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08..." 숫자를 곱씹습니다. 앞에 숫자가 붙었다는 건, 8 이 오기까지 7개나 되는 내용들이 남아 있다는 뜻일테니까요. 일단 포스트잇의 내용을 핸드폰으로 찍어 갤러리에 저장해둡니다. 그나저나 은혜를 행한다니... 꼭 어릴때 듣던 괴담에 나오는 주술 같네요. 혹시 8번 외의 포스트잇이 더 있는지 소화는 도서실 안을 다시금 느리게 걸어봅니다.
닦습니다. 그리고 닦습니다! 하도 오래된 동상이라 그런지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윤이 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깔깔거리며 하교하던 여학생 둘이 아라를 보더니 신기하단 듯이 속닥거리며 마저 지나칩니다. 책가방을 앞으로 매고 홀로 하교하던 키 작은 남학생은 혼란을 금치 못하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도망치듯 아리를 등졌지요! "뭐지, 청소분가...?" "교복 입었는데?" "학생이 저렇게 닦고 만져도 되나?" "저거 시체라던데..." "쌤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ㅋㅋㅋ" 지나치는 학생 사이로 어제의 그 남학생이 한숨 쉬는 모습이 섞인 것 같기도 합니다.
>251 소화는 작게 한숨을 쉽니다. 역시 어딜가나 낙서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겠지만... 굳이 이 구석의 도서실 까지 올라와서 낙서를 하다니요. 어쩐지 전직 학생회의 책임감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조용히 시선을 돌려 다시금 도서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설마 포스트잇을 굳이 다른 곳에 옮겨서 숨겨놓을 만큼 성실하게 숨겨두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면서요.
열 명 이상이 모여 의식을 치뤘다. 똑. 똑똑. 물방울이 수면에 떨어지는 소리. 질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따위의 정중한 언사. 촛불이 일렁거린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 열넷. 그대로 분신님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욕심 부리지 않고 끝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는 그러지 않았고, 그대로 ■■에 ■■되고 말았다.
싸우고, 울고, 화내고, 뜯고, 뜯기고, 물고, 물어뜯기고.
시체가 되어 교문에 장식되었다. 붉은 세상이 들리고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보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 쓸쓸해 보인다 칠 수도 있어. 근데 아라 네가 만질 필요는 없지. 어차피 안 닦일 거기도 하고, 별 이상한 소문이 다 도는 동상이니까 보기도 안 좋을 거니까... 막 교장 딸이 남은 피를 쥐어짜내서 피눈물이 흐른다느니, 밤에는 표정이 바뀐다느니, 만지면 뭐가 옮는다느니, ...그래, 만지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으니까. 관리자가 닦든 철거하든 학교에서 알아서 할 문제니까 굳이 네가 착한 마음 쓸 필요는 없는 거지. 알았어?"
눈을 가늘게 뜬 소화의 모습에, 헛하고 놀란 표정을 지어보인 아라가 당황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울상을 지어보인다. 겸손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한 것 뿐인데 보기 안좋다는 말을 하며, 눈을 가늘게 뜨는 선배님이 무섭기도 하고, 이게 아닌데 싶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중이었다.
" 다음부턴 조심할게요오.. "
뭘 조심한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심한다는 말을 하며 다시 아까처럼 소화가 미소를 지어주길 바라는 듯한 아라였다. 아라가 긴장하고 풀이 죽은 것을 보여주듯 산뜻하게 움직이던 양갈래 머리도 축 쳐져선 힘이 빠진 것만 같아 보였다.
" 네...! 선배..! 노력할게요..! 선배가 또 기뻐하시니까 칭찬해주실 수 있게! "
아라는 언제 축 쳐졌냐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요령좋게 걸어가면서 소화를 올려다보는 것이 뭇 자그마한 강아지 같아보였을지도 모른다. 분명 앞으로 다음 시험까지 열심히 공부할 것이 뻔한 아라였다. 그야, 소화가 그것으로 기뻐한다고 했으니까.
" 윽.. 3학년...그러면 소화 선배는 졸업해버리겠네요... 뭔가 벌써 아쉬워요.. "
스터디그룹 이야기 보다도 소화가 졸업하는 것이 벌써 서운한지 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린다. 자그마한 손으로 가방의 끈을 꼭 쥔 체 앞을 바라본 아라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곤 보도블럭을 바라보며 걷는다.
" 그래도 그 전까지 소화 선배랑 좋은 추억을 잔뜩 쌓아야겠어요! 그, 스터디그룹 이야기도 들어보구요! "
이 겁 많고 걱정도 많은 빨간 다람쥐는 작은 변화에도 금세 움츠러들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참 귀여웠다. 소화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워서 잠시간 그 반응을 보며 침묵하다가 괜찮다는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만약 더 장난기가 돌았다면 그 동그란 볼을 찔러보며 겁 먹은 표정을 구경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그리 가까워질 생각도 없다는 사실을 소화는 잘 알고 있었다.
"내 칭찬이 그렇다 중요하다니 놀라운걸. 그래도 내가 아라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좋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런 좋은 후배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다만 소화가 두려운 것은 자신의 깊은 곳, 밝혀져서는 안되는 면이 드러나며 앞으로의 명성에 오명을 끼얹는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 경계심은 소화라는 사람을 신비롭게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이런 좋은 사람과도 어울릴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소화는 그 솔직한 후배의 심정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특유의 경계심이 모르는 척 말을 돌리게 했다.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게 되는 법이니까. 그 동안은 잘 지내보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언제든 도와줄게."
이 가여울 정도로 솔직한 아이를 보며 소화는 조금 동정심이 동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피식 한숨 같은 웃음을 지으며 바닥으로 떨궈진 루비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라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빙그르 굴려서 마치 대수롭지 않은 일을 꺼내듯이 가볍게 말을 꺼냈다.
"스터디 그룹에는 학생회도 있고, 뛰어난 아이들도 많으니까 내가 떠나더라도 도움 받을 수 있을걸? 어쩌면 그 중에 내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