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제는 효과가 죽여줬습니다. 하지만 꿈을 막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안타깝게도 다림의 꿈은 꽤 안 좋았습니다. 끝없이 빠져들기도 하고, 있을 리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나요?
그리고 눈을 뜨면 하얀 천장이 보입니다. 보건실인 모양이네요. 옆 자리를 둘러보면 의식을 잃은 이들을 입원시킨 침상이 보입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 라고 생각하면 감긴 붕대가 보이고... 분홍색 털실뭉치가 웅크리고 있는 침대를 보면 오렐리 양.. 그러니까 오렐리 샤르티에 양이 있는 침대를 보면서 깨기 전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천재님은 깨어날 시간대도 정할 수 있다! 다림이가 깨어날 즈음에 딱 깨어나도록 조정해놨을 것이다!
"오렐리 양...?" 어릴 적에 행운을 빌어준 인형가게의 소녀로 기억하기엔 좀 많이 키 차이가 나게 되었지만 분위기는 역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깨어난 걸 보았지만 사과는 해야 하지요. 릴리 양을 보면서 조금 망설이는 듯 우물거리고는
뭐긴요, 재미있는 이야기 들은 표정이죠! 신기하니까요. 청천은 가볍게 속도를 맞추면서 진화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뭔가...갑작스럽네요."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그의 얼굴에는, 뭔가 아리송해하는 표정이 잠시 떠오릅니다. 역시 사랑 또한 일상을 흔드는 힘이 있는 것일까요.
하지만 청천은, 곧 웃어보입니다.
"그래도 확실히 진화 형 뭔가...전보다 당당해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좋은 일이겠지요."
지금보다 두세 살 어린 청천에게 있어, 이런 일들은 조금 혼란스러운 일들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청천은 알지요. 당사자에게 좋은 일이면 그냥 '아, 좋은 일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늘 대하던 대로 무난하게 대하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의 진화에게 있어, 이 일들은 확실히 긍정적인 일인 듯 했으니까요.
"저번에 형이...뭐랬더라.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할 일을 하라고 모두에게 외칠 때. 그땐 좀 멋졌어요."
이상한 티아라에 조종당하는 다림을 제압할 때의 일이었지요. 어쩌면 사랑이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청천은 생각해봅니다.
- 본인한테 물어보면 모르겠다거나 맛있는 음식?정도로 답하겠지만...(평소에 남이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진 않으니까요.)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멀쩡한, 형체 있는 매개체가 남아있는 사람(예를 들어...어릴 적부터 계속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227 기록vs기억
청천 : "둘 다 중요해." 청천 : "어릴 적의 나라면 기억이라고 했겠지만..." 청천 : "기록 없는 기억은 그저 아,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빈 자리일 뿐인걸."
아리송해하는 그의 말에 나도 솔직하게 웃으면서 동의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사자인 나 조차도 어쩌다가 그렇게 된건지 아직 잘 모를 정도인데. 간략하게 얘기로 듣는 그는 오죽할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줘서 다행이다.
"....확실히, 그럴지도 몰라. 뭐라고 해야할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까....더 이상 한심한 모습으로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고 해야되나."
오기와 자존심이 생긴다고 해야되나. 다만 오로지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련장에서 허수아비와의 싸움으로 기술을 익히고, 요 근래 실전을 자주 겪으면서. 나는 나 나름대로 자신이 붙고있는 걸지도....물론, 자만하기엔 아직 멀었지만 말이야.
"아 - .....그게 말이야....솔직히 요즘, 전투 중에 가끔씩 그래."
나는 볼을 긁적이곤,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이중인격이라던가 그런건 아니지만. 어쩐지 전투중에 고양되거나 중요한 순간엔, 성격이 휙 바뀌는 듯한 감이 있다고 해야되나. 나는 그에게 지난번 천둥의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간단히 설명해주곤, 본능적 방어 행동 기술을 보여주었다. 청천이가 말하던 그 때도, 천둥신의 고위 사제에게 대적했을 때에도, 뭐라고 해야할까 평소의 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는데. 영 신기한 감각이다.
릴리는 다소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하루를 쳐다본다. 그리고 뻣뻣하게 웃는다.
“설마 해서 와 봤는데, 진짜로 일을 하고 있구만……. 당신, 그거였어? 하우스푸어?”
그야 그렇게 으리으리한 집에 산다면 돈을 걱정하는 게 외도 아니겠는가! 한때 신 한국에서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속담조차 있었을 터인데……. 더구나 여기는, 전에 그 엉터리 마도서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한 양반이 있는 가게 아니던가.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릴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 바쁜 와중에 미안하네. 일단 카페오레. 뜨신 걸로.”
그러면서 아무 비어 있는 창가 쪽 자리로 가 걸터앉는다. 탁자는 햇빛을 받아 노랗게 반짝였지만 릴리가 택한 의자는 그늘 속이다. 일단 커피의 맛을 보고 판단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잘 해 나가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오기는 왔다만…… 이건…… 다소 충격적일 정도로 성실하네…….’
그 점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릴리의 머릿속에는 어떤 사실 하나가 번뜩 하고 떠올랐다. ‘아니지, 그만큼 으리으리한 집에서 수발을 받으며 사는데 아르바이트 따위는 전혀 힘들지 않은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