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 여전한 햇살에 눈을 찡그리게 된 것도 잠시, 저 멀리 누군가의 인형이 어렴풋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인형의 체형과 체격을 가늠해보건대 우마무스메는 아니고 그렇다면 트레이너 중 한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그가 사전에 수집한 정보 내에서 저런 체격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기에 적당히 유추할 수 있었다.
분명 이름이, 시라기 다이고라고 했나.
물론 그로서 별로 엮이고픈 생각은 없었으니 적당히 무시하고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지나가야 할 길목 방향에 위치해있었으니까. 이 순간 그는 처음으로 이 학원 시설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길 좀 넓게 만들 것이지.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건 특히나 비효율적이고 피곤한 일이었기에 결국 그는 그 방향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상대가 말을 걸어오면 웃고 지나치면 될 일이다. 만약 말이 없다면 그것만큼 좋은 결과도 없겠지.
메이사는 인싸무스메+토박이 버프로 축제위원회 어르신들하고도 안면있어서 노점상쪽에서 길 잃으면 노점 아조씨들이 '메이쨩 길 잃었니~ 축제는 누구랑 온거야~ 혹시 남ㅊ(까지 말하고 발로 차임)'하기도 하고 까까주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자리도 내주지 않?을까???요?
근데 불꽃놀이 명당있다고 자기가 먼저 이끌고 으슥한 길로 슈슈슉가다가 일행도 놓치고 길도 잃으면 순식간에 쫄아서 하와와 아와와하다가 풀숲 부스럭대는 소리에도 놀라고 어두운데 혼자있어서 너무 무섭고 그래서 훌쩍훌쩍 울면서 결국 명당도 못가고 혼자 울창한 나무 사이로 환한 불꽃터질때 간신히 길찾아서 집으로 도망칠듯.
>>243 그가 길목을 막고 서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건 바로 저만치 계단 아래에 떨어진 목발이 설명해 주고 있었다! 계단을 지나치다가 손이 미끄러져 목발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잘못하면 본인이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목발 없이 계단을 내려가려면 깽깽이를 해야 하고, 그러다가 실수로 넘어지기라도 하면 이번엔 진짜 입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곤란하구만~."
하필이면 아침 시간대였기 때문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다, 어쩔 수 없이 주저앉아서 한칸씩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사실 다가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려고 한 거겠지만)
"안녕하심까-"
이런 상황이 아니었어도 인사는 했겠지만, 지금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분명히 말을 걸지 않으면 지나칠 그 사람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건네 본다.
"아침부터 수고 많으심다, 그러니까..."
그런데 얼굴이 낯설었기 때문에, 이름도 딱히 떠오르지 않아(떠오르지 않는 게 정상이다)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다이고는 일단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용건부터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오늘은 이와시캔이 개최되는 날. 클래식 시즌의 첫 대상경주, 그리고 사카나 삼관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이번 레이스에서 1착을 거머쥐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하는 것. 점심시간, 교내는 꽤 한산했다. 다들 이번 레이스를 대비하고 있는 거겠지. 대강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온 코우는, 주변 벤치에 자리잡고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훈련 성과나 기록 등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실전에 앞서 그녀들에게 조언해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말을 걸어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걸었나. 그는 상대방의 인사에 가볍게 미소를 짓고 묵례하며 지나쳐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덧붙이는 말에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자 직감적으로 뭔가 부탁이 있겠구나 싶어졌다.
'초면에 죄송한데 좀 도와주시겠슴까? 목발이 저 밑에 떨어져서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그가 시선을 돌려 계단 아래를 바라보자 확실히 목발의 형체를 한 무언가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여긴 어차피 지나가야 하는 길이고 부탁이 목발을 주워달라는 것뿐이면 빠르게 들어주고 마저 지나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겠지.
그는 눈앞의 상대와 저 밑의 목발을 한번 번갈아 보고 아무 말 없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가볍게 목발을 주워들고 순식간에 계단의 중간까지 올라가 상대에게 목발을 건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을 마치고 살짝 눈웃음 지었다. 다른 사람과 교류는 없이 지낼 예정이지만 그럼에도 굳이 관계를 악화시킬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276 클래식 시즌. 그리고 첫 대상경주. 레이니・왈츠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야기. 그래도, 떠들석하던 교내의 분위기가, 레이스 직전의 긴장감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는 것 만큼은 정말로 마음에 들어서, 그녀는 카페테리아에서 새우튀김을 마음껏 해치우며 간만에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우와, 타이라보다 말수 적은 사람..."
카페테리아 밖의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놀랐다는게 문제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생소한 외모다. 새하얀 머리에 단아한 얼굴. 잘 생겼구나- 싶은 청년. 나이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30대라기에는 깔끔한 느낌이 강하고, 그렇다고 마냥 어리다고 보기에는 진중함 같은 게 보여서 대충 20대 중반쯤 되겠거니 하고 생각해볼 뿐이다.
"아이고 감사함다, 갑작스러운 부탁인데..."
갑작스럽게 마주친 초면의 사람에게서 부탁받은 것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곧바로 계단을 내려가는가 싶더니 빠르게 목발을 가져다 주는 사람. 사실 가타부타 말이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행동만으로는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없긴 했지만 친절을 베푼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목발을 받아들며 읏어 본다.
"어디 가시는 길임까? 커피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은데."
처음 보는 외모의 소유자를 마주하자니 호기심이 동한다, 친절하기도 하고 사례도 하고 싶고... 조금 말도 텄으면 좋겠고, 어째서인지 반응이 표정 외에는 없어 미적지근한 느낌도 들고. 묘하게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피어오르기도 해서, 계단을 다시 올라오는 게 아니라 중간에 서서 건넸다는 건 아마 계단을 내려가려는 생각이겠거니 하고 얼른 목적지가 어딘지 한 번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