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종착점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터미너스 시티. 예전에는 뭔가 좀더 낭만적인 이름으로 불린 적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이 이름으로 충분하죠.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들어오거나 여기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저마다 내면의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되니까요.

이전에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때는, 메가코프들의 연구단지와 휴양지가 같이 들어선 이상하고 재밌는 도시였죠. 연구단지가 위치해 있으면서도 빼어난 자연경관이 깨끗하게 보존되고 있는 터미너스의 해안선은 미국의 앞에 환하게 펼쳐진 미래를 축약해놓은 것만 같았어요.

물론, 그래요, 터미너스 시티의 해안은 여전히 아름답고, 연구단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제 일을 하고 있어요. 그저 그 전쟁들 이후로, 이 땅의 실질적 통치자가 연방 정부에서 메가코프들로 바뀐 이후로는...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선 이후로는... 광전자 폭격의 영향으로 미세하게 바뀐 대기 조성이 빚어내는 보라색의 하늘 아래에서는, 더 이상 예전처럼 내일을 명확하고 낙관적으로 내다볼 수 없게 되었을 뿐이죠.

그러나 여전히 터미너스 시티를 원하는 이들은 많아요. 전쟁의 영향을 거의 빗겨간 덕에, 그나마 전쟁 전에 가깝게 살 수 있는 도시는 저 멀리 나이트 시티와 이 터미너스 시티를 빼면 정말로 드무니까요. 두 정부와 메가코프들의 협약으로 인해, 신연방 정부의 헌법과 자유주 연맹의 연맹법 둘 중 어디에도 영향받지 않는 만큼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하고, 이 어지간한 카운티만한 도시에는 그만큼 일감도 즐길 거리도 넘쳐나지요. 하지만 주의하세요, 다른 곳보다 더 다양한 일들을 겪을 수 있다는 말은 당신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엿을 먹을 수도 있다는 뜻이죠.

그럼에도 결국, 행운은 과감한 사람에게 미소짓는 법. 그리고 더 이상 물러설 이유가 없는 사람보다 과감한 이는 없는 법이죠.

당신의 종착점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 나레이터

또야. 또 그 꿈이구나.
어둠 속에서, 흐릿한 빛이 명멸한다. 그 빛 아래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그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다. 아니, 끈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무너져 있다. 앉은 이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이제는 그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도 그 아이가 반응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제 더 이상 온기가 없는 손으로 그녀는 계속 그 작은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헤이란은, 예전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한 채로, 양손에 피칠갑을 한 채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뺨과 코를 가로지르는 상처가 얼굴에 남은 채로 하염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결국에는 떠나가는구나."

앉아있는 소녀가, 무릎에 누운 이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속삭인다. 말간 목소리였다. 색깔이 무너져내린, 그래서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목소리였다.

"모두 잃더라도 너만은 있어줬으면 했는데. 너만 있으면 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헤이란은 움직여보려 했다. 손을 뻗고 싶었다. 소중한 내 동생. 붙잡아야 했다. 세 사람은 분명히 어떤 바닥 위에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헤이란은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아직 내가 네 옆에 있어.
말하려 했으나, 목구멍이 잠기기라도 한 듯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다가가려 했으나, 발이 땅에 녹아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소녀의 손길은 점점 느려진다. 품에 안긴 가녀리고 작은 것의 머리카락을 헝크러뜨리며, 그녀는.멈추지 않고 속삭였다.

"이제 이 보라색 하늘을, 기나긴 어둠을 헤쳐나갈 이유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어. 이제 그래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녀의 목소리가 비탄어린 저주처럼 흐릿하게 울려퍼져, 헤이란의 가슴에 가시투성이 나뭇가지가 되어 꽂혔다.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색채 잃은, 무한히 공허한, 어떤 빛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 그 눈이 헤이란을 가만히 주시해온다. "너?" 그녀의 입꼬리는 부드럽게 올라가 있었으나, 그 미소는 차갑게 갈라진 유리 같았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몇 번이고 막으려고 했던, 몇 번이고 붙잡으려고 했던,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소용없었던 공허한 붕괴가 언어의 형태로 헤이란을 덮쳐내린다. 그녀의 품에 안긴 그림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고장난 인형처럼 기괴한 손짓.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그림자가 찢겨져 어둠에 삼켜졌다.

빛은 점차 흐릿해졌다. 여인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공간은 차가운 정적만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넌 늦었어. 언제나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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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헤이란은 깨어났다. 마치 시체가 눈을 뜨듯이, 누운 자세에서 눈만 번쩍, 하고 떠진다.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축축한 감각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현실은 여전히 악몽의 흔적을 떨쳐내지 못한 듯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문득 이대로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모든 게 정지해버린다면.

그러나 겨우 사람 한 명이 이런 생각을 한다고 그렇게 쉬이 바뀔 세상이 아니다. 연차 내고 밤을 새서 온 사방을 쏘다니다가 새벽에서야 겨우 잠든 몸이, 뒤늦은 저녁에 깨어나 무거울 뿐이다. 헤이란은 머리맡의 탁자 위에 놓인 물컵을 더듬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다시 숨을 고르고,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기가 냉랭하게 눅눅했다. 환기가 필요했다.

멍하니 앉아 있던 헤이란은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고 위스키 병을 꺼냈다. 얼음, 얼음, 얼음, 얼음, 위스키, 레몬즙 약간, 탄산수. 문득 자신에게 이 술이 정말로 도움이 될지, 아니면 그냥 비루한 습관의 발악인지 생각해보려 했으나 이내 그도 귀찮아졌다.

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알싸한 위스키의 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묘하게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이러나저러나 없느느것보단 낫다. 그녀는 조용히 담배를 챙기고 술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섰다.

터미너스의 저녁바람은 제법 쌀쌀하고 건조하다. 일교차가 꽤 있는 동네다. 헤이란은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한 손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아래쪽 거리의 불빛은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언제나의 터미너스였다. 그녀 따위, 그녀가 겪은 일 따위 아랑곳없는 이 수많은 야경을 이루는 광채 하나, 그림자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항하의 모래알이었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이두크 스트레이트. 허무하게 올라가는 독성 연기를 바라보며, 어딘가 부서진 자신이 그 연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한낱 얄팍하고 창백한 연기만큼이나 무의미했다.

그때 옆 테라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우거지상을 한 채로 손에 토스트를 쥐고 나오는 소녀가 보였다. 새 이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너무 삽시간에 일어났다.

머리에 깃털을 묻힌 채로 어처구니없다는 듯 망연자실해 불청객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는 타샤의 모습을 헤이란은 잠깐 빤히 바라봤다. 손에 불붙은 담배를 든 채로, 그 때 타샤와 헤이란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입이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푸하하...!" 그림과도 같은 한 폭의 자연산 슬랩스틱 개그에, 채 정제하지 못한 웃음소리가 헤이란의 입을 비집고 한 호흡 쏟아졌다. 한번 터진 웃음보가 쉽게 멈추지 않아, 헤이란은 아예 허리를 꼬부리고 크히히히, 하고 튀어나오려는 웃음소리를 끅끅대며 힘들게 집어삼켰다. 악몽을 꾼 직후에 느낄 거라곤 생각지 못한, 뜻밖의 가벼운 해방감. 헤이란은 몇 호흡을 더 씨근거리고 나서야 간신히 웃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아가씨..."

하고 말을 붙이던 헤이란의 눈에, 무언가 보이는 게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타샤의 몰골이 엉망진창인 게 헤이란의 눈에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모처럼 머금은 웃음기가 페이드아웃되며 사라진다.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헤이란은, 손에 들려있던 꽁초를 다시 입술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