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어린아이의 모습이길 바란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무구해서 세상의 비극도 저런 일이 있다며 넘기고 눈앞에 있는 민들레에 더 관심을 가질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랬더라면 납득했을 것이다. 신이 성자기에 나는 분노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강하게 드는 충동을 억누르고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목사의 일장연설의 끝에 맞춰 손을 들었다. 하마터면 목을 향할 뻔했던 손에 힘을 주고 가까스로 참는다. 손을 모아 엄지를 이마에 가져다 댔다. 주여,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니, 용서하지 말고 나를 지옥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십시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에스더의 시 3권 4p. "루이스."
12월 3일, 날씨는 춥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얼어붙는 날씨다. 한겨울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출근하는 길에 하마터면 그대로 객사할 뻔했다. 문틀을 붙잡고 기대선 퍼디난드의 머리카락은 꽁꽁 얼었다. 코는 빨갛게 얼었고, 문틀을 잡은 손가락도 새빨갛다. 퍼디난드는 코를 한번 훌쩍였다. "너 야근한 거야, 아니면 출근을 나보다 일찍 한 거야?" "오늘은 일찍 출근했지." 커피 머신 앞에 선 루이스가 허리를 폈다. 루이스는 크게 모난 점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푸석한 금발 머리 밑의 눈동자는 아주 새파랗고, 옅은 주근깨가 있는 얼굴이 환한 미소를 품으면 주변 사람도 같이 웃었다. 다만 왼손 소지 마디가 뭉툭하게 잘려있는데, 이건 첫 파견 때 생긴 사고 때문이다. 루이스는 엉거주춤 머그잔에 커피를 담았다. "그런데 이거 진짜 마셔도 되는 거야? 색이 왜 이래?" "말도 안 돼, 네가 나보다 일찍 출근하는 날이 세상에 어딨어!" 퍼디난드는 놀라 소리쳤다. 루이스가 그보다 일찍 출근하는 날은 없기 때문이다. 야근이 분명하다! 그는 미심쩍다는 듯 머그잔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거 마시지 마."
저 안에 담긴 블랙커피는 끔찍하게 맛없는 커피다! 살인 전담팀의 샘이 사비로 샀지만 서내 모든 사람이 기피했다.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커피는 일반 커피보다 배는 끈적했다. 원두의 문제인지 기계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그 모습부터 여러 사람의 뜬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샘은 치우지 않았다. 유일하게 마시는 사람이 있고, 효과 하나는 죽여주기 때문이다. 퇴사하기 전까지는 살인 전담팀의 리우리엔이 주 고객이었다. 리우리엔은 이 커피를 마시고 이틀을 거뜬하게 밤을 새웠고, 이젠 후임 아이리스가 저 맛없는 커피의 맥을 잇는다. 퍼디난드도 한번 종이컵에 따라 혀를 대봤지만 저건 먹을게 못 됐다. 저걸 루이스가 마신다면 분명 뱉을 것이다. 퍼디난드는 보란 듯이 툴툴댔다.
"그거 진짜 맛없어." "넌 커피를 맛으로 마시냐?" "당연하지!" "가끔 네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가 있어." 루이스는 커피를 마시고 표정을 찡그렸다. "우웩! 이게 뭐야. 킴은 어떻게 이런 걸 마시고 살았대?" "내가 말했지? 그거 진짜 맛없다고."
퍼디난드가 얄밉게 이죽이자 루이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평범한 루이스의 유일한 장점은 키가 아주 크다는 것이다. 그는 퍼디난드의 머리를 꾹 누르며 낄낄 웃었다. "사실 나 밤새우고 새벽에 출근했어." 루이스는 다시 커피를 마셨다. 퍼디난드는 꾹 눌린 고개에 힘을 줘서 루이스를 노려봤다. "레딧에서 쓸모없는 걸로 토론하다 밤새웠냐?" "아니." 루이스는 커피를 마셨다. "그냥. 오늘은 사건이 없었으면 하네." "없으면 잔업인 거 알지?" "알아. 퍼지." "왜?" "퇴근하면 시간 있어?"
퍼디난드는 윙윙 울리는 핸드폰을 패딩 주머니에서 빼 슬쩍 바라봤다. 오늘은 가족끼리 만나는 날이다. 누나인 나탈리가 오늘은 RAW에 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흔치 않다. 벌써부터 단체 채팅방은 저녁에 모인 김에 늦은 추수감사절을 챙기자며 난리가 났다. 왁자지껄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잠시 침묵했다.
"시간 비어. 아주 많이."
조금 위에서 루이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본 건 아닐까 싶어 주머니 속 손바닥이 땀에 젖어 축축해졌다. 루이스는 경찰이기 이전 고아였다. 부모님께서 양육 포기를 선언하셔서 위탁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 루이스가 일부러 시간을 내준 걸 알면 동정한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퍼디난드는 눈치를 보듯 눈을 어색하게 위로 향하게 뜨며 웃었다. 루이스는 그의 새빨간 눈을 마주치고 환하게 웃었다. "잘 됐네. 나랑 미겔 아저씨네 타코 먹으러 가자." "넌 질리지도 않냐?" 아무것도 못 본 것 같다. 퍼디난드는 마주 웃었다. 가족에게 일이 있다고 빠졌다. 누나는 속이 상한 것 같지만 경찰이니 이해한다고 했다. 가족들이 칠면조에 크랜베리 잼을 곁들여 먹으며 NFL 경기 재방송을 볼 시간에 그는 루이스와 칠면조 고기가 들어간 타코를 먹었다. 여전히 끔찍하게 맛없다. 고기에선 알 수 없는 누린내가 나고, 야채는 전부 시들었다. 치즈는 곰팡이가 피지 않은 게 용하지만 루이스는 그게 맛있었나 보다. 이후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샀다. 퍼디난드는 우유를 두유로 바꿨다. 따뜻한 라떼가 찬 바람에서 손을 지켰다. 혼잡한 거리에서 딱 세 걸음만 뒤로 하면 뉴욕 전경이 보인다. 시선을 멀리 둬야 하지만 역시 오늘도 번잡하다. 루이스는 가만히 멈춰 섰다. 퍼디난드도 발걸음을 따라 멈춘다.
"퍼지, 있잖아." "왜? 스타벅스에 지갑 놓고 왔어?" "만약 네가 초능력이 있다고 쳐봐." "갑자기?" "있다고 생각해 봐." "우와, 진짜 너답네. 왜?" "그러면 초능력자가 우대받는 세상이 올까?"
퍼디난드는 루이스를 바라봤다. 루이스의 코가 새빨갛다. 번잡한 뉴욕 거리 속 전광판 빛에 루이스의 얼굴 윤곽이 따뜻한 색으로 비친다. 그리고 하얀색, 그리고 빨간색.. 퍼디난드의 대답은 사람들이 몇 명이고 둘을 스쳐 지나가고 나서 들렸다. "루이스, 사람은 누구나 같아. 우대받을 리가 없지." 루이스는 퍼디난드의 눈을 마주쳤다. 새빨간 눈동자는 동그랗고, 동공은 둥글지만 세로로 길다. 새하얀 테두리가 있는 동공이 루이스를 빤히 쳐다본다.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마주친 루이스는 천천히 웃음을 지어냈다.
"그렇겠지. 최근에 레딧에서 그런 걸로 열띤 토론을 하길래." "뭐라고 하는데? 걔네는 맨날 그런 걸로 싸워, 이상하게." "..있어, 그런 게."
둘은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위협받지 않을 평화로운 뉴욕 밤거리를 걸었다. 라떼를 마시고 숨을 뱉자 12월 초인데도 희뿌연 연기가 나왔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시작도 안 됐는데 캐롤이 어렴풋이 들린다. 그 상황에서 루이스는 한참이고, 걷는 도중에도 퍼디난드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야, 퍼지. 사람은 어째서 같을까?" 루이스의 질문에 퍼디난드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퍼디난드는 말을 돌렸다. "나는 새해엔 한국에 갈 거야." "왜?" "대부님이 한국에 계시거든." "나는 일본에 가보고 싶네." "너답다."
…아, 차라리 그때 대답했어야 했다. 퍼디난드는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잔해에 깔린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전까지 넌 아무것도 모른다며 소리치다 그가 쏜 총에 맞아 뒤로 넘어간 사람이 이 손의 주인이다. 뭉툭한 소지를 바라보며 안전한 곳으로 밀치는 손길에 쓰러졌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무너지는 잔해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