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내가 지금 불타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깊이 사랑할 순 없지 않았을까? 죽을 것만 같은 꿈결에 이토록 사랑받는 느낌이 들고있었어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여인은 여느 때처럼 잡화점 한켠에 앉아 느긋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저녁을 넘긴 시간이라 오는 사람이 적은 이 때 만이 여인의 유일한 여가 시간이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밀린 책을 보는데 시간을 쓰기로 하여 팔걸이 대신 좌식 테이블과 의자를 꺼냈다. 그리고 책을 찾아와 언제 끼웠는지 모를 책갈피를 꺼내고 그 부분부터 페이지를 읽어내려가던 중이었다.
"ㄹ라... 벨라, 야!" "아. 깜짝야. 왜 그렇게 불러. 고막 찢어지게."
한 두세페이지 쯤 넘겼을까. 냅다 고막을 때리는 고함에 여인이 고개를 돌리자 미간을 잔뜩 찡그린 남성, 벨 포레가 보였다. 그는 한 손에 수트케이스를 들고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여인을 보고 있었다. 여인은 그의 얼굴을 한번, 수트케이스를 한번, 번갈아 보고 물었다.
"그건 왜 가져왔어?" "니,가,수,선,해,달,라,며!" "아?" "아? 너 지금 아? 라고 했냐?!"
딱 봐도 터지기 일보 직전인 반응의 그를 보고 여인은 조금 위기감을 느낀다. 이대로 두면 최소 사흘은 모든 식단에 베이크드 빈이 들어갈게 분명했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여인은 침착하게 책을 덮고 일어나 친애하는 동료이자 벗인 벨 포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엣에서 수트케이스를 받아들고 능청스럽게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아, 난 또. 이렇게 빨리 해줄 줄 몰라서 그랬지. 음. 고마워. 마침 갖다줬으니까 안에서 입어보고 올게. 그 잠깐만 여기 봐 줘. 괜찮지?" "알았으니까 가. 빨리."
그렇게 여인이 안쪽으로 들어가고 몇분 후, 여인 대신 자리를 지키던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벨 포레 역시 안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즉, 이 시점의 잡화점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여인과 그 모두 잠깐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 틈을 노린 상황은 일어나기 마련인지라. 한참 옷 갈아입느라 정신 없는 와중에 잡화점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여인의 목소리만이 방문객을 맞이했을 터였다.
"잠시만- 금방 나갈게-"
이 시간에 올 사람이야 생필품 사러 온 조직원 쯤 되겠지 싶어 평소처럼 말하고 벨 포레를 재촉했다. 좀 제대로 당겨 봐! 아 씨 가만히나 있던가! 그런 투닥거림이 작게 잡화점 쪽으로 새어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제가 소녀에게 준 것은 겨우 먹다 남긴 오렌지 주스다. 아마 소녀가 말하는 건 부상을 치료해주었던 것 때문이겠지만. 하기야 엘레나로서도 정체 모를 이를 데려와 치료비도 받지 않은 건 드문 일이긴 했다. 다 나은 환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꾸 찾아오는 건 더 드물었고. 소녀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마주보며 과자를 먹을 일도 없겠지.
"거봐요. 좋아하는 거 있잖아요. 그렇게 확실히 말하면 무라사키는 좋아하는 걸 먹을 수 있고, 나는 무라사키가 좋아하는 걸 알게 되니 둘 다 행복해졌네요."
소녀가 입에 담은 행복이란 단어를 그대로 끌어와 자기주장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단맛이 나는 음식을 떠올린다. 사탕, 초콜릿, 아이스크림. 평소 단맛을 찾지 않았다는 게 이렇게 티가 난다. 이번엔 제 몫의 과자를 집어 씹는다. 과자의 식감이며 맛을 평가하는 동안 소녀가 풀이 죽는다. 낯간지러운 상황이 되는 걸 모면하기 위해 건넨 말이 고민거리가 되었나 보다. 와중에도 입이 열심히 움직이는 걸 보면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하여튼 수습하는 건 먼제 화제를 꺼낸 사람의 몫이다.
"내가 부르면 병원에 와야 해요. 무라사키가 오기 싫을 때도 마음대로 부르려구요. 귀찮아도 어쩔 수 없죠."
알아서 오던 사람을 직접 초대하겠단 소리니 별반 다를 거 없는 말장난이다. 반지가 언급되자 자연히 소녀의 손가락으로 시선이 향한다.
'네가 한순간의 변덕으로 날 죽이려 하면, 나는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건 맞으니까.' 라니, 세상에. 보는 눈만 없었다면 지겹다는 듯 눈을 굴렸을지도 모른다. 쉽사리 죽어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를 해할 충동이 내재되어 있다는 증거임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억누른다. 억눌러야 한다. 네 안의 금수는 주제를 모르니 항상 목줄을 채워두어야 쓰겠다.
"빈 말 하기는, 발렌타인 씨가 훨씬 더 잘생겼어."
눈만 접어 웃어 거짓웃음 지었다. 발걸음 옮겨 제 작업장으로 향하려다가, 생각을 바꾼다. 말 그대로 '집'에 데려다 주어야 손님에 대한 예의겠다 싶다. 그래, 날도 추운데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해주어야지. 손 끝이 입꼬리를 매만졌다.
"누추한 집이지만, 그래도 꽤 아늑한 곳이야."
문고리를 잡아 열자 꽤 깨끗한 원룸이 드러났다. 기묘한 소독제 냄새가 맴돌고, 바닥에 칼자국 하나 덜렁 있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제롬을 안에 들이고 문을 닫았다. 이중잠금까지 하는 것이 퍽 꼼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