이하응이 직접 대조선의 개혁을
선도하고 집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후 벌어지는 윤요호 사건과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도 고종은 졸속에 가까운 행정처리를 해버리고
제 역량을 증명하지 못했으며,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쫒아내고 나서야 그제서야 제 능력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자질은 황제로선 부적합한 '범재'에 불과한지라 앞서 짧은 재위시간을 마치고 떠나버린 선황에
비해선 좀 더 나았겠지만, 결국 그는 쉽게 변심하는 마음과 친일파가 점령한 황실에 의해 항상 대부분의 행동에서
제동이 걸리고 거동에 제한이 생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황위는 일본의 조선 침공 결정 당시, 고종을 안락의자황제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진행하면서
그를 살려둬야할 필요성을 일본 대신들 사이에서 논의되었고, 그의 황권을 남겨두기로 결정하며 황제 직위는
사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의 대조선 침공이 시작되었고, 대조선은 모든 것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 일본군과 난전을 펼쳤습니다.
대조선은 이를 '을사왜란'이라고 지칭하였으며, 여전히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과
윤요호 사건과 달리 이번엔 군이 준비되어있다는 근거로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을 천명했습니다.
일본국은 이를 '천황의 귀환'이라고 표현하며 본격적으로 비닉을 끝내고 이빨을 드러낸 윤요호 사건을 기점으로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침공까지를 표현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승자가 누구인지는 이미 우리 모두 알고있습니다.
대조선국의 상황은 이미 최악입니다. 끝까지 군제개혁을 못마친 군대는 근대화된 일본군과 최악의 교전비를 냈고
앞서 민왕후가 지원으로 끌어들인 러시아 제국, 청은 이미 한번의 패배를 경험하고 오히려 간도를 빼앗고 싶은
러시아 제국의 지원과 앞선 천자전쟁으로 관계가 이미 최악으로 치닫은 청은 청일전쟁을 마지막으로 대조선을 향한
모든 조공과 지원을 끊어버렸습니다.
그 외 다른 서역의 국가들도 조선의 구조요청을 무시하거나, 이권만을 챙긴채 전장에선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일본국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지금까지 약 200년.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대조선을 향한 복수심을 씹어가며 에도 막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비닉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비닉은 조선이 대조선국으로 천명할 때도, 서역과 제살을 깎아주며 받은 근대화의 기술을 적용할 때도,
계속 유지시켜 지금까지 유지된 것입니다.
일본국은 대영제국의 지원과 러시아 제국 및 청나라부터 조선을 상대로 승전시 몇몇 부분의 이득을 양도하기로
결정하며, 다른 국가로부터 조선침공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데 도움을 받습니다.
대조선은 더이상 어디로든 퇴각할 수 없는 독안에 든 쥐가 되었습니다.
망명은 불가했고, 아관파천같은 상황은 더이상 재현할 수 없었습니다.
상황은 모든 것이 대조선국에게 불리했고, 일본국은 그토록 군자다움을 꿈꾸던 조선의 정신을 비웃듯
새로운 시대정신이 곧 조선을 쓸어버릴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벽난로의 불을 보듯 뻔하게 흘러갔습니다.
시작부터 얻어맞고 시작하는 대조선군의 수군은 문자그대로 표적지로서 포탄의 착탄점이 되었고
일본의 군함에게 약간의 손상만을 입힌채 전원이 바다로 수장되고 맙니다.
상륙은 손쉽게 이루어져 그들이 한강을 도하하고 있을 때, 이미 육군은 임진왜란 당시를 방불케하는
일본의 대군을 보고 사기가 바닥나거나, 진작에 무기를 버리고 탈영하여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남아있는 조선군과 황실친위대는 구식 총기와 구식 화포로 최선을 다해 저항했습니다.
황실 친위대의 마지막 영물들은 끝까지 손과 이빨에 피를 묻히며 일본군의 총칼에 찢기고
황실 친위대의 마지막 군인들은 끝까지 방아쇠를 손에 놓지 않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지며
조선군은 와해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진격에 발목을 잡아 시간을 끌었지만, 역부족이였고
어떻게든 모인 의병들은 일본군 야포의 사격에 노출되어 사지가 분리되었습니다.
그렇게 대조선은 끝까지 궁궐에서 피난하지 않은 고종 황제가 일본군에게 포위된 것을 마지막으로
대조선은 패전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은 고종을 일본이 대조선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기 위한 패로 안락의자에 앉히는데 성공했고,
또한 대조선이 가진 영토 중 제주도, 간도, 구주, 대마도는 아예 본인들의 영향력 내로 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오직 대조선의 본토, 한반도와 여전히 일본국에 저항하고자 하는 민중만이 남았습니다.
물론, 완전히 주권을 빼앗진 못했습니다. 황실친위대는 끝장냈으나, 흩어진 조선군을 일일이 찾아서
토벌하려 군사력을 더 쏟는순간, 일본국조차 더이상 쌓이는 빚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조선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순간, 대조선은 천자전쟁 이후의 청나라처럼 대조선 본인조차
감당될 수 없는 난세가 열릴 것이고, 당연히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일본군이 이걸 바로잡기 위해
군대를 오래토록 타국에 둬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였습니다.
다른 요인으로 연이은 전쟁에 군의 피로도는 심각했고, 의회는 군부의 폭주에 지금이라도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계속 안건이 제기되었습니다.
불만족스러웠지만, 원수를 갚았다고 생각하는 일본국은 조선의 주권과 황제의 권한을 유지하는 것으로 타결,
다른 사안으로 임진왜란때 뺏긴 구주와 대마도를 지금 와서 되찾거나, 간도와 제주를 자신들이 지배한다 한들,
오히려 이것을 다시 융화시키는데 일본을 고생시킬 것이다 라는 판단이 당시 일본국의 의회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좀 더 영리하게 굴어서 직접적으로 붙어있는 구주 만을 정식으로 할양받고,
나머지 대조선 영향력에 들어가 있지 않은 영토는 일본군이 '친절하게' 도와준다고 명시하며
영향력이 닿는 섬에는 자치령에 가까운 식민지 조성과
본토에 있는 대조선의 주권을 남겨둠으로서 화살 방향을 고종에게 돌렸죠.
어차피 계속 헛짓거리만 하던 황제, 이렇게라도 써먹어야 도움이 되지 않겠나요?
지원해준 '적같은 동맹'에게도 떡고물을 물어줘야 하니까요.
일본은 그때부터 자신들도 서역의 국가처럼 식민지를 거느리고 지지 않는 해의 제국이 되었다며,
국명을 '일본제국'으로 명명하고 대조선의 황위는 일본 천황의 권위 아래에 놓이는 형식으로 만들어
일본은 중원으로 '천황의 귀환'을 화려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복수혈전 끝에 모든 목표를 마친 일제는 비닉을 다시 시도하는 대신, '다이쇼 로망'이라는 문화의 꽃을 피워
일본의 영향권 내 국가는 모두 이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직, 청과 대조선만이 이를 끔찍히 여겼습니다.
일본은 조약상으로 대조선의 주권을 남겨뒀으나, 이미 꼭두각시가 된 정권과 안락의자 황제가 된 고종에겐
모든 업무의 결제를 일본의 감시하에 받아야 했습니다.
누구든 절망할 수 있었던 상황이며, 심지어 독살까지 고려될 수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고종은 현실에 절망했고, 청을 포함한 어떤 국가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을 마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이자, 대조선의 재상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고종의 아내, 민황후의 처우가
일본의 요구로 인해 폐서인이 결정되자, 자신 역시 머지않아 자발적인 사직을 요구받았으며,
민황후 그리고 이후의 고종과 마찬가지로 궁궐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습니다.
고종은 허심탄회하게 뒤늦게라도 선황의 정신을 이어 광무개혁을 실시해 대조선의 문제를 고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업무가 일제에게 감시되고 있었던 상황이지만, 고종이 제시한 개혁안은 당시 일제에게도 대조선 통치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의 개혁을 승인해주고, 찝찝한 마음 속에서 고종은 개혁을 끝마칩니다.
그리고 일본의 재빠른 침공 결단으로 인해 밀린 서류와 고종의 퇴위요구와 비판 속에서 설립된 대조선국 중추원에 대해
건설만 승인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1907년, 고종은 건강상의 이유로 퇴위하였으며, 그에 따라 다음대의 황제 순종에게 다음 제위가 계승되었습니다.
그의 역사적 행보는 좋든 나쁘든 크게 눈에 띄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업무가 일제 손아귀에 있었고
본인이 참가하지 않더라도 황실의 대리인이 따로 대조선의 일을 결정해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습니다.
대조선국의 황제로서 백성을 격려시켜준다던가,
이따금 제사나 행사에 얼굴을 비추면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다던가,
거의 와홰되었으나 착호갑사에게 대민지원 활동을 명하는 등의 그의 활동은 이후 몇십년이 지나
일제가 결국 서역의 다른 동맹들과 세계정복의 야욕을 꿈꾸다가 그들의 옛 동맹, 대영제국과 미합중국으로부터
버림받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열도에서 피어났을 때, 대조선은 광복절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기여한 것이 없었던건 아닙니다. 청은 청일전쟁 당시 또다시 외세에 의해 짓밟혀지고 절치부심하여 이홍장 주도의
부국강병 운동과 의화단 운동 등 여러차례에 걸쳐 다시 기상하려 했으며, 이는 대조선에게 복수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조선의 몰락 이후에 세워진 중원의 국가 중국에게 다시금 학살과 충격을 안겨준
일본국에게 앙갚음을 선사해주려는 마음이 많은 지분을 차지했습니다.
우습게도 러시아 제국은 일제가 간도를 포함 일부 섬의 햘양권에 대해 시치미를 떼면서 양도할 의향을
전혀 내비치지 않자 일제에서 벌여지고 있는 테러활동에 자금후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결국 러시아나 테러단체나 자기들끼리 치고박고를 반복하며 유명무실해졌다는 결과는 허탈하지만 말입니다.
또한 대조선은 여전히 그림자 속에서 황제를 보좌하는 착호갑사와 조선군에서 관직을 내려놓고
간도와 대마도, 구주, 제주에서 일제의 식민지 독립을 계속 도와주고 있었던 열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일제의 공산품 수입에 저항하고자, 대조선의 부호들이 한데모여 '물산장려운동'을 펼쳐
서역으로부터 많은 물건을 들이고 조선의 중공업과 고부가가치 산업들을 유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는 조선군에서 도울 일이 없다 판단한 군인들은 패전 직후 직접 서역과 온 대륙을 쏘다닌 끝에
이역만리의 국가에서 병법을 배우고 오거나, 직접 그들 사이에서 복무하여 힘을 길렀습니다.
학자들은 대조선이 패배한 덕택에 권력만 노리는 권신과 세도가들이 되려 쓸려나가고
'그나마'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는 친일파들이 국가에 남아 대조선이 세도가와 권신들의 행패로 방치시켜놓은 조세 제도와
흩어진 도량형 단위를 통일시키고 대조선이 선포된 이래 중화사상이 박살나고 조선만의 소중화 사상을
서방에서 주창한 '민족주의'와 연결시켜 발전시켰습니다.
민중은 인내했습니다. 일본국도 했고, 과거 왕조의 효종이 그랬듯이 언젠가 빛은 옵니다.
비록 이 패전에는 조선 황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지만, 그 때의 앙금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고나서 였습니다.
대조선은 적극적인 참여는 힘든 상태였으나, 간접적으로 일제와 그들의 동맹인 추축국에게 대항하는 전선을
계속 후원하였으며, 후일 일제의 몰락작전에 참가할 수 있음을 연합군에게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일제에게 대항하던 중국은 이를 감명깊게 여겨 이후 추축국에 관한 전후처리 회의에 초대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합국은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참여한 이 회의 속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식민지의 해방과
세계국제연합의 창설을 논의했고, 마지막으로 인권에 대한 논의가 체결됨으로서
세계의 난세는 끝을 맞이했습니다.
이후 대조선은 순종의 양보 아래, 황실이 가진 모든 권한을 민중에게 양도했으며,
그동안 대조선에서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기업가'
간도와 제주, 대마도와 구주를 드나들며 그들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독립열사'
조선군에서 뛰쳐나와 연합군에 의용병으로 합류하여 일제와 추축국에 직접 대항한 '군인'
혼돈과 격변의 시대 속에서 '조선왕조실록'과 '한국어와 한글'을 보존한 '학자'
대조선의 주권 독립을 격창하며 일제에게 저항 운동과 시위를 전개한 '민중'
순종은 더는 조선 황제가 대조선의 주도권을 쥐어야 할 이유가 없다며 그들에게 주권을 양도했습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대조선국 중추원에 대한 권한이 인정되었으며, 현 대한민국 의회의 모태가 되는 기관이
수립되었고, 대조선국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변경되며, 조선의 황실은 이름만이 남게되었습니다.
순종은 마지막 여생을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이 그랬던대로 궁궐에서 보냈습니다.
제위는 그 다음 적격자인 의성황제, 의종에게 제위가 넘어갔습니다.
이후 역사는 다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의 역사로 흘러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