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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테스터

2018-05-26 15:01:53 - 2018-06-15 00:46:57

0 익명의 테스터 (1367641E+5)

2018-05-26 (파란날) 15: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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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익명의 테스터 (0840253E+5)

2018-06-06 (水) 08:23:09

피한다, 돈다, 내려 찍는다. 이상의 세 과정을 거치는 것 만으로 하나의 죽음이 이루어졌다.

" 키에에엑- "

목덜미에 단검이 꽂히는 순간 단말마를 내지르며 무너져 내리는 던전 리자드의 시체를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내려다보는 검은 머리의 소년.

" 부디 편해지기를. "

모험가들의 적인 몬스터의 죽음에 예를 차리는 것은, 서린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종종 보이는 특이한 습관 중 하나였다. 아직까지는 누구와 함께 던전에 내려온 적이 없기에 다른 이들의 구설수에 오른 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 별로 그런 게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 엇차. "

몬스터의 죽음에 예를 차리건 말건, 그 죽음으로부터 챙길 수 있는 부산물까지 내버려두는 건 아니다. 리자드의 시체를 헤집어 붉은빛으로 빛나는 마석을 집어 허리에 찬 가죽 주머니에 넣는 서린. 동시에 리자드의 시체는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모습에 다시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짧은 예를 표한 서린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 키하아아아! "
" 이크. 한 놈 더 있었나. "

조금 전 잡은 녀석뿐인 줄 알았더니 동료가 있었냐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는 서린.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재차 손톱을 휘둘러오는 몬스터의 모습에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 * *


미궁도시 오라리오. 던전의 위에 세워진 바벨을 중심으로 세워진 모험가와 신들의 도시. 모험을 하려면 오라리오로 오라는 말처럼, 수많은 가능성과 기회의 땅임과 동시에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 이래저래 수상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알게 뭐람. "

굳이 파고들자 한다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겠지만, 서린으로서는 오라리오의 뒷면이 어찌 됐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 나는 우리 여신님 먹여살리기도 바쁘거든- "

마석을 환전한 돈주머니를 짤랑거리며, 약간 흥이 오른 기색으로 적당한 가게를 물색하는 서린. [ 북서쪽 메인스트리트 ] 인 이곳에는 주점이나 무구점 이외에도 한 끼 식사를 때울 수 있을 법한 음식들을 파는 노점상들도 많이 위치해 있다.

" 어디보자, 일단 저녁거리는 마련했고. 또 뭐가 필요하려나- "

그리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걸음으로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도로의 끝, 그리고 [ 서쪽 메인스트리트 ] 로 이어지는 길목이 눈에 들어왔다.

" 어쩔까. 이대로 돌아가도 나쁘진 않겠지만. "

서린과 그의 여신님이 머물고 있는 '파밀리아 홈'은 서쪽 구역에 위치해 있다. 그리 큰 규모라고는 할 수 없고 단칸방에 가까운 허름한 집이긴 해도, 이 세계, 미궁도시 오라리오에 도착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 서린이 갖은 고생을 한 끝에 당당히 마련한 집이다.

" 밑바닥 경험이라면 넘칠 만큼 쌓아왔으니 말이지. 생활력이라면 자신있다고. "

누구에게랄 것 없이 중얼거리며,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내딛는 서린. 한동안 머리를 굴렸지만 별다른 볼일이랄 것은 떠오르지 않아서, 막 해가 질 무렵이라는 조금 아쉬운 시간이지만 '홈'으로 직행하기로 결정했다.

" 다녀왔습니다- 흠? "

모처럼 엄한 데 싸돌아다니지 않고 곧바로 돌아왔건만, 정작 집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어야 할 여신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예상 밖의 상황에 잠시 그대로 멈춰 서서 머리를 긁적이던 서린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 또 길이라도 잃어버린 거려나... "

또,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대로 방치해 뒀다간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스스로는 못 돌아온다는 것을 아는지라, 서린은 그저 허리춤에 찬 저녁 찬거리만을 끌러 방 안으로 던져놓고는 몸을 돌렸다.

" 후우- "

'여신님'의 생활 반경이라고 해 봤자 그리 넓지 않다. 기껏해야 서쪽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 정도. 그중에서도 메인스트리트 구석에 쭈그려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평소의 패턴이었다.

" 밤공기 맞으면 감기 걸릴지도 모르는데. "

사실 웃기는 소리다. 하계의 존재도 아닌 여신이 감기 같은 질병에 걸릴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 여신님의 행동을 보고 있자면 보는 사람이 다 불안불안한, 그런 느낌이 적지 않게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 내가 아까 걸어온 쪽에 있었다면 도중에 마주쳤을 테고. "

신들 특유의 존재감은 차치하고서라도 눈에 띄는 모습이다. 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예전에 여신님이 있던 장소 등은 한 번씩이라도 눈길을 주는 편이므로 서린의 귀갓길 방향에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 그러면, 대충 그 쪽이려나. "

서린이 지나치지 않은 쪽에 있으며 동시에 사람이 많이 몰릴 만한 장소라고 하면 몇 군데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 풍요의 여주인. 오늘은 북적북적하구만. "

주점이라는 특성상 낮보다는 날이 어두워지는 지금 시간대에 더욱 사람이 몰린다.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여신님이 있을 곳으로는 제격이겠지. 물론 가게 안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편이 좋다. 그런 평범한 행동이 가능한 사람이었다면 서린이 이 고생을 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 드나드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고, 덧붙여 주점 안의 풍경까지도 엿볼 수 있는 장소... 저기군. "

주점의 맞은편, 꽤 커다랗게 자라난 가로수의 굵은 가지 위에 걸터앉은 소녀의 모습을 발견한 서린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다가서는 동안에도 소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지 않음을 확인한 서린이 나무 밑둥을 똑똑, 두드렸다.

" 여신님? "

힐끗, 그제야 겨우 시선이 마주쳤다. 어두워진 시간임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눈에 띄는 매끄러운 흑발이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어딘가 멍해 보이는 눈동자는 보는 이를 홀릴 듯한 붉은색. 창백한 빛의 피부색 탓에 섬짓하다 느낄 법도 하건만, 서린의 눈에는 그저 매혹적인 자태일 뿐이다.

" 여신님. 가요. 감기 걸려. "
" ...... "

다시금 재촉했지만 여신님은 묵묵부답. 대답은커녕, 기껏 마주봤던 시선마저 도로 들어올려 오가는 사람들을 향했다.

" 뭐예요. 왜 또 삐져 있어. "

묻고는 있지만, 이 여신님이 이러는 이유쯤을 모를 서린은 아니다. 그럼에도 괜히 장난을 걸고 싶은 마음에 짐짓 모르는 체를 해 보지만 여신님의 고집도 장난은 아니다. 아마 원하는 바를 이뤄 주기 전에는 몇 시간이고 저 자세 그대로 앉아 있겠지.

" 엇차. "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에 오르는 서린. 여신님의 곁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 거나하게 취한 모험가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면 어딘가에선 고성과 주먹이 오가는 소리도 들려오긴 하지만, 결국 이런 것들이 사람 사는 활기라는 거겠지. 평소에는 이런 게 뭐가 좋냐며 툴툴대는 서린이지만, 그로서도 아예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낭만, 이라고 해둘까.

턱, 하고 어깨에 얹히는 무게감에 고개를 돌려 보니 여신님의 머리가 기울여져 있었다. 딱히 잠이 든 건 아니고 그저 머리를 기대고 싶었을 뿐인 모양이었다.

" ...... "

기본적으로 여신님은 단 한 가지 의류만을 몸에 걸친다. 적어도 서린은 여신님과 만난 이래로 이것 이외에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 검은색 유카타... '

단순히 검은색, 이라기에는 붉고 푸른 무늬들로 장식이 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인상을 말하라면 역시 검은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지. 어쨌거나 당장 중요한 건 유카타의 색상이 아니다.

' 흘러내려서, 보일 것 같다... '

뭐가 흘러내려서 뭐가 보일 것 같은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겠지만 딱 한 가지. 유카타는 원래 안에 속옷을 입지 않은 채 걸치는 옷이고, 여신님은 그 설정을 충실히 지키는 중이다.

" 뭐, 그래봤자 애초에 내용물이 심하게 빈약하지만요... 윽, 아파요. "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불합리하게 꼬집혔다. 여전히 여신님의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기댔던 머리의 무게가 없어지고 이쪽에 등을 돌린 채 나 삐졌노라고 무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워진 서린은 여신님의 등을 뒤에서 껴안고 머리에 볼을 부볐다.

" 에그그, 우리 여신님. 삐지셨구나. "
" ...... "
" 말 안 할 거예요? "
" ...... "
" 그래요, 그럼. 아까 집에 고기 사다 뒀는데. 나 혼자 먹어야겠다. "

장난스런 음색과 함께 엇차, 하고 가지에서 뛰어내리는 서린. 그 찰나의 순간에 여신님의 입술이 아주 약간 달싹였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저 아래에서 손을 뻗어 받아줄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서린을 가만히 응시할 뿐.

" 아이 정말. 안 갈 거예요? "
" 이름... "

마찬가지로 달싹거리다시피하는 입술. 좀 전과 다른 점이라면 개미 목소리 수준이지만 서린의 귀에는 확실히 들릴 정도의 음성이 되어 나왔다는 점이다.

" 그래요. 내가 졌다. 그러니까 이제 가요, '데스'. "
" ...응! "

고집하고 있던 무표정을 지우고, 기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린을 덮치듯이 뛰어내린다. 150이 채 될까말까 하는 작은 몸집을 가볍게 받아내는 서린. 아이 같은 고집이지만, 이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발쯤은 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 얼마나 있었어요? "
" 오래 안 있었어. 세 시간쯤... "
" 그러면 오늘 하루종일 심심했겠네. "
" 으응, 저번에 가져다 준 책 읽으면서 놀았어. "
" 그랬어요? 착하다. "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자 에헤헤 웃음짓는 데스.

" 오늘은 누굴 보려고 온 거예요? "
" 아직 저 안에 있어. 그치만 곧 나올 거야. "
" 그러면 잠깐만 더 있어 볼까요. "

그렇다고는 해도 이미 나무에서는 내려왔다. 말없이 두 손을 내뻗는 데스의 모습에 피식 웃음지은 서린이 데스를 어깨 위로 올려 목말을 태웠다.

" 힘들어? "
" 전혀요. 얼마나 걸려요? "
" 이제 정말로 조금. "

데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요의 여주인'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당황한 듯한 외침과 함께 한 마리 토끼- 아니, 소년이 뛰쳐나왔다.

" 저 애예요? "
" 응. 예뻐. "
" 흐음... 약해 보이는데. "
" 약하기로 따지면 서린도 약해. "
" 그렇기야 한데- "

모험자로서 서린의 레벨은 1. 미궁도시에 온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수치이긴 했다. 어쨌거나 그의 밑에 있는 모험자는 없는 셈이니 누굴 보고 약하다, 라고 평가할 입장이 아니기는 했다.

' 그렇다곤 해도 평소에는 좀 더 강해 보이는 녀석들이었는데. '

오늘의 저 소년과 달리 한눈에 봐서 납득할 수 있는 인상인 것은 확실했다. 굳이 검희나 용자 같은 유명인들은 제외하더라도, 그동안 그의 여신님이 지켜봐 온 인물들은 나름대로의 잠재성이 느껴지는 자들이었다.

" 뭐, 데스가 틀릴 리는 없죠. 기회가 되면 접근해 볼까요. "
" 응, 만나보고 싶어. "

반대로 말하면 아직 이름이 없는 애송이다. 지금까지는 상대가 대부분 거물인 탓에, 자신이 바라본 영혼의 빛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하는 데스의 소망을 이룰 기회가 없었지만 저 소년이라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을 터.

" 어서 가죠. 누구 덕분에 오늘치 스테이터스 갱신도 아직 못 받았어요. 배도 고프고. "
" 고기 사왔어? "
" 데스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로 두 덩이. "
" 와아. "

맑고도 순수한 웃음. 지금의 서린을 지탱해주고 있는 건, 이 조그마하고 여린 죽음의 여신님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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