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헌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이 됐으면 했다. 어린 시절에 멈춰버린 사람. 저도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걸 지헌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왜 더 어른스럽고 남자다운 척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걸 지헌을 통해 깨버리고 싶었다. ‘애처럼 되어 보세요’ ‘하고 싶은 대로 해보세요’라는 부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헌은 무엇을 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같이 흐뭇해했던 것 같다.
기준을 안 두려고 하는 게 제 기준이다. 예전에는 이거 저거 확실한 기준이 있었는데 지금은 제 마음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다. 내 마음이 끌려가면 하는 거다. 지금은 다 열어놓고, 보려고 한다. 다양한 캐릭터를 하면서 깊이도 찾고 싶다. 거창할 수 있지만 저를 통해 밝은 세상을 보여주고 희망을 주고 싶다.
그러나 입추가 지나면서 더위가 한풀 꺾인 느낌도 듭니다. 낮에는 여전히 덥지만 새벽 온도는 많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있는 시골은 아침 기온이 21도까지 내려가 창문을 열어놓고 자면 아침에는 약간 쌀쌀한 기분이 듭니다. 아직 말복이 지나지 않았으니 무더위가 8월 말이나 9월 초까지 이어지겠지만 밤에 열대야가 되는 일은 앞으로 한두 번 정도에 그칠 겁니다. 계절적으로는 더운 날씨지만 하늘 저 위에는 벌써 찬바람이 불어 가을이 다가오기 시작한다고 해서 ‘입추’라고 합니다. 입추가 지났으니 이제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단지 확률 안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것일 뿐이에요. 질문자가 지금 암이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도 특별한 게 아닙니다. 암은 100명 중 1명에게 일어날 수 있는 확률에 해당되는 병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지, 그 일이 일어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 신의 저주는 아니잖아요. 교통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확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추석에 천만 명이 이동한다면 교통사고로 5명에서 10명 정도가 죽을 확률이 있습니다. 추석 때마다 사람이 많이 이동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사고를 좀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시스템을 개선하면 사망자를 10명에서 5명으로, 5명에서 3명으로 줄일 수는 있지만 사고를 완전히 없애는 건 어려운 거예요. 사람이 많으면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자꾸 생각하기보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옥상에서 떨어진 간판에 머리를 맞았을 때 '왜 앞에 가던 사람도 아니고, 뒤에 가던 사람도 아니고, 나만 맞았냐?' 하고 따지다 보면 신비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일단 다쳤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일단 치료를 받은 다음에 왜 간판이 떨어졌는지 조사해 봐야 합니다. 공사 현장이기 때문인지, 간판이 떨어진 이유가 바람인지, 간판이 낡아서인지 따져보고,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태풍이 불 때는 조심한다든지, 낡은 간판은 정부에서 전부 교체를 하게 한다든지, 공사할 때는 보호막을 쳐서 행인이 다니는 데는 건축물 잔해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한다든지, 이렇게 개선을 할 수 있으면 전화위복이 되는 겁니다. 이게 단순히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런 개선점이 안 나옵니다.
아이를 잘 키우려고 너무 애쓸 필요가 없어요. 질문자가 행복하게 살면 아이는 저절로 잘 큽니다. 자기는 불행하게 살면서 아이는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이치에 맞지가 않습니다. 스님이 늘 근심 걱정이 많고 우울해하면서 여러분한테는 '행복하게 사세요' 이렇게 말하면 설득력이 있겠어요? 스님부터 이렇게 밝은 얼굴로 사니까 그나마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설득력이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