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정말이지 시라기 씨도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는 능력이 있으신 건가요...... "
어떻게 말하든 이야기가 '아무튼 청혼을 한 건 맞다' 로 돌아가고 있는지라, 미즈호는 양 손으로 얼굴을 꼬옥 가린 것을 풀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볶음면을 더 담아주는 것을 얌전히 받아들다, 어딘가 정곡을 찔린 듯 아주 잠깐, 낯빛이 창백해지려 하였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그렇지요?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다 사실대로 말해야 겠지요....... "
분명, 사실대로 말하면 실망할 것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생각하며 멋쩍게 뺨을 긁으며 마저 볶음면을 오물거리다, 이런 말을 툭 내던진다.
사실 모자에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쓰고 싶다는 충동이 지금도 마구 치솟는다. 마음 같아선 잔뜩 암거래를 하는 사람 같은 복장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지난날의 경험―데이트 훼방 편―으로 깨달은 바, 사람이 너무 싸매면 오히려 수상해 보인다는 걸 알게 되어서 말이다. 캡 모자에 단색 티셔츠, 반바지의 비교적 평범한 차림을 했다는 점에서 사미다레가 지금 평범해 보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자꾸만 불안스럽게 서성거리고 있으니 눈에 띈다. 은신 실력은 영 글렀나 보다.
"……흐앗!"
아니나다를까 척 보고 간파당했지 않은가! 뒤에서 말이 걸려오자 사미다레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거기에는 묵직한 상자를 든 갈색 머리 우마무스메가.
"……아. 네에, 캐럿……이신가요?"
용건이 무엇일지는 척 보아도 예상이 가기에 그렇게 물었다. 어라. 그런데 이 사람, 왠지 낯이 익은 것 같다.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고, 어디에서 본 듯한 기분이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상대를 응시하고 있으려니, 문득 어느 순간의 기억이 스친다. 봄의 이와시캔. 레이스의 시작과 동시 누구보다도 빠르게 앞서 달렸던 우마무스메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다.
"저…… 혹시, 스트라토 씨……인가요?"
같은 레이스에 출주했던 우마무스메의 이름 정도는 그 당시에 외워 두었다. 경기에 임하기 전 출주하는 상대들의 정보는 필수이기도 하고, 달리는 동안에도 가장 앞서 달리는 우마무스메의 이름은 내내 호명되기 마련이니까. 도주로 달렸던 스트라토의 이름만큼은 시간이 지났다 해도 기억에 꽤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거 문제가 될 리가 없잖아! 400m 트랙 5바퀴를 메이사가 시속 65km로 달리고 내가 시속 40km로 주행하면 우리가 마주치는 횟수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답은나도몰라,자출발."
기습적으로 부는 호루라기와 초등학교 수준의 수학문제의 조합으로 먼저 정신을 빼놓기로 한다. 그래, 나는 지금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 3만엔, 마사바의 참치 할부를 겨우 갚아낸 나로서는 이거 상당히 거금이기 때문에! 난 우마무스메를 상대로 진심페달밟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3만엔을 뭘로 아는 거냐!
팍팍팍 페달질을 하며 빠른 출발(반칙)한 나는 일단 물총부터 메이사의 얼굴에 갈겼다.
"허~접❤️"
나를 역전한 메이사가 앞서나가고, 나도 부지런히 따라가며 확성기로 그 시끄러운, 마츠리에서 나에게 "힘내쇼" 했던 녀석의 대사를 전력으로 외친다.
"체스토오오오오오오오―――――――――!!!!!!!!!!"
또 마주쳤을 때 물총, 뒤에서도 물총, 확성기로 "허접❤️ 그거밖에 못달리고❤️"라고 오스가키짓을 하는 등.
나는 3만엔을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래. 아니 사실 지금와서 말하자면, 3만엔 정도고. 아니, 음. 1만엔 정도는 져도 준다고 말할 걸 그랬나. 내가 너무 쩨쩨했나. 싶고.
...그래, 나의 똥꼬쇼 덕에 메이사는 실패했다..................... 난............... 좀 쓰레기? 일지도...........
야 이거 반칙 아니야?! 이런 기습출발이 어딨어! 너 레이스 안 봤지!!! 갑작스러운 호루라기 소리에 놀랄 틈도 없이 트레이닝이 시작됐다. 허겁지겁 늦출발 하자마자 얼굴에 물 세례가 날아온다.
"으햣!? 힉, 아니 잠, 깐— 뒤진다 진짜!!!!!!!"
한 손으로 땀과 함께 물을 닦아내며 추월한다. 근데 추월하면 하는대로 뒤에서 시끄럽게 군다. 거기에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이 압박감...은 사실 같은 우마무스메, 하다못해 우마그린과 병주 할 때보단 덜하긴 한데... 그래도 요즘 이래저래 스트레스 쌓인게 있어서 그런가, 더 참기 힘들고... 그래서 살짝 실속해서 뒤로 가면 또 물총세례가 날아오고. 추월해서 앞으로 가면 또 뒤에서도 날아와서 축축하고, 이제 땀인지 물인지 뭔지도 모르는걸로 온몸이 축축하고, 그 와중에 허접소리가 들려서 더 빡치고...
"......"
자전거보다 한 발 늦게 결승선에 들어선 나는 아마, 하얗게 완전연소된 상태로 보이지 않았을까. 체력이 연소된 건 아니다. 연소된 건... 정신이랄까.... 마음이야.... 축축한 머리에 타올이 덮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런 상냥한 점은 또 어른스럽다니까.
-허접...
—전언철회다. 이 애벌레 자식아!!!!!!!!
"...야 애벌레.... 한번 더 뛴다. 지금 당장."
이를 꽉 물고 그렇게 말한 후, 다시 출발선으로 가서 선다. 아? 자전거를 너무 타서 허벅지가 터질거 같다는 말은 하지도 마. 네가 선택한 트레이닝 방식이야. 악으로 깡으로 버텨 이 애벌레야.
그래, 나는 방금 전의 레이스로 기진맥진이었다. 운동이랑 담 쌓았다가 우마무스메를 따라잡을 기세로 달리다보니 허벅지는 터질 거 같고 장딴지는 욱신거리고 무릎은... 솔직히 약간 힘든데. 지금 내 몰골은 땀에 젖어 조그만 폐활량으로 헉헉거리는 한심한 아저씨다.
"헉, 헉, 아니, 근데, 헉, 당장. 당장은좀무리"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드레날린이 팍팍 돌고있는 메이사를 보니 어쩐지 쫄려서, 이거 잘못하면 멱살잡히겠다 싶어서 조용히 나는... 출발선에 자전거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나의 한심한 체력과, 물이 거의 떨어진 물총과 무릎 이슈로. 메이사의 기록은 1초 전후로 평소와 가까웠다. 하하... 나 이정도면 꽤 훈련 잘 시킨 거 아닐까. 헤헤, 나 이거 구상하는데 좀 힘들었는데... 칭찬받아도 되지 않나. 그런 뿌듯함도 순간이었다. 메이사의 뒷모습, 저 살랑거리는 빨간 리본이 두려워 나는 일단 잠깐...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저 나무 뒤에 숨겨뒀던 물건을 꺼내온다. 조카가 한 번 쓰고 안 썼던 대형물총. 수압은 새로 산 샤워기를 방불케하며 나에게 쐈다간 그대로 절명일 것이 확실한 것.
그렇구나. 대신 거래하러 나왔구나. 그렇다면 팔러 나온 물건이 어떤 건지 모를 테니까 괜찮…… '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스트라토의 입에서 시리즈의 제목이 나왔다. 그것도 매우 또렷한 발음으로. 주, 죽을래……. ……아니. 희망을 갖자, 사미다레! 정확히 무슨 책인지 모를 수도 있잖아! 사미다레는 수치의 용광로에 뛰어들려던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말했다.
"네, 넷. 사, 사러 나온 거, 맞아요……."
이렇게 된 이상 제 발 저려서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만이 사회적 위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미다레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자 했다. 얼굴이 조금 붉어진 건 여름이라서, 더워서 그런 거다. 아마도.
"앗, 아뇨……. 이, 이미 아시는 것 같으니까, 그럴 필요는…… 없겠네요. 사미다레 스와브입니다……."
콜사인? 갑작스러운 용어에 조금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맥락 상 이름을 말하는 뜻이리라 이해했다. 어차피 같은 레이스에 출주했고 얼굴도 안다. 숨길 필요부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인데 뭐어……. 잠깐, 이러면 정체를 들켜 버렸다는 거잖아! 글렀다! 역시 죽을래……! 그런 내적인 번뇌에 시달리며 자결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내느라 바쁘다. 당장이라도 도망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몸이 다소 부들부들 떨린다……. 조금 진정이 되어서야 대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작했을 때, 앞서가는 모습이 멋졌거든요……. 그래서, 기억할 수밖에 없었어요."
모두가 도주하는 상대를 내내 주시하며, 붙잡고, 추월해서, 앞서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달린다. 그 관심은 비록 응원하는 팬의 마음과는 달랐을지라도, 스트라토는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열렬한 시선―열망에 찬 집념―을 고스란히 받아낸 우마무스메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