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내가 지금 불타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깊이 사랑할 순 없지 않았을까? 죽을 것만 같은 꿈결에 이토록 사랑받는 느낌이 들고있었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보통 이런 말 들으면 날 죽이고 싶어하던데~" 라며, 제롬은 능청을 부렸다. 방금과 같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두가지 반응으로 나뉘었다. 날 죽이고 내 것을 빼앗고 싶어하거나, 아니면 무슨 소리냐며 기겁하거나. 피피는 둘 다 아니었다. 피피의 눈은, 표정은, 분위기는 신기할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정말 곤충인 것 마냥.
"아하하, 빈 말은 안 해도 되는데~?"
이것은 진심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다가 피피가 향하는 곳을 본다. 젠장. 여기 근처가 집인데. 거짓이더라도 웃음을 짓던 피피와는 반대로, 제롬의 표정은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마치 뭔가를 들킬까 걱정하는 사람마냥 표정을 찌푸린채 주변을 수시로 두리번거렸다.
"어... 이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한참을 두리번거렸더니 어느새 피피의 집에 도착해있다. 제롬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했지. 내 집을 어떻게 알겠어? 그는 안심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중잠금까지 되어있는 문고리에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느껴진다. 자신의 집에 있는 것과 비슷했으니.
그나저나 소독을 최근에 한 걸까.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물론 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자면 이곳에서...
"좋아해~ 그보다 내겐 선택권이 없는 듯 한데~?"
이미 물을 끓이기 시작한 그를 향해 농담스레 말하고는 적당한 의자를 찾아 앉으려고 했다. 등받이에 등도 안 기댄 채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앉아 기다린다. 피피가 핫초코를 가져온다면, 정작 핫초코는 입에도 대지 않고선 피피를 보며 "그래서 용건이 뭐야?" 라고,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았을까.
뒤에선 코르셋 끈을 당기고 앞에선 스타킹을 올리고. 잠깐이지만 잡화점 안쪽은 아수라장이었다. 여인은 이 때를 근래 들어 가장 바쁘게 움직였던 거 같다고 회상하게 된다. 그리고 폭풍 전야 였다는 감상 역시.
여차저차 다 입고 서둘러 나왔지만 거긴 아무도 없었다. 방문객은 잡화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나보다. 그럼 여인이 들은 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던 걸까. 덕분에 거울을 보며 머리를 손볼 시간이 생겼다. 흐트러진 잔머리를 손으로 빗고 프릴이 달린 머리띠를 제대로 하고. 아주 잠깐은 이 모습으로 방문객을 받아도 될까 싶었지만 이미 기다리게 한 시간이 있는데 허투로 보내는 건 여인의 방침에 맞지 않았다. 그러니 옷도 마저 정돈하고 문 앞에 섰다. 흠흠. 작게 목을 가다듬은 뒤 문을 열었고, 미리 생각한 그 대사를 딱 꺼냈다.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그리고 정적.
일단 상황을 보자면 문 밖에 있던 건 제롬이었다. 알고 지낸지 5년여 된, 조직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연계가 있는 지인이었다. 손에 뭔가 들고 있는 제롬을 여인이 방금 인사를 한 얼굴 그대로 굳어서 빤히 응시했다. 그야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여인의 차림은 메이드였다. 통상의 메이드복이 아닌 꽤나 천을 아낀 듯한 디자인의 그것이었다. 대체 왜 이 꼬락서니를 하고 문을 열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여기서 문을 닫고 문전박대 하는 건 역시나 여인의 방침이 용납하지 않는다. 이 모든 건 잡화점 닫은 후가 아닌 도중에 옷을 갈아입은 여인의 업보인 것이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뮨을 열고 단 몇초만에 판단을 내린 여인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들어오셔서 용건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주인님♥"
가면을 쓰는 것 하나만큼은 일류 중의 일류인 여인이었으니. 조금 어색했던 인사와 달리 완벽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을 하며 제롬의 팔을 살짝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상황이 어찌 됐건 뭔가 용건이 있어서 왔을테니, 들어야 할 의무가 여인에게 있었다.
한동안 우리 둘뿐. 좋은 말이다. 단둘이라.. 에만은 말없이 턱을 괸다. 방해할 사람도 없고, 이 바에서 조용히 있을 수 있을 수 있다니. 흔치 않은 기회니 양껏 즐겨두는 것이 좋겠다. 이윽고 에만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구겨짐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엔 강아지가 혼이 나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듯 눈을 흘겼다. "평생 안 구겨지게 노력해야겠는걸.." 그리고 상상 속에서 마구잡이로 구겨지던 자신을 억누르고 그 개자식을 떠올린다. 구겨지는 모습을 대신 떠올리니 금세 섬찟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열두 번째 공상 속 살인이었다.
"나아, 안 아프니까.. 걱정 말구. 그렇게 부르면.. 아니다, 마음대로 불러. 어차피 아무도 없을 것 같고.."
에만은 가늘게 눈을 휘었다. 배시시 짓는 미소가 아이처럼 자못 순수했다. 어차피 트톡에서도 본인은 온갖 귀여운 척이란 다 하지 않던가. 요정님은 당근이 좋아, 따위의 말을 뱉을 정도의 깡이 있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끼였다. 그러고는 지하 투기장 얘기에 눈을 둥글게 떴다. 배틀리언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곳에 있던 것인지. 페로사에겐 또 나름의 사정이 있는 듯싶고 혹시라도 상처가 될까 부러 언급하지 않는다. 문득 머리를 빗겨주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 헨젤. 결국 나는 동물원 우리를 열게끔 일조했답니다. 그 안의 사랑스러운 동물들이 자연에 적응할지, 아니면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에만은 감히 당신에게 고하자면 무책임한 사람이지만 이해하지 않는 건 아니지. 당신이 빚은 결과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몰랐지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술김의 망상이었다.
"어울린다니 다행이네.. 으으, 조만간 안경점에..찾아가야겠어."
에만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도 안경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모발이 얇아 빛을 받으면 환하게 반짝이던 금발, 화면에 집중할 때면 동공이 좁아지던 올리브색 눈동자, 옅게 웃을 때마다 패이던 보조개. 에만은 아버지를 닮은 편이었다. 특히 웃을 때마다 깊게 우물처럼 패던 보조개가. 머리에 닿는 온기에 눈을 감기도 찰나였다. 에만은 안경이 벗겨지자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을 한 번 내리깔고 안경을 쳐다보다 눈을 들어 올린다. 마티니 글라스에 시선을 고정하던 에만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