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 품에 안도를 느낄 새도 없이 그 말이 들렸다. 직접 끝내라는 그 말. 윤을 붙든 손이 새하얘지도록 힘이 들어간다. 너무 힘주어 가늘게 떨릴 정도로.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에게 표정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응."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지나간 뒤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윤을 놓고 돌아서 미처 끝내지 못한 양반탈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두걸음, 쓰러진 양반탈에 가까워질수록 넘어선 안 되는 선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흑-"
이윽고 양반탈 앞에 다다른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키며 지팡이를 들었다. 그 끝을 양반탈에게 향하니, 지팡이를 든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걸 막으려는지 두 손으로 지팡이를 고쳐쥐었다. 떨리지 않게, 빗나가지 않게, 그렇게 쥐고서.
내리찍었다. 단숨에. 양반탈-멜리스 리델의 맥이 뛰는 목에.
"흐윽...!"
지팡이는 어설프게 꽂히는게 아닌, 제대로 맥을 찔러 끊었다. 절반 정도 꽂힌 지팡이를 뽑아내며 좀전과 비슷하게 숨을 내쉬었다. 지팡이에 맺힌 피가 흘러 지팡이를 붉게 물들여간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자신은 이제 선 너머에 있었다.
핏빛이 된 지팡이를 한번 휘둘러 흐르는 핏방울이나마 털어내고 그대로 늘어뜨렸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그녀는 다시 천천히 돌아서더니 윤의 곁으로 돌아갔다. 어쩐지 비틀거리는 듯한 걸음으로 걸어와 윤의 품에 달려들다시피 하며, 매달리려 했다. 이유 모를 떨림을 전신으로 드러내면서.
좁은 보폭으로 선비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무기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런 관용을 베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마음은 분노에 더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그러니 제 분노에서, 남들의 분노에서. 절대 용서 받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을 그쪽을 구한 것은 그 덕분이다. 부적을 쥐고, 다리만 얼릴 생각으로 내던진다.
진심으로 안타까운 눈이었다. 눈앞의 이 여성은 어쩌다 아무것도 모르는 삶을 살게 되었는가. 세상을 바꾸고 싶다. 역시 살아남아 세상을 바꾸고 싶어졌다. 인간을 받들게 되자 지금껏 억누른 마음이 꿈틀댄다. 바꾸고 영향을 끼치고 싶어졌다. 죽음은 문화이나 타인에게 저주임을 깨달았기에.
지팡이를 꽂은 손이 잠시 떨렸다. 마법은 불발이다. 막시마 계열의 마법은 휘말리면 그도 죽을 가능성이 높다. 죽음이 두려웠나? 그렇지만 각오한 일이다. 신에게 빌어본 적 단 한번도 없으나 이번엔 빌 뿐이다. 부디 이번엔 실패하지 않기를. 타니아가 편히 눈감을 수 있기를. 그는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짐승에게 밥을 주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나머지는 알아서 생각해 봐. 언젠가 그 이유를 깨닫고 빌어먹을 삶을 부르짖어 보라고. 아니면 근 시일이 되겠지."
지팡이를 비튼다. 살갗을 더더욱 파고들게끔 하며 그가 다시금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결단을 내린다. 각시가 살아남는다 하여도 그는 만족할 것이다. 죽는다면 더없이 혐오스럽겠으나 그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그는 짐승을 주욱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더니?" 하는 것이다.
그는 쓰게 미소짓고 각시를 정확히 쳐다본다. "양껏 살아남아 봐. 내 마지막 자비야." 하며 그가 주문을 외웠다. Impedimenta. 하고는 그 즉시 발로 걷어 차서, 짐승이 있는 그 곳을 향해 넘어뜨리려 한 것이다.
마지막 자비를 줄 것 같았나? 그는 백정을 돌아보며 맑게 웃었다.
"이 짐승들이 이 자의 죄를 씻어 주었으니, 이젠 돌이킬 수 없구나. 죄 죽여 살처분 해버려야지. 그렇지?"
벨이는 아마 이 사건 이후로 혜향 교수에게 "내가 이 자를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하면서 백정이 머리를 쓸어주다 가만히 미소지은 모습으로 눈물만 흘렸을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해도 생명 하나를 죽였으니까요. 혹은 여럿을. 자신도 별 다를 바가 없지만..
마법부 사람이 오든, 그들이 양반탈를 데려가든,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마주 안아주는 윤의 품에 더 파고들려고만 했다. 몇번이고 손을 움직여 붙잡고 가슴팍에 얼굴을 부볐다. 사이사이로 언뜻 받힌 숨소리가 나, 우는가 싶지만서도, 눈물 젖은 소리는 나지 않았다.
윤은 물었다. 무서웠냐고. 놀랐냐고. 그녀는 조금 후에 고개를 움직여 대답했다. 끄덕임이 아닌 가로저어 아니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여태 숨기고 있던 얼굴을 윤에게 드러냈다.
형언하기 어려운 고양감으로 가득 찬 표정에 붉게 물든 얼굴을.
"저, 선배, 저번에, 잠 못 잘 거 같으면, 선배의 방으로, 오라고 했었죠? 그거 아직, 유효해요...?"
숨이 턱 끝까지 찬 사람처럼 띄엄띄엄 말을 한 그녀는 이내 입꼬리를 올리고 눈매를 휘어 웃었다. 탁하게 물든 금안이 곱게 접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