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천년의 숭유억불을 끝낸 위대한 스승. -당대의 여느 의인이 그러했듯이 용운 스님 또한 집권 초기 백산의 진의를 의심했다. 그가 직접 본것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조국의 현실에 환멸하여 속세를 등져 출가했고, 이후로도 절대로 속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당시 용운 스님은 그의 저서를 빌려 백산을 나라를 좀먹는 「개나으리」라 비꼬았다. 그만큼 나라를 러시아에 팔아치운 백산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던 것이다. -그런 그가 백산과 화해한 것은 대공황 이후의 일이었다. 중생을 바르게 이끌어야할 승가가 앞다투어 중생들을 현혹 시키는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용운 스님은 반 파시즘 운동에 앞장섰고, 이러한 그의 자세는 교권 파시즘을 경계하던 거국내각의 인식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하여 백담사에서 만난 두 사람은 딱 한가지에 동의했다. 숭유억불 정책을 완전히 끝내고 교권 파시즘 운동에 맞서 승가를 개혁할 것. 두 사람의 일기에 따르면 백산의 입에서 먼저 「숭유억불을 끝내겠다」는 약속이 나오고 그 다음에 용운 스님의 입에서 먼저 「승가를 개혁하겠다」는 약속이 나왔다 한다. -이후 용운 스님은 반 파시즘 운동의 사령관이자 승가 개혁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했다. 그는 살아 생전에 생불이라 칭송 받았고, 몇몇 속된 자들은 그를 미륵이라고도 일컬었다. 하지만 만해 한용운은 「이 모든 것은 백두산의 선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반면 백산 노정남은 「이 모든 것은 오직 만해 한용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였다. 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두 거인다운 일화였다.
-국군 건군의 어버이이자 선말한초 만주의 군벌.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이범윤은 문민정부에 송곳니를 겨눈 군벌이라 저평가 받았다. 그가 스스로 문민정부에 부월을 가져다 바치며 시대의 패배자로 전락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연구결과에 따르자면 다르다. 이범윤과 북부군 또한 그저 조국과 민족의 안녕을 바랬던 애국자들이었다. 다만 백산과 문민정부는 성공했고, 이범윤과 북부군은 실패하여 사라졌을 뿐이다. -이범윤은 당대 만주의 여느 군벌들과 달랐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약탈하지도 않았으며, 필요 이상의 혈겁을 쌓지도 않았고, 병사들이 함부로 아녀자를 희롱하면 엄히 다스렸다. 물론 아편 또한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아편을 복용시키지도, 제 손으로 아편을 사고 팔지도 않았다. 되려 아편 밭이 발각되는 족족 모조리 불태우고 밀수범을 참살했다. 그는 다만 만주의 조선인들이 조금이나마 평안해지기를, 황제의 은혜가 이 압록강 너머까지 두루 미치기를 바랬다. -하지만 시대적 현실이 그에게 매국의 길을 강요했다. 제 손으로 아편밀수를 거부하며 독자적 자금줄을 포기했기에 현지의 백인 자본가들에게 휘둘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국의 안녕을 바라던 북부군은 백인들을 위한 용병으로 전락했다. 통탄할 일이었다. 어쩌면, 후일 이범윤이 순순히 부월을 넘겼던 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 손으로 백산 노정남에게 부월을 가져다 바친 후 이범윤은 아무말 없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일기나 저서를 통하여 저를 변명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당시 유행하던 정교회 신앙에 몸을 바쳤다. 사후에도 다른 북부군 출신 군관들이 그렇듯이 가족묘를 거부하고서 정교회 성당에 묻혔다. -언젠가 연변에 가면 가장 먼저 이범윤과 북부군의 공훈을 기리는 공덕비가 당신을 반겨다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라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기억해달라. 선말한초는 애국자가 매국노가 되어야 했던 시대였다.
◎익성군 (翼成君) 이명복 (李命福) _ -‐- _ _V_ -ニニニニニニ=- _ /,ヘ=∧/\/\/\/〉=`、 / ̄l , ‐、 l=/ _ _ -ニヽ ∨ニ- ! | ./ 〉 |/ <x─ ミ </ '/二| | | / / |{ / ̄.、 / ̄ .ヽ }x‐゙ v |./ / ハ └─=ニ _  ̄ ̄ } /⌒>‐ 、 { r〉 / 、 / // ''ノ──‐┐ / l ゙、/ / /八 r┘ --| __/ー〈___/ / | `¨¨ ´ /| ) / | ___,,.....::::::::/ /ニ- _ ,,. イ 、 \::::::::::_ ─/ /ニニ\ニニニニ/| \ `<__/ ∧ニニニニ=--=ニニ/ _ -ァニ- _ _ _ -ニ]二二ニニニニニニ/ _ -二/ニ/ \_,,.、丶´/ニニ|二ニニニニニニイ /-ニ/ニニ/ \____,.、/-ニ二|ニニニニニニニ/ /ニニ</\./ /ニ/\|二ニニニニ-/ /二二ニニニ-∥ ∥ニニニニニニニニ', . /ニニニニ/ニニ∥ |二二二ニニニニニニ', /二ニニニ|二二l |ニニニニニニニニニニ', . |二二ニニ|二二| |二二ニニニニニニニニ', -연산, 광해를 능가하는 최악의 암군이자 폭군 -21세기에 와서 재평가 받은 북부군과 이범윤과는 달리 오늘날에도 익성군을 재평가하려는 시도조차 없다. 워낙에 실록에 기록된 포악하고 무능한 행보가 쟁쟁하고 또 수많은 당대 사람들의 일기로 실록에 적힌 내용이 교차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뒤를 이은 것이 순종대제와 홍익대제가 아니었더라면 전주 이씨는 익성군의 대에 왕업을 잃고 말았으리라. -익성군은 처음에는 청에 의지하였다가 그 다음에는 일본에, 또 미국에 의지하였다가 또 러시아에 의지하였다가 하면서 오락가락 거렸다. 그 와중에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궁리는 커녕 제 사치와 향락에나 집중했고, 축재에 열중하여 끝내는 오군영이 왕에게 칼을 겨누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그마저도 부족하여 외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학살하였으니 어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랴? -모두를 용서하고 타협하였던 그 문성공 백산 노정남조차 익성군만큼은 용서하지 못하였다. 실록에서 이르기를, 걸인으로 위장하여 민가에 몸을 숨기고서 청나라로 망명을 가려 하였던 익성군을 발견한 백산 노정남은 끝내 울화를 참지 못하고서 몸소 칼을 뽑아 겨누며 「황상은 폐위되셨소이다!」하고 일갈했다 한다. 끝까지 외세에 의지하여 제 자리를 지키려 하였던 익성군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오늘날 백산이 황실을 모독했노라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다보니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익성군 본인이나 익성군을 본 딴 배역이 자주 등장하고는 한다. 물론 개중에 선역은 지금껏 전무하다. 혹자는 「그 연산을 능가했다는 사람이 나왔다는 게 익성군의 역사적 의의다」라고도 한다. 그리고 실로 그러했다.
-무위지치를 이룩한 성군. -비아냥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암살미수 사건 이후로 백치가 된 이척은 내각이 뭐라하건 관여하지 않고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관여할 수 없었던 거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대한의 입헌정치가 뿌리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당시 백산은 모든 공을 융희제에게 돌리고 반대로 모든 과는 저에게 돌렸다. 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익성군의 그 모든 패악을 겪고서도 여전히 대한의 백성들은 전주 이씨에 동정적이었고, 새로운 내각이 살아남으려면 이를 이용해 민심을 끌어와야했다. 결과적으로 융희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만 백성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무위지치를 이룩했다. -백산은 그런 융희제에게 동정적이었다. 지난 암살미수 사건이 백산과 무관하지는 않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는 친러파와 친일파가 대립하던 선말한초 정치의 희생자였다. 그탓일까. 융희제 이척이 천붕한 이후에도 백산은 죽는 날까지 매년 기일마다 융희대제의 종묘를 참배하며 그의 넋을 기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늘날까지도 경복궁에서는 융희제의 귀신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끊이지를 않는다. -사후 융희대제는 의종의 묘호를 추승 받았다. 옛 주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묘호였다. 대한이 주명의 천명을 계승하였음을 보여 여전히 소중화에 집착하던 유림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가 숭정제에 비할바는 아니리라. 융희제의 치세에 대한제국은 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이 재조지은을 입었던 러시아에 재조지은을 입혀 러시아의 혈맹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제의 칭호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치세였다.
-대한의 국모. -국모라는 단어보다 고황후의 인생을 나타내기 좋은 표현도 또 없으리라. 그녀는 제 아버지가 그랬듯이 일생을 대한에 헌신했다. 장차 자라나 대한의 황제가 될 태자를 엄히 가르쳤고, 또 쉴틈없이 축첩질에 열을 올리는 부군을 전면에서 꾸중주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아내가 남편의 기를 죽여서야 되겠냐며 비아냥거리지만, 덕택에 홍익대제는 호색가가 아니라 민족의 성웅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고황후는 백산 노정남의 유일한 이해자였다. 그녀는 제 어미조차 외면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아버지를 지지해주었다. 야사에 따르자면 전주 이씨에 시집간 것조차 고황후가 먼저 백산에 그리 청하였다고 한다. 교차검증은 불가능하지만, 그런 야사가 돌 만큼 고황후의 책임감과 결단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고황후는 살아 생전부터 당대 신여성의 상징으로 떠받들여졌다. 위대한 부군에 기죽지 않고서 제 뜻을 펼치는 그녀의 굳건함에 많은 신여성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사후에도 다르지 않다. 일부 극단적인 여성우월주의자들의 경우에는 홍익지치는 홍익대제가 아니라 고황후 노씨가 이룩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보통은 이런 극단주의자들의 주장은 학계에서는 일언지하에 무시되기 마련이나, 오늘날 학계에서도 고황후 노씨의 역할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아닌게 아니라, 실록에 이어 승정원일기가 학계에 공개되면서 고황후가 당대의 거의 모든 궁궐정치에 관여하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시대가 낳은 비극의 주인공. -아무렴 그녀만큼 자주 영상화된 선말한초의 인물이 또 있을까. 시대에 휘둘리기만 했던 비극적인 젊은 시절과 말년의 행복한 삶까지. 대한제국 문예인들의 창작욕을 자극하기에 그녀의 인생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영상매체에서 왜곡된 사실 또한 너무나 많다. 가령 그녀의 두번째 부군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와의 풋풋한 연애담이 그러하다. 영상매체에서는 흔히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여 맺어졌다고 묘사하거나 케렌스키가 먼저 그녀에게 반하여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억지로 혼인을 맺었다 묘사하지만. 당대의 기록매체를 통하여 교차검증되는 바 두 사람의 혼인은 그런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혼에 불과했다. -일부 여성우월주의자들은 그녀의 사례를 예시로 들며 백산 노정남을 권력에 미쳐 딸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냉혈한이라고 비난하고는 한다. 학계 또한 그들의 지적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계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당대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분명히 지적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녀의 인생을 얼마나 잘 연기하였는가가 그 여배우의 역량을 평가하는 하나의 지표로 자리잡았다. 오늘도 충무로에서는 선배들을 뛰어넘고자 발버둥치는 백조들의 피눈물 나는 연기대결이 한창이다.
-당대 신여성의 화신. -백산의 자식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없는 인물. 하지만 평범해서 나쁠 이유는 없다. 그만큼 그녀의 인생이 후대까지 회자될만한 큰 굴곡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는 이야기니까. -숱한 자료에서 교차검증되는 바, 그녀는 집안의 귀염둥이였다. 집안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언제나 아버지 곁을 멤돌며 애교를 떨었다. 그리고 백산 또한 그런 딸아이를 내치지 않았다. -그녀는 백산과 집안의 안식처였다. 모두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녀만큼은 여전했다. 그래서 비록 역사에 남지 못했으나, 그녀는 당대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 아무렴, 해보고 싶은 건 뭐든지 해보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으니까.
-대한제국 정치외교학계의 위대한 대스승. -그는 본디 어버이의 뒤를 잇기 위하여 자라났다. 모두가 그리 기대하였고, 백산 또한 그리 기대하였다. 또 그 자신 또한 언젠가 어버이의 뒤를 잇게 되리라 믿고서 우직하게 나아갔다. 오산이었다. 그는 현실과 재능의 벽에 부딪혔고 방황한 끝에 제 길을 걷기로 하였다. 지난날 그를 궁지로 몰았던 어버이 또한 덕암의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그리하여 정계를 떠난 노재하는 두번 다시 정계로 돌아오지 않고서 우직하게 제 길을 걸어갔다. -만 서른 다섯의 나이에 성균관 대학의 정치학 박사가 된 덕암은 그의 아버지를 연구하는데 일평생을 바쳤다. 반평생을 아버지 밑에서 일해온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백산의 치세를 정리하여 세권의 책으로 남겼다. 오늘날 대한제국 정치외교학계의 성서로 추앙 받는 「숙의지치(熟議之治)」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일평생 정치란 타협의 예술이라 말했다. 필요하면 타협하고, 약속을 언제건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건 현실정치가 아니라 하였다. 덕암은 덕치를 믿었다. 비록 시대의 풍파에 무너졌으나 공맹의 왕도가 여전히 대한에 살아숨쉬고 있노라 말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의 제자들도 그리 말한다. 오늘날 세상은 그를 새로운 대한의 퇴계요, 율곡이오, 우암이었노라 말한다.
-을지문덕, 강감찬을 능가하고 충무공 이순신에 버금간다는 민족의 성웅. -그러나 어렸을 적 충무공은 군문에 뜻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활달한 소년이었다. 무엇이든지 해보고 싶고, 무엇이든지 알고 싶어하는 소년이었다. 그랬기에 충무공은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주저 없이 조선인 의용군을 이끌고서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 또한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기심 많은 청년은 외눈박이 호랑이가 되어 돌아왔다. -세계대전은 지옥이었다. 독가스를 내세운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한 쿠르스크 대전에서 조선인 의용군은 홀로 후방에 고립 되었다. 공포에 질린 아군이 무질서하게 퇴각하고 기세가 오른 적군이 공격해오는 그 지옥같은 전장에서도 충무공은 전우들과 서로 의지하며 참호를 지켜냈다. 그리하여 충무공은 최후미의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손수 알렉산드르 넵스키훈장을 수훈 받았다. 유색인종 의용군으로서는 그가 러시아 역사상 최초였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불같은 성미의 덕장이었다. 그 차르의 면전에서 「포탄이 부족합니다!」라고 일갈한 그였으니 오죽했을까. 그는 주변이 뭐라 하건 개의치 않고서 제 군공과 가문의 뒷배를 이용해 군제개혁을 밀어붙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손에서 국군은 1류 군대로 다시 태어났다. -중국과의 반 파시스트 성전은 그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화룡점정이었다. 30만 남짓한 국군으로 300만 대군을 격파한 그는 영원불멸한 국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육군 병영에는 어딜가나 충무공의 이콘이 걸려있다.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국군의 어버이이자 힘없는 사병들의 수호신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그 좋은 시절을 상징하는 영원한 바랑둥이이자 멋쟁이. -그는 타고난 바람둥이이자 탕아였다. 나면서부터 사람을 사귀기 좋아하고 나서기 좋아했던 그는 러시아 유학 시절에 마침내 꽃피웠다. 문예공은 극동에서 온 재롱둥이라며 러시아 사교회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그 자신 또한 그런 세간의 관심을 즐겼다. 모든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건만, 그의 생애는 러시아 혁명과 함께 송두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혁명의 광기를 목격하고서 한국으로 돌아온 문예공은 반전주의자이자 인본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극단주의와 혁명의 광기를 혐오했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 그 참혹한 광경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왔기에 그러했다. 그는 피투성이 맨셰비키 정권을 비꼬았고 무능한 백러시아 또한 비꼬았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와 선을 긋고 언론재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여전히 그는 품위와 풍류를 잊지 않았다. 문예공은 「인생은 아름다워야한다」고 말했다. 인생이란 본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한국인 모두가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를 바랬다. -물론 그는 부패한 재벌이자 숱한 처녀들을 희롱한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말년에는 그 말썽쟁이 하워드 휴즈와 어울리며 절친이 되었으니 오죽할까. 그러나 문예공은 동시에 한국에 라디오와 TV를 도입한 선지자이자 반 파시즘 성전의 선봉에서 싸운 인본주의자였다. 공도 과도 절친 하워드 휴즈와 같던 셈이다. -오늘날에도 그가 창립한 「청구신보(靑邱新報)」에는 사옥마다 그의 이콘이 걸려있다. 그는 한국 언론계의 수호성인이자, 자유로운 팬촉의 상징이다.
-문성공 백산 노정남의 정부인. -그녀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우선 그녀가 대외활동을 꺼렸을 뿐더러, 백산이 매국노로 전락하며 부부관계 또한 소홀해져 일기에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공식석상에 모습을 들어낸 적도 없고, 먼 훗날 나이를 먹고서야 겨우 다시 백산일기에 등장하니 도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수도 없다. -하지만 추측할 여지는 있다. 백산은 끝까지 윤씨를 버리지 않았다. 아무렴 러시아 유학 시절 세명의 아들을 보았을 정도이니 얼마나 각별했을까. 그처럼 뜨껍던 부부의 사랑조차 식게 만든 모진 시대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오늘날 백산 노정남의 묘를 찾으면 부인 윤씨 또한 곁에 묻혀있다. 백산 노정남이 먼저 떠난 부인의 곁에 묻히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
-백산의 사형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가, 를 추측하려면 백산의 일기를 참고하는 수 밖에 없다. 당연히 교차검증은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오늘날 학계의 시각은 대단히 편향적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기강용이 백산에게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전해진다. 그는 백산의 의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성균관에서 쫓겨나고 학당을 일으키던 젊은날의 그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런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이 백산에게 그토록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훗날 백산은 매 일기마다 향운을 그리며 「5년만 더 기다려주셨으면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만일 그가 끝까지 함께했더라면 분명 백산의 위업도 볼 수 있었을테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인간사는 한치 앞도 모르는 것. 한순간의 의기를 참지 못한 향운을 탓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에도 성균관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물론 백산 노정남이 손수 지은 것이다. 만일 언젠가 성균관에 들를 일이 생긴다면 유리관 속에 전시된 백산이 손수 지어 바친 향운을 기리는 한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백산의 막내동생. -어렸을 적부터 백산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고 전해진다. 손수 밭을 매야하던 몰락양반 집안에서 남자 뿐인 삼형제에 막내 동생으로 태어났으니 오죽할까. 어린 시절 정남에게 막내동생은 아들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막내동생의 분노는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으리라. 향운을 묻고서도 일기를 적었던 백산일기에도 막내동생을 죽여야만 했던 날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지나친 슬픙메 그만 졸도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막내동생을 묻고 난 뒤로 백산일기에는 눈에 띄게 해학과 천진난만함이 자취를 감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직하고 과묵한 백산의 모습은 백암을 묻고 난 다음에 변하고만 모습이다.
-대한제국의 정도전이자 제갈무후. -이런 찬사조차 그를 평가하기란 아직 부족하다. 그는 가장 낮은 곳을 자처한 사나이였고, 그 좋은 시대의 주춧돌이었다. 숱한 의인들이 있어왔으나, 그렇다 한들 백산이 없었다면 그 좋은 시대는 완성되지 못했으리라. -그는 그 호 그대로 산이었다. 모든 것을 끌어안았고 모든 수모를 감내했다. 문성공 노정남은 대한제국의 국부였다. 오직 집안을 위하여 묵묵히 견디고 우직하게 나아갔던 만인의 어버이였다. -오늘날 21세기 서구사학계에서는 노정남을 일컬어 「동방의 페리클레스」 내지는 「성공한 키케로」라 일컫는다. 그의 행적이 여느 동양 정치가들과는 달리 옛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민주공화정치가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사학계에서는 백산 노정남은 그저 백산 노정남일 뿐이다.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백두산 같은 사나이. 그것이 한국사학계가 말하는 백산 노정남이다. -82세의 일기로 천붕한 백산 노정남은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상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유훈을 남겼다. 그의 지난 생애 겪어온 하고 많은 사건들이 그러했듯이, 백산 노정남의 죽음 또한 지나가면 잊혀질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백산이 틀렸다. 세상은 여전히 백산 노정남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그의 기일이면 대한제국 전역에서는 그를 기리는 조기가 펄럭인다. 저 바다 건너 일본과 혈맹 러시아조차 그의 죽음을 추모한다. 지난 반백년 간 잊지 못하였듯이, 앞으로의 반백년 또한 세상은 그를 잊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