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디난드는 노트북 앞에 머리를 박고 잠든 애쉬를 보고 있다. 오늘은 12월 달력에 적힌 첫 번째 화요일로 그간 있었던 사건의 기억을 전달해 주는 정기적인 날인데, 정작 전달해 줘야 할 대상은 곤히 자고 있다. 퍼디난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책상에 불편하게 엎드려 잠든 대부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 보니 평소 같으면 깨어있어야 할 애쉬의 주변엔 빈 커피 캔과 레드불이 가득하다. 손가락을 들어 하나하나 허공에 짚어 세어 보니 레드불만 해도 6캔이 넘는다. 문 열리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애쉬가 깨지 못할 정도면 금요일 밤부터 밤을 새운 것이 분명하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니 재떨이를 구비하긴 했지만 담배 하나 태우지 못했는지, 재떨이는 떨어져 이가 나간 흔적 빼고 깨끗하다. 주방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다. 설마 빈속에 커피라도 마신 건 아닐까 흘겨보니 노트북 근처 접시 위에 쿠키 부스러기가 있다. 분명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호밀 쿠키일 것이다. 그 와중에 샤워는 또 했지만 머리 말릴 시간도 아까웠는지 수건은 풀어헤친 머리 틈새를 잘 봐야 등 위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생활력이 떨어지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퍼디난드는 허공에서 이것저것 가리키며 가늠하던 손가락을 맞부딪쳐 소리를 냈다.
"리리, 나 왔어요."
애쉬는 깨지 않는다.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지만 여전히 고개를 모로 박은 모습 그대로다. 혹시 죽은 건 아닐까? 퍼디난드는 조심스럽게 애쉬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결이 느껴지고 애쉬의 등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걸 보며 안도한다. 다행히 그의 대부는 살아있다. 단지 피곤에 찌든 것 같다. 잠든 애쉬의 곁에서 한걸음 떨어진 퍼디난드는 잠시 연민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그가 아는 애쉬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딱딱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웃으로 보면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다. 집안은 늘 깨끗했고, 자기 관리를 확실하게 했다. 살인 사건을 전담으로 맡았기 때문에 밤을 새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선을 넘지 않게 제지하는 사람도 주변에 있었다. 애쉬의 남편 테오도르다. 테오도르는 작년 7월 2일 집을 침입한 괴한에 의해 죽었다. 그날따라 잠시 산책이 하고 싶어 늦게 집에 들어갔던 애쉬가 시체를 발견했다고 했다. 사망 추정 시각으로 미루어보아 평소와 같은 시간에 귀가했더라면 그의 남편은 살아있거나, 아니면 둘 다 죽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법의학자의 무책임한 소견에 애쉬는 시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그날 이후로 그의 대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이 됐다. 딱딱하고, 필요하다 판단하면 원리원칙을 무시했다. 이웃으로 봐도 건조한 사람이 됐고, 이젠 선을 넘지 않게 제지할 사람도 없어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인생의 마차를 몰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서로 어떤 일이 있어도 동정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부도 그가 평생을 앓고 살 마음의 병을 얻던 날 아무런 위로도 하지 않았다.
퍼디난드는 안경도 벗지 못하고 잠든 애쉬의 안경을 조심스럽게 벗겨 한편에 둔다. 그사이 뒤척여 노트북의 무선 마우스를 건드렸는지 화면이 켜진다. 평소 같으면 비밀번호를 쳐야 화면이 뜨는데 단순히 절전만 되어있던 건지 저장도 안 된 문서를 흘끔 본다. 대부의 바로 뒤에서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저장 버튼을 누르며 주변 눈치를 한번 본 퍼디난드가 내용을 한번 슥 읽어봤다. 대체 대부님이 뭘 하다 잠들었는지 궁금했다. 사실상 휴가를 냈으니 일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안식년 휴가를 이후로 은퇴한 것에 가까운 뉴욕의 일을 대신하지도 않을 것인데 뭘까? 흰 화면에 뜬 검은색 글씨는 장황하고 길다. 뭔가 잔뜩 적어뒀지만 독일어로 적혀있어 한참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아무리 그의 증조부가 독일인이고, 그도 독일인의 피가 흐른다고 있다고 해도 제1모국어는 영어기 때문에 아직 완벽하게 읽고 쓰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어릴 적 유창하게 했던 독일어를 떠올리고 화면에 뜬 긴 문장이 애쉬가 작성하던 원고임을 깨달았다.
─ 나는 너희를 인도할 선지자이며 이 피는 거룩한 길을 위한 피다. 나는 메시아요 사냥꾼이자 선지자이며, 위대한 뜻 받들어 종말로 인도할 사자다.
종장. 에스더의 시가 드디어 종장에 들어섰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 지긋지긋한 이야기도 끝이 나는 걸까? 그러면 그의 마음에 끝없는 병을 남긴 새끼도 사라지는 걸까? 색색대는 고른 숨소리가 턱 바로 밑에서 들린다. 퍼디난드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대부는 잠든 모습마저 처연하다. 퍼디난드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잠든 대부를 장난스럽게 쳐다보던 그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지만, 점점 입꼬리가 내려가고 붉은 눈동자 속 흰 테두리가 있는 둥근 동공이 작아졌다. 남들 앞에서 절대 짓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누가 봐도 활기찼고, 여유로웠고, 느긋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밑에서 잠든 대부의 목을 틀어쥘 것 같았다. 손 뻗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에 애쉬가 뒤척였다. 드리운 그림자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더니 잠긴 목소리로 모니터를 보며 웅얼거린다. "딸? 퍼지니?" 퍼디난드의 매섭던 표정이 순한 강아지처럼 풀어지더니 이내 환히 미소 지었다.
"응, 나 왔어요." "으음, 그래. 왔구나.. 미안하구나. 깜빡 잠들었어." "리리 너무 피곤한 거 아니야? 더 자요. 내일 내가 일찍 퇴근할게." "고맙구나." "그렇다고 여기서 잠들지 말구, 침대까지 내가 데려다줄까요?" "됐다, 혼자 가마."
퍼디난드는 그대로 엎어진다. 애쉬의 짧고 낮은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턱 밑으로 푸석푸석하게 마른 잿빛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샴푸 냄새가 난다. 대부님은 더없이 포근하고 좋은 분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고 싶지 때가 왕왕 있다. 몸은 받들고 따르는데 머리는 이 상황을 부정하는 것 말이다. 왜, 그런 것들 있지 않나.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까 봐,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될까 봐……. 오늘 같은 날이 딱 그렇다. 나는 내 인생을 지옥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그 작자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당신이 그 극악무도한 새끼와 동일한 사람임을 아는 것도 오로지 나뿐일 것이다. 아무도 당신의 이면을 모르게 할 것이다.
"근데 나도 졸려요." "너는 네 집이 있잖니. 가서 자렴. 무거우니 내려와." "리리 치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