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녀도 그녀 자신의 심정을 제대로 아는게 아니므로 애매하게 말이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작게 웃으며 우는듯한 얼굴을하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단순히 인상을 쓰는걸까?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험적인 데이터와 표정으로 파악하는 그녀에게 갑작스런 표정변화는 읽기 어려운것. 저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몰라 그녀는 울어요? 하고 조금 걱정스럽게 물어봤던가요.
"있죠. 말로는 이쁘니 뭐니 하면서 정작 제대로 봐주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물론 그걸로 슬퍼지는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녀는 항상 이상한 사람만 꼬였다며 자조하듯 웃었습니다. 일단은 아까 울려고 한게 진짜 운건 아닌거 같으니 다행이네요.
"다 잘어울릴거 같은데. 옷도 좀 살까요.."
그녀는 지금 입을건 아니더라도. 어쨌든 패션에 대해 관심이 많은 나이대(?) 였으므로. 이것저것 몇개를 더 골라보며 좋다고 말하는 당신의 반응에 내심 만족한듯 보였습니다. 뭐 진짜인진 몰라도요.
"그러면 한번 입고 와볼래요?"
그녀는 좋은게 더 보이면 골라놓겠다며 당신이 고른 바지를 건네고 탈의실까지 안내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어머니말고 누구랑 뭘 사러온게 언제였던가요. 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무튼간에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그녀는 청바지 한벌정도 더 살까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봤죠.
12월 27일. 날씨는 춥고 유례없는 폭설로 고립된 사람이 많았다. 지금껏 기후문제는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고 이번 여름에도 더웠지만 과학자나 해결해줄 일이라 생각해 관심을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한 날씨였다. 추위는 물론이고 눈도 많이 내려 어디 갈 수도 없는 노릇의 날이었다. 창문 블라인드까지 꽁꽁 친 거실 테이블에 와인, 보드카 할 것 없이 빈 병이 가득하다. 수여받은 훈장은 꼴도 보기 싫어 구석에 던져버렸다. 핸드폰은 12월 26일 오전부터 배터리가 다해 꺼졌다. 소파에 누워 허공을 노려보던 퍼디난드는 26일 새벽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꽤 그럴듯한 침묵이다. 늘 그렇듯 조용한 소음이다. 어둠이 내려앉고 끔찍한 악몽은 그를 좀먹었다.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정도는 각오한 일이었다. 경찰이 된 이상 반드시 보게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죽고 다칠 것임을 교육 받았다. 사살조차 익숙한 일인데도 막상 겪어보니 끔찍했다.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그게 테러라면 더욱이. 다행스럽게도 테러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아주 적었지만 20명이 있던 팀은 15명이 죽고 5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 이후 팀은 자연스럽게 와해됐다. 그리고 지금 여기 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순직한 11명 중 마크는 11월 25일에 사기 전담 부서의 노라와 결혼했다. 페더슨 선배는 딸이 곧 중학교에 입학한다. 아이작은 12월 25일 WWE 경기 표를 얻었다며 신나했다. 퀸 이블을 볼 수 있겠지! 하며 경박한 휘파람을 불다 한대 기어이 맞으며 누나한테 그런 이상한 성희롱 좀 하지 말라며 눈총까지 받았다. 그밖에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여주던 유일한 여성 대원 도나, 무시무시한 힘을 자랑하던 막스, 그리고..
퍼디난드는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드높던 천장이 금방 가려진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눈을 부릅 떴다. 감는 순간 세상은 무너지고 혼자 남기 때문이다. 누군가였는지 기억에 생생히 남는 목소리와 함께 등이 떠밀리고 눈앞에 있던 동료는 깔려 죽는다. 다른 사람을 도울 틈도 없이 발 밑은 아찔하고 눈앞이 빙빙 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얼굴 가죽을 뜯어낼 것 처럼 마디마다 힘이 들어갔다.
한때 영웅 서사를 동경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크나큰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 영웅이라 칭송 받고, 그 자리가 마냥 멋있어 보였다. 영웅의 말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나, 별자리가 되고 영원히 기억에 자리하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영웅이 되어버렸다. 비참한 최후를 맞지 못하고 살아남아 별자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영원히 존경하고자 별자리로 올렸을 것이다. 기억하고자 별자리로 만드는 걸 원하지 않았을 사람은 분명 존재할 것임에도 세상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발버둥 쳤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영웅에 머물러있다. 그 영웅이 겪은 고난과 시련 따위는 알지 못하고, 한때 영웅을 동경하던 자신처럼 무지몽매한 눈으로 쳐다보고 숭상할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참지 못하고 목 깊은 곳에서부터 절망어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입을 벌려 나오는 소리보단 속 깊은 곳에서 짐승이 울듯 괴로워하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몸부림 쳤다. 소파에서 굴러 떨어지고 태고적 어미 배에서 곤히 잠든 태아의 시절처럼 웅크린다.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도 충분한데 그때의 주마등이 멈추지 않았다. 파디난드는 울었다. 지친 짐승처럼 자신을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지쳐 숨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울던 그는 몸을 비틀비틀 일으키곤 테이블 위의 가위를 집어들었다. 퍼디난드는 몸을 일으켰다. 꿈자리가 사나웠는지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어디선가 소음이 들린다. 방음 잘 되는 집이라며! 거짓말인가?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소음의 원인을 찾아 고개를 돌려보니 TV에서 여전히 무표정의 아나운서가 오늘의 비고를 전하고 있다. 그 밑 테이블엔 빈 맥주캔 4개가 안주도 없니 가지런히 놓여있다. 기억났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뉴스를 보다 잠들었지. 나도 참. 아직 덜 깬 술기운 속에서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무슨 꿈을 꿨길래 이렇게 기분이 나빴지? 참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꿈 내용이 다 기억나는 것 같더니 이젠 꿈 내용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개꿈이려니 싶어 그는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손으로 부스스 넘긴다. 이럴땐 술이 약이다. 비척비척 일어난 그는 냉장고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