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내 안에서 끓어 오르는게 느껴져 난 네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방황하고 있어 내 껍데기 안에서 난 피를 흘리며 기다리지 그리고 곧 너도 그렇게 될 거야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무거나 라는 건 무섭다구요. 선택하지 않는 건 편하지만, 어떤 결과가 돌아올지 모르잖아요."
끔찍하게 섞인 음료를 상상했는지 표정에 훤히 드러나는 게 우습다. 두 사람 앞에 똑같이 놓인 멀쩡한 오렌지 주스를 마시자 새콤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페트병이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이유를 되새기며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그렇지만 가끔 찾아올 작은 손님을 위해서라면 갖춰둘 필요가 있겠다.
"오렌지 주스 말고 좋아하는 건 없어요? 음료수 말고 다른 거라도."
고작 음료수 하나에 나타나는 소녀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뭐라도 하나 더 챙겨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계속 주스만 내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혼자 생각한 것을 주기엔 소녀의 취향을 알지 못했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요. 그래도 다시 환자로 실려 오는 꼴 보고 싶진 않으니 조심해줘요."
걱정하지 말래도 결국 걱정 섞인 타박이 나와버렸다. 더 이어진다면 잔소리가 될 것 같아 종이봉투를 열어 접시 위에 부었다. 하나둘 쏟아져 나온 과자가 산을 이룬다. 가장 위에 있는 걸 집어 먹으려다 소녀에게 내밀었다. 사 온 이를 먼저 챙기는 것이 도리라는 사소한 예의를 챙길 수 있을 만큼 한가한 시간이었다.
"말로만?"
정작 돌려준 말은 예의와 거리가 멀었지만. 사실 감사에 대한 답례는 이미 받았다. 그녀가 무라사키를 치료한 것처럼 소녀도 위험에 빠진 병원을 멋지게 구했으니. 하지만 감사 인사를 주고받는단 행위는 상당히 낯간지러운 상황을 연출하게 되는지라.
에만이 던진 농담에 페로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여러 사람에게 운수가 없는 날이었다. 가게 앞에서 송장 13구를 치운 페로사는 말할 것도 없고, 뭔지도 모를 물건을 배달하다가 열두 명이나 되는 습격자에게 쫓겨 죽은 배달부에게도 운수 없는 날이었고, 배달부 하나 잡아죽이겠다고 가게에 피를 튀겼다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상대를 건드려 떼죽음을 당한 열두 명에게도 운수 없는 날이었다. 고기장사라. 생각해보니 그 시체들은 피피더러 가져가라고 해도 얼마 못 받겠네. 젠장.
그러나 페로사는 곧 불운은 액땜이라 치고,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는 목갑을 닫으면서 무심결에 에만은 더티 마티니를 좋아했었지- 하는 생각으로 랙에서 마티니 글래스를 꺼내서 조각얼음을 푹 퍼서 담았고, 그제서야 에만에게 주문을 뭘로 할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닫고는 에만에게 주문을 받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에만이 중요한 가면도 톡 벗어놓고 두 눈에 호기심을 초롱초롱 빛내며 애교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페로사는 얘가 왜 이래, 하는 듯이 눈을 치떴다.
"오늘따라 뭐야 요녀석, 깜찍하게 굴기는. 다른 데서 벌써 한 잔 마시고 왔냐? 블러디메리 찾는 거 보니 그런가 보네."
페로사는 손을 뻗어서 에만의 양빰을 가볍게 꼬옥 잡고 살짝 늘렸다가 놓고는 에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험난한 뉴 베르셰바에서도 충분히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여유인 것일까, 그녀는 딱히 힘의 우열 때문에 굽혀주는 제스쳐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우연히 알게 된 비밀 많은 동생이 오늘따라 애교를 많이 부린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허어 당돌하군! 근데 저렇게 굴어도 밉지 않은 마음이 드니 왜일까? 페로사는 에만의 머리카락을 슥슥 가다듬어준 뒤 손을 떼며 웃었다.
"뭐, 네 손발이 감당할 수 있으면 붙여도 돼. 귀엽고 좋네."
문제라면 준비한 것과는 다른 주문이 들어왔다는 점일까. 그렇지만 어차피 자신도 시원하게 한잔 마셔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라, 더티 마티니는 그냥 자기가 만들어 마시기로 했다.
"저 목갑? 저걸 배달부한테서 빼앗으려고 열두 놈씩이나 배달부를 쫓아왔어. 그런데 난 봐도 모르겠더라... 아무튼 딱 기다리고 있어, 주방에서 블러디 메리 재료 가져와야 되니까."
블러디 메리는 칵테일바보다는 레스토랑 주방에서 재료를 더 찾기 쉬운 칵테일이다. 앤빌에서 제대로 된 블러디 메리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앤빌이 바와 비스트로가 붙어있는 식당인 덕분일 것이다. 목갑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고, 페로사는 빨리 돌아왔다. 삶은 토마토 2개가 블렌더에서 곱게 갈리고, 칵테일 재료라기보단 수프 재료에 가까운 조미료들과 보드카와 함께 셰이커에서 섞여 얼음 담긴 하이볼 글라스에 따라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곧 에만의 앞에 블러디 메리 한 잔과 문제의 목갑이 놓였다.
"너도 트톡 하냐? 오늘 트톡을 하다가 별난 기사를 봤거든. 폐허에서 주워온 안경을 백만 벅에 판다고."
페로사는 마티니 잔에 넣어두었던 부순 얼음을 버리면서 운을 떼었다. 그리고 새 셰이커에 올리브 알갱이 몇 알을 던져넣고 머들러로 으깼다.
"그 물건을 누군가가 구매해서, 구매자에게 배송되고 있었던 모양이야. 문제는, 눈에 안 띄게 보낼 생각이었는지 물류조직도 아니고 개인 배달부한테 맡겼는데 배달부가 죽어서 배송처를 알 수 없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