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때부터 수련이 매일이었다 함은 벌모세수를 받았다는 이야기인가? 과연 명문 무가의 자식이었던 것이 분명하구나! 하리의 눈길에 시기와 질투의 빛깔이 슬며시 감돌았다. 이제보니 돈이 없어 이 치즈팡팡이라 하는 것을 사먹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이 잘 사먹는 음식이라 가문에서 제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렇소? 척 보기에도 수행이 남다르다 싶더니, 명문 무가의 손이셨나보오. 하긴 이런 중요한 행사의 책임자로 아무나 맡길 리 없으니..."
생각해보면 이계의 인물을 맞이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 중대한 사안에 아무나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제 아는 선에서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하리가 애써 투기어린 마음을 감추고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옷은 되었소. 오며가며 보니 그 옷이 좀..."
그리 말한 하리가 슬쩍 벨벳을 보았다.
"너무 몸에 달라붙고 짧은것이, 남사스러워서 원!"
그렇게 잠시 제 뺨 가까이 대고 손부채질을 하던 하리가 크흠 소리를 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옷은 되었고, 여기서 쓰는 장신구같은 것이 있으면, 그거나 좀 구경하러 갑시다."
벨벳 - 하리 "아뇨. 전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예요." 벨벳이 하리에게 극구 부인하는듯 손사래를 쳤습니다.
"휴식중인 테크들이 해야하는 일중 하나 일뿐이예요. 물론 테크도 아무나 라는건 아니지만요."
테크가 태생을 가리는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리가 벨벳을 남사스래 쳐다보자 벨벳도 그 시선을 느낍니다. "이게 왜요?" 티셔츠와 청바지. 그저 평범한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부터 아래까지 탄탄하고 잘 빠진 몸. 살짝 탄듯한 갈색의 피부와 조각같은 근육. 게다가 남사스러운 반팔과 배를 드러내고 있는 티셔츠 입니다. 거기에 마치 고목같이 단단하고 아름다울 정도의 다리. 그것을 조금이라도 가리고 싶은듯 무릎까지밖에 안 내려오는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튀어나올듯한 몸매에 이 옷을 입으니 예. 남사스럽긴 하네요.
"하지만 이런 옷이 더 움직이기 좋잖아요? 안 그런가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벨벳의 표정입니다.
"헬퍼즈 내부에 장신구 같은걸... 팔지 모르겠네요? 한번 돌아다녀 봐요." 상점가를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모습을 보고도 하리는 그저 이 소저께서 겸손을 떠시는구나 하고 말았다. 테크도 아무나 하는건 아니라는 소리를 들어보면, 어쩌면 그 테크라는 것이 어디 황실에 높이 출사한 무관 같은것이거나, 정파 세가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사람을 가려뽑는다 하는 무림맹의 단들과 같은 것이리라.
"아이, 이 소저가 참!"
새삼 다시 벨벳을 돌아보려던 하리가 도무지 눈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몰라 그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저리 팔뚝에 배며 장딴지까지 다 드러내고 있다니! 아무리 다른 세계라지만, 이 11세기 송나라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패션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움직이기 편해도 그렇지! 우리 세계에서 그리 입고 다녔다간 사람들이 모두 놀라 기절초풍할 것이오!"
그리 한차례 기함을 한 하리가 벨벳과 함께 상점가를 돌아다니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새빨간 보석 장미에다 작은 색색의 보석인지 글라스틸인지 알 수 없는 큐빅들로 장식되었고, 옷에 매달 수 있도록 한 줄 길게 고정장치가 뻗어나온 것이 언뜻 머리핀같이 보이기도 하며 부담스럽도록 화려한 것이 딱 하리 취향인...
"여름용으로 성기게 짠 천은 바람이 잘 통해 시원하니 상관없소. 오히려 따가운 볕을 막아주어 나은 감이 없잖아 있고..."
여전히 벨벳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하리가 어흠 크흠 하며 먼 데다 시선을 두었다. 뭐 습한 날에는 천이 달라붙어 덥긴 하다느니, 그래도 그렇게 짧은 옷은 좀 아니라느니 하며 이런저런 소리를 계속해서 웅얼거리긴 했지만 실제로 제가 뭔가 생각을 하고 말한다기보다는 워낙 당황스럽고 경황이 없어 아무 소리나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보통 사람이 그랬다면야 그저 '저런 쯧쯧!' 하고 말았을 터이지만, 이 아무리 보아도 얼빠기질이 있는 것이 분명한 수적은 역시 녹의홍상 특성이 있는(추정) 이런 예쁜 언니에게는 약했던 것이다.
"정장이라면 관복같은 것으로 아는데. 여기서는 사내들이 이런 꽃장식을 한단 말이오?"
하리의 앞머리 한 가닥이 디용 하고 솟아올라 갈고리 모양을 만들었다. 이게... 남성용이라고? 꽃모양인데? 이렇게 예쁜데? 이것이 머리장식이 아니라니 이건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거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머리장식으로 쓰면 딱 예쁠 것 같은데! 하는, 그런 알 수 없는 항의가 가득한 하리의 얼굴이 벨벳을 향했다.
"벨벳 소저, 이 말이 정말이오? 이걸 머리핀으로 쓴다거나... 뭐 그런 일은 전혀 없소?"
처음 벨벳 또한 이것이 뭔지를 몰랐던 것을 보자면, 벨벳이라고 알 리 없는 이야기였겠지만, 하리는 굳이 그렇게 벨벳에게 질문했다. 부토니에의 장식 모양이 꼭 마음에 들어, 꼭 갖고 싶은데. 괜히 엉뚱한 것을 사느냔 핀잔을 들을까 싶어 선수를 친 셈이었다.
남자 여자 굳이 가릴 필요 없이 옷에 꽂으면 된다는 소리에 하리는 화색이 되어 냉큼 부토니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직원이 추천하는대로 이런저런 머리핀들을 정신없이 집어든 것이다.
"이것도 예쁘고, 이것도 예쁘고, 이거랑 이거랑 이것도 예쁘고...!!"
직원이 가져다준 것들 중에서도 조금 덜 예쁜 것들은 걸러내고 난 뒤에도, 하리의 앞에는 이미 장신구로 된 작은 산이 쌓였다. 몇몇개는 한번씩 머리에 대어보거나 꽂아보기까지 하여, 이미 하리의 머리에는 각종 머리띠나 리본이나 핀 따위로 빈 곳을 찾기가 오히려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헉!!!"
은은한 금색에 글라스틸이 반짝거리는 목걸이라니! 그야말로 취향을 저격하고 만 목걸이에 하리의 눈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듯 했다. 홀린 듯 그 목걸이를 집어든 하리가 간절한 눈빛으로 벨벳을 돌아보았다.
수상쩍기 짝이 없는 상태창이 떴음에도 불구하고 쿨하게 FLEX 해버리는 벨벳을 보고 신난 하리가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고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
"합..."
거의 벨벳을 끌어안을 기세로 즐거워하던 하리가 흠칫 굳으며 급히 숨을 들이켰다. 당연히 어물쩡 넘어갈 생각 만만으로, 저 장신구들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사달라고 한번 졸라볼까? 하던 중에 허를 찔리고 만 것이다. 그제야 눈앞의 이 어딘가 어리숙해보이는 낭자께서 단순한 블랙말랑카우가 아닌 무시무시한 근육을 가진 외공의 달인임을 새삼 깨달은 차...!
"받으시지요."
속으로 잉잉 울음을 터뜨리고 있기라도 한 양, 한껏 시무룩한 표정이 된 하리가 주렁주렁 차고 있던 팔찌들 중 하나를 풀어 내밀었다. 금줄에 각색의 곡옥이 주렁주렁 달린, 현대 기준으로는 조금 난해한 디자인의, 하지만 값만큼은 확실히 많이 나갈 것으로 보이는 팔찌였다.
"생각해보니 종일 나와 함께 다니며 여기저기 구경시켜주신다고 이래저래 고생하지 않으셨소? 소저께서도 위에서 명을 받고 하신 일이기는 하겠으나... 내 개인적으로도 감사를 표하고 싶소이다."
얼핏 말만 듣기로는 참으로 관대한 대인배의 풍모가 느껴지는 소리였으나, 그리 말하는 얼굴이 잔뜩 울상에다 팔찌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기도 하였고.
"이건 은혜라 하실건 없고, 그저 내 후의외다!"
하며 굳이 조금 전 벨벳의 말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한마디를 덧붙이는것이, 참으로 좀스럽고 쪼잔해보였다.