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잔인하다." .. 가볍게 대해달란 말이 거리를 두자는 말은 아니라고 얘기했는데. 가식적으로 대해 달라는 말이 아니었는데. 앞으로도 쭉 가벼운 관계로 지내자는 말이 아니라, 지금은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예민하니까. 매번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되니까, 깊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는데.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까지 코앞에서 들으면서도 가슴이 따끔따끔한 걸 참고 또 참고 있었는데. .. 라임은 느리게 테이블에 엎드려 한쪽 팔에 얼굴을 묻고, 성가시다는 듯이 담배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시윤에게 뒤를 보였다. .. "그런 건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라고.." .. 그가 하는 얘기는 매번 결국 '좋아한다' '귀엽다' 하는 말로 이어진다. 연애할 마음도 없으면서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계속 좋아해 달라고 말할 수 있어? 그리고 눈앞에서 대놓고 이제부터 너 안 좋아할 거야 하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어차피 연애라는 걸 할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으니까, 그냥 그런 걸 바라는 척하고 넘어가는 게, 그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고 마음을 구걸하는 것보다는 덜 비참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그가 좋아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 .. 그래도. 방에서 나가라는 말은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테이블 위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의 등을 본다. 원망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마치, 지난번 토끼굴에서 고개에 얼굴을 파묻고 떨던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서, 천천히 걷는다. 문을 눈 앞에 두고 선다.
여기서 잡고 나가면, 끝난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무언가 끝난다. 그것은 어쩌면 어른스러운 결말일지 모른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 작은 상처일지도.
그러나 그러면, 등 뒤의 작은 토끼 소녀는 당장 어떻게 될까. 계속 저러고 있을까. 아니면, 울까? 엘터 선생에게 당당하게 말한 어른스러운 삶의 태도란게, 상대를 상처주고 울리는거냐.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서 관계의 종말을 맞이하는게, 정말 네가 바라는 본심이냐. 가식이 그렇게도 싫은, 너의 솔직하디 솔직한 마음이란 말이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녀는 끝까지, 나가라고는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정말 나가길 바란다면, 단호히 말하는 성격임을 안다.
......
"아아, 진짜!!"
머리를 한번 난폭하게 헝클이곤, 몸을 돌린다. 쿵쿵 발걸음 소리가 나게 걷는다. 그리곤 그녀의 옆에 털썩 앉고, 테이블 위에 파묻은 머리를 마구 쓰다듬는다. 화가난듯한 말투와 행동거지에 비해서,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가볍게 대한다는게 솔직히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바라는대로 맞춰 주는게 낫겠다. 눈 앞에서 슬퍼하는 소녀를 무시하고 등 돌리는게 어른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관계니, 이성이니, 이유니, 다 집어치우자, 네가 그렇게 가슴 아파하는건 못 보겠다! 내가 졌다! 네가 원하는대로 하자, 그게 지금 이 꼴 보단 분명 나을테니까!"
몬스터들이 크르륵대는 소리가 울린다. 몬스터들도 머리가 있다면 지금 우리들이 어느 정도의 전력차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슬슬 발을 빼는 녀석들도 있지만. 그 전에 신속이나 영성으로 인해 지한과 알렌은 몬스터 무리를 거의 학살하다시피 했다. 구체적으로는 검으로 베어내거나 창으로 찌르거나. 혹은 섬광탄같은 아이템까지 사용해가면서.
"의뢰를... 크게 가리지는 않으니까요." 아무래도 지한은 미묘하게 빚을 지고 있는 입장인 만큼 그렇게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을 거지만. 크게 가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연막을 치는 지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몬스터의 몸과 머리가 분리될 때. 상황은 급변합니다.
"저건.. 뭐죠...?" 미묘하게 그림자같은 무언가가 몬스터들의 베인 부분에서 꿀러꺼리며 나오는데. 그것이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헌터 네트워크 나노칩이 경고음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게이트의 붕괴가 가속화되고, 파장이 좀 불안정하다는 뜻일까요? 그리고 그 그림자같은 몬스터...는 녹아내려 안개처럼 주위를 감쌉니다.
"알렌 씨" 침착합시다. 라고 말하는 지한이지만. 시커먼 안개로 시야의 확보가 어렵고. 설상가상 소리마저도 점점 무뎌지는 느낌입니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될지...
안타깝게도 지한과 알렌 둘 다 실체없는 적을 상대하기가 애매한 편이기는 합니다. 다행인 것은 지한과 알렌의 스펙보다는 확실히 떨어지는 편이라 지한과 알렌의 공격에 묘하게 바르작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제압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보이던 찰나.
"읏!" 지한과 알렌은 둘 다 두통을 느낄 겁니다. 알렌보다 지한이 더 세게 부담을 느꼈는지. 잠깐 창격이 멈춥니다. 무언가 먹먹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기분이 드는 느낌에 지한은 잠깐 저 그림자 형상으로부터 멀어지려 합니다. 하지만 주위는 이미 그 녀석의 그림자가 꽤 잠식하고 있던 터라. 큰 의미는 없었겠지만요.
설상가상으로 그림자의 공격 또한 정교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림자에 쑥 빠져서 환상에 빠져들기라도 하면? 그러한 겅포가 슬쩍 한구석에 가라앉아있을수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